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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자유(2) (갈 5:1, 요 8:32, 사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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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의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사야 61:1-3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누가복음 4:16-21. 

어제 새벽예배 설교 때 여러분에게 물었던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여러분을 만나시면 맨 처음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오늘, 네 죄 사함을 받았다.”

사탄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면서, “네 죄를 네가 알렷다!” 엄포를 놓습니다. 그는 우리 죄에 대한 형벌이 아직 ‘유효’함을 주장합니다. 그는 죄를 사슬로 삼아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구속하려고 피 흘렸다!” 하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사해졌습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유인(自由人)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중의 하나인,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여기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무데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입니다. 자유인은 아울러, 하나님과 사람을 정성껏 섬기는 ‘종’입니다.

아울러,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자유 선포’는 자유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유 한 사람을 자유롭게 이끌어 내는, 말하자면 “해방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해방자가 되어야 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의 사슬’에서 풀어 살리셨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로써 우리의 죄를 씻어, 원수 마귀가 우리와 더 이상 아무런 상관도 할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써 원수 마귀의 죽음의 세력을 완전히 무너뜨리셨습니다. 즉, 마귀가 도구로 삼는 ‘죄’를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 하셔서 마귀의 손발을 끊으셨고,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마귀를 영원히 파괴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구원”하셔서 “자유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아울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스스로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해방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로써 자기를 부인하고, 원수 마귀의 세력을 깨뜨리는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면서 주신 마가복음 16:17-18입니다. 다섯 가지 표적이 따릅니다.

1. 예수님의 이름으로 원수 마귀의 세력을 무너뜨리게 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2. 새 방언을 말합니다. 자유인으로서 하는 말이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인도함 받은 자의 말입니다.
3. 뱀을 집습니다. 마귀의 세력을 무너뜨립니다.
4.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습니다. 원수 마귀의 공격을 차단합니다.
5.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낫습니다. 병마의 세력을 무찌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 안에서 자유인이 된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자유를 즐기는’ 피동적인 삶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이 다섯 가지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부자유한 사람을 자유케 하는 해방자의 삶”입니다.

죄의 노예로 살던 우리를 이처럼 담대하고 귀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1. 자유인으로 살게 하셨을 뿐 아니라, 2. 자유를 주는 자, 즉 해방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셨습니다.
소금이며 빛입니다. 소금과 빛은 그 자체로 생존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맛을 내고 빛을 비추는 데 그들의 존재가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은 ‘섬김의 도’를 실천함으로써 그 존재 가치를 내는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 살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삶은 그 자체로 ‘악함’이요 ‘게으름’입니다.

자유를 선포함으로써 “해방자” 예수님을 따라 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바로 이 사실이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지난 주중에 버클리의 어떤 극장에서 식구들과 함께 인도 영화 “WATER”를 관람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가 출옥하는 것과 때입니다. 여러 차례 투옥과 출옥을 반복했기 때문에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간디는 19살 때인 1888년 영국으로 법학 공부하러 떠납니다. 3년 후인 1891년 인도로 돌아와 변호사로 일하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21년 동안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변호사로 지냈습니다. 1914년 인도로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독립운동과 인권운동에 헌신했습니다.

이 영화 WATER는 그 중에 과부에게 내려진 족쇄를 푸는 ‘해방운동’에 초점을 모았습니다. 간디가 구체적으로 그 일에 어떤 사역을 감당한 일은 없지만, 진정한 평화운동은 결국 모든 종류의 억압을 푸는 열쇠가 되는 법입니다.

그때 인도에는 많은 과부들이 살았습니다. 그들은 재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과부들은 사회의 속박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정결하게 살게 한다는 사회의 통념은 거짓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대부분 먹고살기 위해 1. 거리에서 구걸을 하거나, 2. 몸을 팔아야 했습니다.

이 영화의 배경은 갠지즈강(Ganges River)이 접한 마을이었습니다. 마을의 생활은 물로 시작해서 물로 끝나는데, 그래서 영화 제목을 WATER라고 한 것 같았습니다. 아름다운 강을 끼고 있는 정말 아름다운 마을이었습니다.

그 마을 한 구석에 과부들이 따로 모여 사는 구역이 있었습니다. 그 구역에 어린 여자 아이 과부가 있었습니다. 츄이아(Chuyia)는 여덟 살이었습니다. 몇 십 년은 더 나이가 든 남자와 결혼했는데, 곧 그 남자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여덟 살 나이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남편의 상을 당해서 그 어린 과부는 1. 머리를 박박 깎아야 했습니다. 2. 그리고 갠지즈강 가의 마을에서 누구와도 이야기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샤쿤툴라(Shakuntula)도 과부였습니다.

