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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만물들의 감사 (계 4: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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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북한에서는 개인이 성경을 소지한다든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신앙 때문에 공개처형 당하는 일들이 간간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북한에 칠곡교회와 봉수교회가 있고 또 지금도 교회 하나가 지어지고 있기는 하지마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살펴보면 이것은 전시용이나 선전용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의 유물관(唯物觀)과 기독교의 유일사상(唯一思想)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나 공산화 되는 과정에서는 많은 순교의 피가 흘렀던 것이 사실입니다.
한 시골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중에 공산당들이 들이 닥쳤습니다. 예수님의 초상화를 마루바닥에 펴 놓고 “누구든지 너희들이 믿는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발로 짓밟고 가는 사람은 살려주겠지만 그러지 않는 사람은 총살 시키겠다.”고 위협을 했습니다.
어른들은 대부분 살기 위해서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발로 짓밟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소년은 어른들이 침을 뱉고 발로 짓밟고 간 그 예수님의 얼굴 위에 엎드려서 눈물을 흘리며 자기 옷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으면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 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 늘 지고 가리다 그 면류관을 쓰려고 저 천국 가겠네
저 수정 같은 길에서 면류관 벗어서 주 예수 앞에 바치며 늘 찬송하겠네
뭇 천사 소리 높여서 늘 찬송할 때에 그 좋은 노래 곡조가 참 아름답도다
그 면류관도 귀하고 부활도 귀하다 저 천사 내려 보내사 날 영접하소서’
찬송하면서 그 소년은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찬송가 365장 2절은 ‘내 몫에 태인 십자가 늘 지고 가리다 그 면류관을 쓰려고 저 천국 가겠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면류관을 쓰려고 우리는 지금 예배드립니다. 그 면류관을 쓰려고 하나님 앞에 봉사하며 헌신합니다.
그런데 3절에 보면 ‘면류관 벗어서 주 예수 앞에 바치며 늘 찬송하겠네’ 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면류관 쓰기 위해서 이렇게 헌신하고 봉사하고 달려가고 믿음을 지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받은 면류관을 벗어서 어떻게 한다고요? 주 예수 앞에 벗어서 바친다고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 10절을 우리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24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벗어서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아멘>.
오늘 이 본문에는 그 면류관을 주님 앞에 던지면서 찬송을 하고 있습니다. 네 생물과 24장로들의 경배가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데 이 예배는 구속(救贖)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늘나라에서 드릴 예배를 보여 주는데 참예배의 모델이 되는 예배입니다.
네 생물은 하나님을 모시는 시종(侍從)들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천사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24장로는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을 가리키고 있는데 구약의 12지파는 구약의 성도들을 가리키고 신약의 12사도는 신약의 성도들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천사들과 성도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 모습이 참예배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하여서 참예배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 우리들도 이런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네 생물과 24장로들이 드리는 예배를 본 받아서 예배드릴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드려지는 예배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열납되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달려 간 신앙의 선배들

특별히 오늘 <면류관을 보좌에 던지며 가로되...>하는 이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에는 두 종류의 면류관(冕旒冠)이 있습니다. ‘디아데마타’라는 면류관이 있는데 이 면류관은 왕들이 쓰는 면류관, 통치자가 쓰는 면류관, 즉 왕관(王冠)을 의미합니다. 또 하나는 ‘스테파노스’라는 면류관인데 이 면류관은 헬라시대에 운동선수들이 경기장에서 열심히 뛰어서 승리했을 때 승리자(勝利者)에게 주는 면류관인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면류관은 바로 이 면류관입니다.
이 면류관은 승리자에게 주는 면류관입니다. 충성하는 자에게, 헌신하는 자에게, 말씀을 지킨 자에게, 전도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賞)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6절에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 가운데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면류관을 쓰기를 힘써야 되고, 또 면류관을 뺏기지 않도록 노력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면류관이라는 상급을 받기 위해서 늘 힘쓰고, 늘 달려가고, 믿음 지키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 예수님 믿으면 되지, 면류관이라는 상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유치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상급을 받기 위해서, 면류관을 받기 위해서 달려가는 그 신앙을 유치하다고 한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다윗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에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나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겠다는 고상한 목적을 가지고 나간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왕 사울이 현상금(懸賞金)을 내걸었습니다. 골리앗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왕의 딸을 주어서 사위로 삼고, 그의 아비의 집을 자유케 하리라고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다윗이 이 이야기를 듣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정말로 골리앗을 죽이면 왕이 말한 상금을 준다고 합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대답을 했습니다. “아, 그럼, 그렇고 말고. 임금님이 그렇게 선포를 했어.” 
