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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준비된 기적 (마 14: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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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제자들은 세례요한을 장사하고 예수님에게 알렸습니다. 세례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으로 예수님은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반대편으로 가셨습니다. 그곳 빈들에서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갖으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도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만큼 세례요한의 죽음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만히 두질 않았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 나섰습니다. 사람들은 갈릴리 호숫가를 돌아서 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마을을 거쳐 가게 되었습니다. 그 바람에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큰 무리가 되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남북으로 20 Km, 동서로 12 Km나 되는 커다란 호수입니다. 호수 건너편으로 가려면 돌아가야 하니까 적어도 20 Km는 넘는 거리입니다. 하프 마라톤 코스 정도가 됩니다. 선수가 아닌 보통 사람이 하프 마라톤을 달리면 3시간 이상 걸립니다. 끝까지 뛰기도 어렵습니다.

특히 마가복음에서는 사람들이 달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보다 먼저 도착했다고 했습니다.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막 6:33>

배를 타고 건너간 예수님보다 앞설 정도로 뛰었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호숫가는 부드러운 모래흙이 아닙니다. 대부분 험한 자갈들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 길은 걷기도 힘들 뿐 아니라 뛰기엔 더욱 힘듭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발은 운동화가 아닙니다. 샌들입니다. 그런 신발로 자갈길을 뛰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발을 벗어 들고 맨발로 뛴 사람들이 많았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일 만 명이 넘습니다. 남자만 오천 명이라고 했거든요. 그러니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하면 일 만 명이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 호숫가를 달리는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이 뛰면서 자갈길을 밟는 소리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은 숨이 턱에 차오르도록 몇 시간 동안 험한 길을 달렸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병자들도 많았습니다. 걷지 못하는 환자도 많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병자를 업거나 들것에 들고 뛰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걷지 않고 왜 뛰었을까요? 그것은 행여나 예수님을 놓치게 될까 하는 조바심 때문이었습니다. 한 번이라도 더 주님을 뵙기를 바라는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배를 타고 건너는 주님보다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드디어 예수님과 만났습니다. 조용히 쉬며 기도하기를 원하셨던 예수님 입장으로 보면 황당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큰 무리의 열정을 보면서 감동하셨습니다. 오직 은혜를 사모하는 무리의 열망을 보셨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은혜를 받기 위해서 이정도 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 받고 말씀 듣고 빵 한 조각 얻어먹기 위해서, 3 시간 동안 자갈길을 뛸 수 있습니까? 숨이 턱에 차도록 지치고 아픈 다리를 끌고 뛰라면 뛰겠습니까?

예수님이 동네에 지나실 때를 기다려도 되지 않습니까? 언젠가는 예수님이 마을을 지나가시겠지요. 오늘만 날이 아니잖습니까?

요즘 사람들은 잔머리를 굴리며 요령을 피웁니다. 은혜를 받는데 그런 절실함이 없습니다. 예수님 아니어도 먹고 살만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에 가마니를 깔고 천막에서 예배를 드리던 시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청년 때 함점용목사님이 송내교회를 그렇게 개척하셨습니다. 산에 비닐을 치고 가마니를 깔고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불법구조물이라고 공무원들이 몇 번이나 뜯었는지 모릅니다. 추운 겨울에 흙바닥에 풍금을 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요즘 그렇게 개척을 하면 아무도 찾지 않을 것입니다.

전에는 천막치고 여름 수련회를 했습니다. 돌 위에 가마솥을 걸고 밥을 지어 먹었습니다. 요즘 그렇게 수련회를 한다면 아무도 오지 않을 겁니다. 최신 시설 수양관을 빌려서 여름수련회를 하는데도 습기 차고 모기 문다고 불평을 하지 않습니까?

오늘 성경에는 예수님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를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물리치지 못하셨다는 표현이 더 맞습니다.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있는 사람들이, 호숫가에 배를 대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을 테니까요. 예수님은 호숫가를 가득 메운 일만 명의 눈동자와 맞닥뜨렸습니다. 은혜를 갈구하는 열망어린 눈동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도저히 그들을 물리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중에 있는 병자들을 일일이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녁이 된 것입니다.

날이 저물자 예수님의 제자들이 걱정했습니다. 빈들에서 어둠이 닥치면 곤란합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질서가 무너지기 십상입니다.

올봄에 롯데월드에서 한 젊은이가 놀이기구를 타다가 추락해 죽었습니다. 롯데월드 측에서 이 사망 사고를 사과하는 뜻으로 6 일간 무료입장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첫날 한꺼번에 수만 명의 인파가 몰리면서 35 명이 다치는 불상사가 발생했습니다. 몰려드는 인파를 예측하지 못하고 안전관리에 소홀했던 탓입니다.

