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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집념의 신앙인 야곱 시리즈(1) 발꿈치를 잡은 아이 (창 25: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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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념의 사나이

영국의 세계적인 등산가 조지 말로리(George Mallory)에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그토록 열심히, 목숨 걸고 산에 오릅니까?" 이 때 말로리는 아주 유명한 말 한 마디를 남깁니다. "산이 거기 있어서 오릅니다." 그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산을 최초로 정복하기 위해 오르다가 실종됩니다. 산을 사랑했던 집념의 사나이답게 그렇게 사라져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집념의 사나이가 있습니다. 히말라야의 8천m 넘는 봉우리 14개를 모두 정복한 엄홍길 대장입니다. 작년에 엄홍길 대장은 에베레스트에 오르다가 실종된 동료 박무택 씨의 시신을 1년 만에 찾아 안장해 주었습니다. 히말라야에는 이렇게 조난당해 꽁꽁 얼어 죽은 시신들이 수없이 방치되어 있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최고봉을 정복하기 위해 열심히 오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얼음 속에 묻혀 죽거나, 손발이 동상으로 잘리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왜 산에 오르는 것일까요? 그 꼭대기에 올라가면 무엇이 있을까 참 궁금합니다.

오늘도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산봉우리를 향해 열심히 올라갑니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높은 최고봉을 정복하기 위해 오늘도 목숨을 걸고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많은 사람들은 꼭대기에 올라보지도 못하고 조난당해 죽고, 어떤 사람은 중간에 포기하고 내려오는데 소수의 사람들은 끝까지 목숨 걸고 올라가 결국 그 최고봉을 정복합니다. 그러면 그 인생의 최고봉, 그 꼭대기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그들은 과연 무엇을 얻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올라간 것일까요? 누구의 말처럼 '산이 거기 있으니까' 올라간 것일까요? 우리도 집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점을 향해 열심히 올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올라가기 전에 반드시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왜 올라가는가? 나는 도대체 무엇을 이루고 얻기 위해 이렇게 집념의 삶을 사는가? 혹시 헛된 인생의 목표를 향해 올라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집념을 가지고 죽어라고 올라가보니 '여기가 아닌가봐'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집념의 인생을 살아가지만 정작 헛된 목표를 향해 집념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집념의 신앙인 야곱, 그 인생의 전반기와 후반기