다윗은 또 다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골리앗을 죽이면 정말 왕이 말한 상금을 준다고 합니까?” 역시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확신을 가지고 상금을 타기 위해서 골리앗을 죽이러 나갔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러 나간 것은 나라를 구하려는 고상한 목적이 아닙니다. 상금 때문에 갔습니다. 두 번이나 사실을 확인하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윗의 그 삶을 책망하지 않습니다. 유치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모세를 보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2장 24절을 보면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바로에게는 아들이 없고 공주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공주의 아들이 바로 모세였습니다. 곧 왕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당시 세계 최강대국의 왕이 되는 것도 거절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과 고난당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당시 세계 최강대국의 보화보다도 하나님을 위해서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여러분들, 애굽의 보화가 얼마나 대단한 줄 아십니까? 지금도 이집트의 박물관에 가 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문화적 유산이 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이나 대영박물관이나 로마의 박물관에 가 보면 이집트에서 뺏어 온 유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유물들이 있는데 이런 것을 본다면 과연 이집트의 보화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이런 보화도, 왕이 되는 것도 다 거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상을 받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다 포기 했습니다. 최강대국의 왕이 되는 것도, 최강대국의 수많은 보화도 다 포기하고 고난을 택했습니다. 하나님의 상을 받기 위해서 입니다.
이런 모세를 유치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잘 선택했다고 칭찬합니다. 신앙의 모델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바울보세요. 빌립보서 3장 1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서신을 보면 한번도 걸어갔다는 말이 없습니다. 항상 ‘쫓아갔다, 달려갔다’는 말을 쓰고 있는데 자기의 모든 삶을 다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서 쫓아갔습니다. 그것도 상 받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의 마지막 말을 들어 보세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이처럼 바울도 면류관 받기 위해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울의 삶을 유치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책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칭찬하고 있고 다윗이나 모세나 바울은 신구약 성경에서 신앙의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상 받기 위해서 쫓아갔습니다. 면류관 받기 위해서 쫓아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실 상을 받기 위해서 힘쓰는 것이 유치한 신앙이 아니라 아름다운 신앙임을 믿고 상 받기 위해서 힘쓰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면류관 받아쓰기 위해서 노력하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해에 계신 한 장로님이 환상 가운데 천국에 갔습니다. 가 보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면류관을 받아쓰고 있는데 자기 면류관을 찾아보니까 개털모자입니다. 그것을 쓰고 나가서 돌아다닐 수가 없어요.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다가 깨어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개털모자 쓰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하여서 지금은 훌륭한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우리 영락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면류관 받기 위해서 힘쓰고 노력하고 신앙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다 빛나는 금면류관 받아 쓸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도 개털모자 쓰는 사람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보면 여러 가지의 면류관이 나옵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과 요한계시록 3장 10절에 보면 <죽도록 충성하고 시험을 참고 이긴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보면 믿음으로 승리한 자에게<썩지 않는 면류관>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에 보면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자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2장 19절에 보면 <전도 많이 한 사람에게 자랑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베드로후서 5장 4절에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을 잘 양육하고 잘 이끌고 모범된 성도들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런 면류관을 다 받아 쓸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힘써 얻은 면류관을 주님께 벗어 드립니다.

이 면류관을 받아쓰기 위해서 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물질 드립니다. 시간 드립니다. 재능 드립니다. 그렇게 해서 면류관을 받아씁니다. 그런데 10절을 보세요. 그렇게 힘써 얻은 면류관, 그 귀한 면류관을 어떻게 합니까? <벗어서 우리 주님 계신 보좌 앞에 던진다>고 했습니다.
우리말에는 <던진다>고 했지만 자신의 면류관을 벗어서 주님 계시는 보좌 앞에 자발적으로 드린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귀한 면류관을 왜 보좌 앞에 내려놓습니까? 왜 주님 앞에 드립니까?