힌두교 가르침에 따르면 여자는 남자가 인생의 50%였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죽으면 여자의 인생 50%도 죽은 것입니다. 과부의 인생이란 절반이 죽은 여자가 사는 것입니다. 사회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과부에게는 세 가지 옵션이 있었습니다.

1. 남편과 함께 장사되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죽은 남편에게 동생이 있다면 그와 재혼함으로써 사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죽은 남편에게 ‘아직 결혼 하지 않은 남동생’이 있어야 합니다.
      남동생 본인은 물론 식구들의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3. 일생 과부로 살면서,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격리된 삶은, 구체적으로 여러 가지 제한이 있습니다. 접촉 불가능한 사람(the untouchable)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거주지: 과부촌에 살아야 합니다.
      걸음걸이: 뛸 수가 없습니다.
      음식물: 단 것, 매운 것, 튀긴 음식 등을 먹을 수 없습니다.
      옷: 색깔 있는 옷을 입지 못합니다. 하얀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그 마을에 20대 중반의 과부 칼야니(Kalyani)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아홉 살 때 결혼했으나, 남편 얼굴도 못보고 과부가 되었습니다.

여름방학이 되어,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을 막 치른 젊은이 브라민 나라얀(Brahmin Narayan)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마을 유지의 아들이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의 사상을 마음에 품고 인도를 위해 큰 일군이 되리라고 마음먹었습니다. 그가 20대 중반의 과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젊은 과부는 마을 앞을 흐르는 강물에 빠져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는, 열차를 타고 가던 간디가 마을 역전 광장에서 잠간 연설을 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가득 광장을 메웠습니다. 여덟 살짜리 딸아이를 품에 안고 중년과부는 역전으로 달려갑니다.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가능한 한 가까이 앉아서, 간디의 말을 경청했습니다. 간디는 말했습니다.

      나는 신이 진리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깨달은 것은, 진리가 신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간디의 이 깨달음은 ‘모든 종교를 통합하여 하나의 진리로 보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점을 접어 두고 생각하면, 당시 인도의 상황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메시지였습니다.

간디의 그 짧은 연설은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사람들에 의해 부자유하게 된 세상에서, 진리가 신이라는 선언은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간디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뿐 아니라 인도 사회 내부에 있는 모든 억압에서도 해방되어야 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간디는 열차에 올랐고, 열차는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중년 과부는 어린 딸을 품에 안고 열차와 함께 달렸습니다. “이 아이는 간디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이 아이는 벌써 과부입니다. 누가 우리 좀 도와주세요!” 달리는 열차와 함께 달리는 이 중년 과부와 그 품의 딸. 긴장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그 마을을 떠나기 위해 열차에 올랐던 변호사 지망생 젊은이가 열차 난간에서 그의 어린 딸을 받아들었습니다. 열차는 시야에서 사라지면서, 중년과부의 옆 모습이 정지화면으로 오래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올라온 자막은, 2001년 현재 인도에 사는 과부들의 모습을 스케치 했습니다. 아직도 인도에는 3천만이 넘는 많은 과부들이 불행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간디는 힌두교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많이 읽었습니다. 특히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비록 힌두교에서 빠져나오지는 못했지만, 그는 예수님의 사랑 정신을 그의 삶에서 실천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가 한 말, 즉 ‘신이 진리인 줄 알았다.’는 것은 힌두교의 신이 모든 진리 자체인 줄 알았다는 말입니다. 여기는 신을 빙자해서 사회를 왜곡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부자유하게 얽어매는 사회제도, 전통, 지배 엘리트 등을 지적한 것입니다.

진리가 신이라는 깨달음은,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입니다. 자유케 하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 그것이 신의 속성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기름을 부으신 것입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기름을 붓는 것은 왕, 제사장, 그리고 예언자의 직무를 감당하게 할 때 행하는 예식입니다. 메시야는 이 세 가지의 직무를 감당하도록 부르심 받은 자입니다.

그 사역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열 가지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하나님의 영이 내리신 것은 기름 부음 받은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당신의 종으로 임명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나설 수 없습니다.

1.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가난한 자는 언제나 아름답지 못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자격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누구도 잔치자리 같은 즐거운 데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누가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2.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마음이 상한 자는 모든 일을 삐뚤게 봅니다. 좋은 것도 좋지 않게 봅니다. 친절한 사람에게는 ‘숨기고 있는 것이 있어서 이중적인 삶이라!’고 비판합니다. 자유롭지 않은 사람입니다. 스스로 속박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3.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사람입니다.