성경에도 이런 대단한 집념의 사나이가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 야곱입니다. 성경에 나온 수많은 인물 중에서 야곱만큼 집념이 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장자권을 차지하기 위해 형의 발뒤꿈치를 움켜잡습니다. 팥죽을 쑤어 형의 장자권과 바꾸자고 거래를 하더니 결국 어머니 리브가와 공모해 늙은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이 받을 축복을 가로챕니다. 형을 피해 도망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도 그는 아리따운 여인 라헬을 얻기 위해 기를 쓰다가 삼촌에게 속아 라헬이 아닌 언니 레아와 결혼하게 되지만 이 집념의 사나이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기필코 라헬을 얻기 위해 또다시 7년을 하루같이 일해서 결국 결혼에 성공합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실컷 일만 시켜먹고 대가를 주지 않는 삼촌 밑에서 야곱은 꾀를 내어 가축을 많이 얻고, 삼촌 겸 장인인 라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야반도주(야곱의 주특기) 하여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여기까지가 야곱 인생의 전반기입니다. 야곱 하면 집념의 사나이인데 그의 인생의 절반은 무엇을 위해 집념을 불태웠습니까? 장자권과 아내와 재산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위해 집념을 불태운 것입니다. 인생의 최고봉을 향해 죽어라고 올라가서 결국 원하는 대로 그 최고봉을 다 정복한 것입니다. 장자권의 축복도 얻어냈고, 그토록 연모하던 라헬도 아내로 얻었을 뿐 아니라 네 명의 아내를 얻었습니다. 재산도 남부럽지 않게 얻었습니다. 결국 자신이 이루고자 한 것을 다 이룬 셈입니다. 그런데 다 얻은 줄 알았는데, 그래서 이제는 조금도 남부럽지 않은 삶을 누리며 살 줄 알았는데 이 모든 것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형에게 쫓겨 떠난 고향땅에 이제 가족도 얻고 재산도 얻어 금의환향하려 했는데 귀향길에 들은 소식은 형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고 사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야곱은 가족들을 먼저 보내고 자신만 남아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하게 됩니다. 이 씨름을 통해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져도 절대 하나님을 놓지 않음으로 결국 이스라엘이라 하는 축복의 이름을 얻게 됩니다. 바로 이 얍복 강가 씨름을 통해 야곱의 인생은 완전히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전에는 야곱이었던 사람이 이제는 이스라엘이 됩니다. 남의 발목이나 잡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께 축복의 이름(이스라엘)을 얻고 모든 사람의 복의 근원이 됩니다. 믿음의 조상이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됩니다. 발목 잡는 사람이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전에는 세상의 것들, 장자권이니 아내니 재산이니 하는 것을 얻기 위해 집념을 불태우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해 집념을 불태우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전반기에는 세상의 것들을 얻기 위해 산봉우리를 오르던 집념의 사나이가 인생의 후반기에는 하나님의 영적인 복을 얻기 위해 축복의 산봉우리를 오르는 집념의 신앙인으로 변모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믿음의 조상 야곱을 보면서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어떤 산봉우리를 정복하려고 올라가는가? 나는 무엇을 이루기 위해 집념의 불태우고 있는가?"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집념이 있습니다. 세속적인 집념과 거룩한 집념입니다. 세상에는 또한 두 가지 종류의 욕심이 있습니다. 세속적인 욕심과 거룩한 욕심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얻기 위해 오늘도 그토록 목숨 걸고 산꼭대기를 향해 올라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죽도록 힘을 다해 올라보았더니, 남들을 짓밟아가면서 겨우 최고봉에 올라보니 그것은 하루아침이면 스러지고 말 헛된 목표였다면 얼마나 후회스러운 인생이 되겠습니까?

그래도 야곱은 인생의 절반은 거룩한 욕심을 가지고 거룩한 집념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자신이 그토록 집요하게 추구하던 것들이 얼마나 헛된 줄 깨닫고 하나님과 씨름하여 영원한 복을 얻어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세상의 헛된 욕심이나 목표에 생을 허비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이름을 사모하는 적극적인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발목을 잡은 아이

오늘부터 6주에 걸쳐 집념의 신앙인, 적극적인 신앙의 대표인 야곱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오늘 그 첫째 시간으로 야곱의 탄생과 팥죽 사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본문 19~21절을 읽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와 결혼을 합니다. 요즘도 나이 사십에 장가를 가면 이만저만 노총각이 아닌데 당시는 얼마나 늦은 결혼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늦게 결혼한 아내 리브가가 잉태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나한테는 자식 복이 없나보다" 하고 포기하지 말고 필요하면 간구하십시오. 그러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적극적인 신앙의 특징입니다. 야곱도 아마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의 기도로 태어난 자녀이기에 부모의 적극적인 신앙을 본받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26절에 보면 이삭의 나이 60에서야 자녀를 낳습니다. 결혼하고 20년 동안이나 자녀가 없었으니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내의 몸종인 하갈을 취해 이스마엘을 낳은 것처럼 얼마든지 인간적인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삭은 그렇게 하지 않고 끝까지 기다립니다. 아니, 그냥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내를 위해 기도합니다(22절).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아내의 허물을 책망하거나 여종의 침실에 기웃거리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아내를 위해 기다리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가정은 남편이 아내를 위해, 아내는 남편을 위해 서로 비난하기를 그치고, 서로 허물을 덮어주고, 기다려주고, 서로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가정입니다.