내가 힘쓰고 애써서 쓰게 된 면류관이지만 주님 앞에서 내 모습을 바라보니까 내가 노력했으나 내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 때문에 내가 면류관 받아쓰게 된 것을 깨닫고 아, 이것은 내가 받을 면류관이 아니구나, 주님께서 힘주시고 믿음주시고 은혜 주셔서 이 면류관 내가 받아쓰게 되었으니까 이 면류관은 주님께서 받으셔야할 면류관이구나 하고 면류관을 주님께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자녀가 대학에 들어 가 4년 동안 공부를 잘 했다고 하십시다. 4년 동안 공부를 잘 하고 졸업을 하는 날 가족과 함께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 자녀가 학사모를 부모님의 머리에 씌워드리고 사진을 찍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내가 4년 동안 열심히 공부를 해서 졸업장을 받고 학사모를 썼지만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부모님의 은혜 때문에, 부모님의 사랑 때문에, 부모님의 보살핌 때문에 내가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광 부모님께 돌려 드립니다, 하고 부모님께 학사모를 씌워 드리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면류관을 받아쓸 때에 ‘내가 노력한 것 같았는데 생각해 보니까 내 노력만이 아닙니다. 내가 힘쓴 것인 줄 알았는데 내가 힘쓴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은혜를 주셔서 내가 이 면류관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고 면류관을 벗어서 주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상(天上)에서 드리는 예배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면 우리도 다 이런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만 이런 예배를 드리지 말고 이 땅에서도 이런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도 이런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예배를 드리라고 사도 요한을 통해서 예배의 모델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나에게 이 세상의 어떤 면류관이 있습니까?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내가 가진 것이 뭐가 있습니까?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힘쓰고 애써서 얻은 것 같아도 하나님 앞에서 보면 다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부모가 있습니까? 자녀가 있습니까? 부부와 형제가 있습니까? 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면류관들입니다. 내게 생명과 건강이 있습니까? 재능과 특기가 있습니까? 이것도 다 하나님께서 주셔서 내가 쓰고 있는 면류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까? 열심이 있습니까? 주님을 향한 특심한 사랑이 있습니까? 이것도 주님이 주셔서 내가 믿어지는 것이고 내가 열심 내는 것입니다. 내게 재물이 있다면 그것도 주님이 주셔서 내가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 앞에 돌려 드리는 것, 감사하는 것, 바로 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라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를 되돌려드리는 것이 바로 예배고 이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키우면서 경험하는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조금씩 철이 들면  부모가 주는 용돈을 모아서 부모의 생일이라든지 어버이날에 부모에게 생각지도 않았던 선물을 하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 선물은 누가 준 돈으로 마련한 것입니까? 부모가 준 돈입니다. 자녀의 돈이 아닙니다. 부모가 준 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아서 부모에게 선물을 하면 마음이 흐뭇하지 않습니까? 부모가 준 돈 임에도 자녀가 부모에게 되돌려서 감사하면 부모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감동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물질입니다. 그런데 이 물질을 내가 하나님께 되돌려서 감사로 하나님께 드리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예배의 모델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몸으로, 마음으로, 찬양으로, 물질로 되돌려 드리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임을 깨닫고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되돌려 드릴 수 있는 내 면류관, 내게 있는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짐승에게는 이런 마음이 없습니다. 개를 키우는 사람이 먹이를 주고 사랑하고 아껴주지만 그러나 개 밥그릇을 빼앗아 보세요. 으르렁거리고 심하면 물어 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특히 하나님의 사람들은 받은 것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기를 기뻐합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기를 기뻐하는 것이 성숙한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100세에 주셨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얼마나 귀합니까? 아브라함에게는 정말 면류관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좀 자랐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燔祭)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귀한 아들을 어떻게 부모가 자식의 목을 베어서 피를 내고 내장을 다 끄집어내고 손과 발을 다 잘라서 장작더미 위에서 올리고 태워서 번제로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부모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하신 하나님의 약속과는 맞지 않는 명령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이삭을 바치기 위해서 산으로 갔습니다. 장작 위에 자식을 올려놓고 죽이기 위해서 칼을 들어 치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獨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지난 주간에 창세기 22장을 새벽기도 시간에 살펴보면서 이 말씀이 얼마나 저에게 은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네게 가장 귀한 아들, 면류관과 같은 아들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아노라>
또 계속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가장 귀한 면류관을 네가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리라.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같이 번성케 해 주고 네 자녀들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되리라>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를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 돌려 드린 것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너무너무 감격하셔서 감동하시고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며 번성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되돌려 드리는 이것이 참된 예배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내가 쓰고 있는 면류관을,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이 예배,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감동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내가 가진 것이 있다면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내가 믿어진다면 그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요, 내가 열심을 내었다면 그 마음도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요, 내가 헌신했다면 그 몸도 하나님께서 주신 몸이요, 내가 충성했다면 그 재능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내가 물질로 봉사했다면 그것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입니다.