4.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사탄 마귀의 속박에 있는 사람입니다. 죄를 사해주시는 것 말고 달리 해방의 길이 없습니다.
     
5.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해=희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빚과 고통을 탕감하시고 고쳐주시는 해입니다.

6.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슬픔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슬픔의 세력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7.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화관은 기쁨으로 머리에 쓰는 것입니다. 재를 뒤집어 쓰는 행위는 ‘절망’에 대한 반응입니다.

8.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9.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10. 그들의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사야 61:1-3


이미 말씀 드린 대로, 다른 모든 구약성경의 예언과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예언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기에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성경 읽는 자리에 서시자, 회당 사람들이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드렸습니다. 주님께서 펼친 성경은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61:1-3절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셨습니다.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사역은 바로 이런 일을 위함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열 가지는 모두 예수님의 사역에서 이뤄졌습니다. 죄를 씻어주시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사탄 마귀는 죄를 지목합니다. 그리고 죄로 우리를 꽁꽁 묶어서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마귀를 이기지 못하면 우리는 죽음을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유하신 분이셨듯이, 우리도 그분께서 ‘죄를 사해 주심으로써’ 자유인(自由人)이 되었습니다.

또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면서 부자유 한 사람들을 도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앞서 이사야 61:1-3에 소개된 열 가지 사명입니다.

이 세상에는 부자유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심령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전도/선교
정서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      위로
육체      병자, 장애자                치유
경제      가난한 사람들, 빚 진 사람들      나눔
정치      불법체류자                개혁
문화      문맹, 배움이 적은 사람들      교육

영적 분별력과 기도의 능력을 입은 성도는 영적 자유를 위해 부르심 받았습니다.
대화와 상담에 특별한 은사가 있다면 정서적 해방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의사와 간호사가 있다면, 육체적 치유를 위해 사역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경제활동 하는 사람이면, 주로 경제적 자유를 위해 부르심 받은 줄로 여기셔야 합니다.
정치적 힘을 가진 사람은 정치적 자유를 위해 부르심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학문 활동하는 전문가라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무지로부터의 자유 사역을 위해 부르셨습니다.

고린도후서 6:10입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무엇을 가졌다고 부자가 아닙니다. 남을 살리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근심하는 자 같지만 항상 기뻐합니다. 남을 기쁘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남을 부요하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기업활동도, 직원들과 소비자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기 위한 것입니다.
          개념이 다르지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습니다. 나누어 주니까요. 이런 사람이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한마디로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아첨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는 일입니다.
      할 수 없어 하는 일이 아니라 기쁨으로 하는 봉사하는 일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자기만 생각하지 말고 남을 배려해야 합니다.
      당장의 이익에 사로잡히지 말고 내일을 내다봅니다.

쓰레기를 적게 버리는 일도 그런 일에 속합니다. 쓰레기를 재활용하는 일은 더 중요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사람은 무엇보다 “입 조심”을 합니다.
시편에 나오는 ‘원수’들은 대부분 입술로 범죄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도 입술의 열매가 좋으면 그는 좋은 사람입니다.
무슨 큰 힘이 있어야 남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씀새가 고와야 합니다. 언어에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입 조심은 “침묵”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침묵이 말 실수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문제는 “대화”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대화입니다. 대화 속에 “웃음”이 회복됩니다. 식물은 공기가 통해야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말이 통해야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금문교회 성도들에게, 가장 절실한 몇 가지 중의 하나는 “대화”입니다. 특히 남편과 아내 사이의 대화입니다.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끌지 못하는 남편은 아내를 “생과부”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가정에서 아내가 하는 모든 수고는 “강요된 수고”입니다.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강요된 수고는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 없습니다.

오늘 오후 세시부터 여섯시까지 열리는 “남편의 길” 세미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이 통하는 가정, 따뜻한 대화가 있는 가정을 위해 먼저 변해야 할 사람은 남편입니다. 바로 이 주제를 놓고 오늘 세미나가 열립니다. 두 명의 부목사님들이 나를 도와 모든 진행을 이끌어갈 것입니다. 기대와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살면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아, 저런 사람은 이 세상에 꼭 필요하구나!” 그렇게 느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빛’이며 ‘소금’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먼저는 가정에서, 그리고 여러분의 삶의 일터에서. 우리 안에 들어와 함께 대화하며 음식을 나누며 살아가시기 원하셔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신 우리 주님. 사랑하는 우리 주님의 축복을 빌어 드립니다. 아멘.

기도
사랑하는 주님. 주님께서 저희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을 따라 살기를 원합니다. 주여,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옵소서. 참된 대화가 열린 가정으로 축복하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은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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