그런데 임신한 아내 리브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22~23절을 보면 리브가의 뱃속에 쌍둥이가 들어섰는데 아이들이 태중에서 서로 싸웠습니다. 리브가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벌써부터 아이들이 싸움을 하니 어찌할까요?"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애들이 싸우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태어날 쌍둥이가 각각 두 국민, 즉 두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시면서 "이 족속(야곱의 족속 이스라엘)이 저 족속(에서의 족속 에돔)보다 강하겠고 큰 자(장자 에서)는 어린 자(차자 야곱)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나중에 이 예언대로 동생 야곱의 민족 이스라엘은 축복의 민족이 되고, 형 에서의 민족은 저주 받아 이스라엘을 섬기는 민족이 됩니다.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두 아이뿐 아니라 그들을 조상으로 한 두 민족의 운명이 정해진 것입니다.

계속해서 24~26절을 보면 '에서'라는 이름과 '야곱'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나옵니다. 장자 에서는 피부가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았다고 합니다. '갖옷'이란 털옷을 뜻하는데 에서가 태어날 때부터 온몸이 털로 덮였던 것입니다. 털이 많은 터프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털이 많다'는 뜻을 가진 '에서'가 됩니다. 한국식으로 하면 아버지가 '이삭' 즉 이 씨니까 '이털보'가 됩니다.

또한 동생은 태어날 때 신기하게도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옵니다. 그래서 이름을 '발뒤꿈치, 발뒤꿈치를 잡는다'는 뜻을 가진 '야곱'이라고 붙입니다. 이 이름은 나쁜 의미로 '사기 치는 자'라는 뜻도 되므로 그의 타고난 성격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장자권에 목매달고 그것을 얻으려 발버둥치는 모습인 것입니다. 사기를 치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말입니다. 한국식으로 하면 '이집요' 혹은 '이사기'쯤 됩니다. 그런데 이 두 아이가 장성해서 무엇이 됩니까?

27절부터 보면 이 두 아들의 성품과 하는 일이 나옵니다. 에서는 그 외모와 터프한 성격답게 들에 나가 익숙하게 짐승을 잡는 사냥꾼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합니다. 여기서 '종요하다'는 조용하다, 차분한 성격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성격대로 장막에 거합니다. 집안에만 있으면서 어머니 품안에서 바느질이라도 했을까요? 야곱은 가정적인 사람으로 집안에 머물기를 좋아했으며 아마도 부친의 뒤를 이어 양치는 일을 한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렇게 제 타고난 성격대로 삽니다. 또한 신앙생활도 성격 따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보면 차분한 성격에 계산도 빠른 야곱에 비해 형 에서는 성격이 호방하나 조급했기에 팥죽 사건도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이삭이 에서를 편애한 이유가 나옵니다. 이삭은 물론 에서가 장자이기 때문에 무조건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의 용감하고 활발한 성격을 좋아했을 터이고 특히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했기 때문인데 이는 순전히 음식이라는 육적인 안목으로 인해 아들을 편애한 것입니다. 이러한 아버지 이삭의 육적인 안목은 아들 에서에게 부전자전 그대로 나타납니다. 반면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합니다. 형보다 약하고 섬세하며 상대적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덜 받은 둘째 아들이 더 안쓰러웠겠지요.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두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주신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동생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이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고전 1:27)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장자권