내가 높은 지위에 있다면 그것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셔서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게 된 것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니 가장 귀한 것 주님께서 원하실 때 되 돌려 드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이 되어서 아브라함이 받았던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 가지고 지금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몰라준다고 화를 내고 시험에 드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제 받은 은혜를 은혜로 알고 하나님께 면류관 벗어서, 내게 있는 가장 귀한 것 벗어서 드리는,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나 간 6개월을 되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축복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가장 귀한 것, 면류관이 무엇인가, 그것을 찾아봅시다. 그 면류관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돌려 드린다고 벗어서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금년에 내게 주신 축복은 무엇입니까? 없는 것 같아도 찾아보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면류관 받아서 <오냐, 잘 가져 왔다>하고 받아서 잡수시는 분이 아니고 이것을 우리에게 다시 돌려주시되 아브라함에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축복,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삶을 책임져 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받은 것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는 신앙이 되어서 아브라함이 받았던 이런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더 큰 감사꺼리를 주십니다.

빌 게이츠(William H. Gates)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큰 부자 아닙니까? 그의 재산이 500억 불입니다. 500억 달러면 우리 돈으로 50조원입니다. 그런데 1천만 달러만 자식에게 주고 다 사회에 내어 놓겠다고 공언(公言)을 했는데 실제로 그는 약 300억 달러, 30조 원을 내어서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만들어서 사회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두 번째 가는 부자는 워렌 버핏(Warren Buffett)이라는 사람인데 며칠 전에 그는 자기 재산의 85%인 374억 달러, 약 37조 원을 사회에 내어 놓겠다고 말하고 300억 달러, 30조 원을 빌 게이츠 재단에 내어서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쓰도록 했습니다. 말이 30조 원이지, 30조 원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상상이 안 되는 돈입니다.
이처럼 서구 사회는 기독교 정신 위에 세워진 사회이기 때문에 이렇게 감사하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가진 자의 책임, 가진 자는 다른 사람에게 베풀 책임이 있다는 기독교의 정신이 온 사회에 깔려져 있는 사회가 아닙니까? 
그들은 생각합니다. 내가 번 돈은 내 힘으로 번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생명주시고 건강주시고 재능 주셨기 때문이고, 또 다른 사람들이 내 사업장에 와서 나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번 돈이기에 다시 돌려 드리고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되돌려 드리는 문화, 이게 성숙한 인격이고 신앙입니다. 우리도 이런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창조해 갈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벌었으니 내 것이라고 내 것만 챙기지 말고 하나님이 은혜로 주셨으니 하나님 앞에 드리고 사회의 모든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얻게 되었으니 사람에게도 내어 놓을 수 있는 이런 문화를 우리가 창조해 나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과 면류관이 무엇이든지 받은 축복과 면류관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신앙과 예배가 하나님을 감동시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끌어당길 수가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내가 가진 것 중에서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살펴보세요. 내 생명은 내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오라고 하시면 오늘이라도 하나님 앞에 갈 수 밖에 없는 것이 내 생명입니다. 내 건강이 약하다, 힘들다고 해도 내게 생명이 있기 때문에 약한 건강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얻을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소유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재능도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내게 있는 면류관이 무엇입니까? 자랑거리가 뭡니까?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뭡니까? 그것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되돌려 드릴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로 되돌려드리는 이런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감사해서 이렇게 돌려드리는 신앙인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10명의 나환자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와서 엎드려서 감사했다, 사례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어나라, 일어나서 걸어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나를 문둥병에서 고쳐 주신 것은 주님이십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하는 이 믿음이 그를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어떤 구원입니까? 질병에서의 구원이 아닙니다. 질병에서 구원된 것을 감사하는 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영혼의 구원, 상상할 수 없는 구원의 축복을 다시 그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귀한 생명, 너무너무 소중한 생명을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 되돌려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을 또 내려 주셨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촛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별빛을 주실 것이고, 별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달빛을 주실 것이고, 달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햇빛을 주실 것이고, 햇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촛불도 별빛도 달빛도 햇빛도 필요 없는 영원한 천국을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작은 것이라도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큰 것으로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내 면류관이 뭡니까? 전반기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귀한 축복이 뭡니까? 가장 귀한 것이 뭡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인 줄 깨닫고 되돌려 드리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무 감동하셔서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며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고 하신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이 오늘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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