이제 29절부터 읽어보면 드디어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함께 읽습니다.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형 에서가 들에서 사냥을 마친 후 지치고 배고픈 모습으로 돌아오는데 마침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34절에 보면 '팥죽'입니다. 이 죽은 팔레스틴 지방에서 나오는 적갈색의 렌즈 콩을 가지고 끓인 진한 수프입니다. 그러니 '팥죽'이라기보다 '콩죽'이 맞겠지요. 야곱이 이 팥죽(콩죽)을 끓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기가 먹으려고 끓였을 수도 있고 형 에서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처음부터 의도를 가지고 끓였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배가 고파 쓰러질 지경인 에서는 야곱에게 '그 붉은 것(팥죽)을 나로 먹게 하라'(원어에는 '그 붉고 붉은 것'인데 에서의 갈망을 보여줌)고 하는데 여기서 에서의 별명인 에돔이 나옵니다. '에돔'이란 '붉다'는 뜻인데 에서의 피부가 붉기도 하지만 이 별명은 바로 이 팥죽 사건에서 유래한 것이고 나중에는 그의 후손인 에돔 민족 이름이 됩니다.

그러자 야곱은 기다렸다는 듯이 형의 장자명분을 팔라고 말합니다(31절). 형의 장자명분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꾸자는 참으로 싸가지 없는(?) 거래를 시도한 것이지요. 그런데도 형 에서는 그 거래에 응해 장자의 명분을 팝니다. 우리는 이러한 에서의 행동에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피곤할 때, 힘들 때, 지칠 때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우면 판단력, 이성이 흐려지는데 사단이 이런 때를 이용해 우리를 유혹합니다. 힘들수록, 어려울수록, 부족할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신앙적인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 잘 믿고 신앙생활 잘 하다가도 어려움이 닥치고 실패하면 실망해서 신앙을 떠나는 사람이 있는데 아닙니다. 오히려 더 주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둘째, 육신의 안목을 따라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의 모습입니다. 에서는 외모로나 성격으로나 인간적으로는 야곱보다 매력적인 사람이지만 그의 결정적인 문제는 육신의 안목을 따르는 자라는 데 있습니다. 그는 먹음직스러운 붉은 팥죽을 먹으려는 욕심에 마음이 급해져서 결국 "굶어죽게 생겼는데 그까짓 장자 명분이 뭐가 대수냐?"며 팥죽 한 그릇과 바꿉니다(32절). 게다가 34절에 보면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라고 나와 있는데 이를 직역하면 '그리고(and) 그가 먹었다. 그리고(and) 그가 마셨다. 그리고(and) 그가 일어났다. 그리고(and) 그가 갔다'입니다. 이렇게 and, and로 이어지는 것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생각도 하지 않고 육신의 소욕에 따라 일을 해치우고 마는 에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눈앞의 욕심만 채우기에 급급한 육적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에서가 26:34~35에서 이방인 헷 족속의 딸들을 아내로 취해 부모의 마음을 근심하게 한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그 사람이 육신의 안목을 따르는 사람인가 영적인 안목을 따르는 사람인가는 그 사람의 말과 행동, 결혼 취직 등 일상생활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셋째, 성경은 결정적으로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다'고 평가합니다(34절). 에서의 가장 큰 실수는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겨 팥죽 한 그릇과 바꾼 것입니다. 당시 장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장이 되어 가문을 대표하는 사람이며 다른 형제들보다 두 몫의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습니다만(신 21:15~17) 이보다 더 중요한 특권은 하나님이 그 가문에 주시는 영적인 축복의 후계자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에서는 육신적인 장자의 특권을 무시한 것도 문제지만 영적인 장자의 특권을 무시한 것이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이 모두가 그의 육신적인 안목 때문입니다. 결국 이 팥죽 사건은 에서와 야곱 자신만 아니라 그 후손 모두의 미래를 크게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장자권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의 장자권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적 특권을 주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이 권세는 이 특권은 세상 그 어떤 권세나 특권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는 영적인 세계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지 못한 채 오늘도 육신의 안목이라는 산꼭대기를 향해 의미 없이 기를 쓰고 올라가는 에서 같은 사람들, 인생 전반기의 야곱 같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 모두 이 영적인 권세, 영적인 장자권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인생 후반기의 야곱처럼 세상 무엇보다 이 영적인 특권을 소중히 여겨 하나님의 특별한 복을 얻게 되기 바랍니다.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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