또 저녁 먹는 것도 문제입니다. 갑자기 모인 인파기 때문에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한 지혜는 더 날이 어둡기 전에 군중을 해산시키는 것입니다. 각자 마을에 들어가서 먹을 것을 사먹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이들을 먹일 의무는 없습니다. 또 돈이 있어도 갑자기 이 많은 사람 음식을 마련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해산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 주자는 것입니다. 제자들 보고 너희가 해결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제자 테스트 같아 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이야기가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종합해서 읽으면 마태복음 이야기보다 더 풍성한 자료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계산이 빠른 빌립이 음식 값을 계산해 냈습니다. 조금씩만 나눠 줘도 이백 데나리온 어치 떡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백 데나리온이면 이천만 원 정도 됩니다. 문제는 돈이 있어도 갑자기 떡을 사올 수 있느냐 입니다. 그러니 이런 계산은 현실성이 없습니다. 쓸모없는 의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의 일에 이런 세상적인 계산은 쓸모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계산은 믿음의 방법과 동떨어진 경우가 많습니다.

제자 안드레가 찾아낸 방법이 정확했습니다. 안드레는 한 아이가 가지고 있는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에 주목했습니다. 그 양은 한 아이의 한 끼 식사 분량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을 예수님이 쓰신다면 뭔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무에게 유를 창조하십니다. 주님은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도 오천 명을 떡으로 먹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무한한 능력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적을 그런 방법으로 베풀지 않으십니다. 아주 작더라도 믿음의 씨앗을 쓰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겨자씨와 같이 작고 미약해도 그것으로부터 출발하기를 더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하나도 내놓지 않고 크고 풍성한 은혜를 바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너무 뻔뻔한 것입니다. 먼저 작은 것이지만 정성으로 드리고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믿음으로 드린 그것을 받으시고 크고 놀라운 은혜를 베풀기를 기뻐하십니다.

아이는 기꺼이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를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것은 아이가 자기 저녁을 포기하고 예수님 드시라고 바친 것입니다. 이보다 아름다운 헌물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은 혼자 배불리 드실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이 헌물을 받아 축사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 주셨습니다.

그러자 이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는 놀랍게도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누면 나누는 대로 필요한 분량만큼 불어났습니다. 제자들은 이 물고기와 떡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여기서 나누는 과정도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사람들을 백 명씩 혹은 오십 명씩 그룹을 지어 앉게 했습니다.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막6:39-40>

만약 제자들이 먹을 것을 그냥 나눠줬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사람들은 서로 먼저 차지하려고 밀고 당기며 달려들었을 것입니다. 이내 지옥으로 변했을 것입니다.

자 예수님이 언제 사람들을 자리에 앉혔을까요? 그것은 떡을 들어 축사하기 이전입니다. 요한복음 6 장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요 6:10-11>

이렇게 예수님은 무질서하게 먹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누는 과정을 통해서 무리를 공동체로 만드셨습니다. 먹는 것을 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을 만치 은혜는 충분했습니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항상 질서가 있습니다.

1987 년 6 월에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그 때는 전두환 씨의 호헌선언에 대항하는 민주화 집회가 한창이었습니다. 대학원을 다니던 저도 명동과 광화문에서 호헌철폐 구호를 외치며 다녔습니다. 그 때는 넥타이 부대라고 불리는 시민들도 함께 참여해서 구호를 외쳤습니다. 거리에서 벌이는 시위는 전투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언제 어디서 최루탄이 날아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시민들은 전문 투사들이 아니기 때문에 시위에 참여했지만 최루탄에는 아주 약했습니다. 한창 구호를 외칠 때 최루탄이 발 앞에서 터지기 시작하면 일제히 광화문 지하도로 피신했습니다. 저도 약간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워낙 최루탄이 매우니까 일단 피하고 봐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꺼번에 워낙 많은 사람들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니까 아주 위험했습니다. 그러나 계단에서 다치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아주 질서 있게 계단을 함께 뛰는 방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피신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질서, 질서’를 외치면서 박자를 맞춰 뛰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호헌철폐’하고 외치던 구호가 도망칠 때는 ‘질서, 질서’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게 직접 해보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정의를 외치는 시위대는 무질서한 것 같아도 공동체입니다. 거리에서 처음 본 사람들이지만 이내 동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공동체야 오죽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벼락같이 임해도 믿음의 공동체는 질서가 있습니다. 나눔과 사랑이 있습니다. 감사의 고백과 기쁨이 넘칩니다.

푸른 잔디 위에서 기적을 나누는 오병이어의 은혜를 보십시오. 주님은 기적을 통해서 축제 한마당을 벌이셨습니다.

제자들은 다시 먹고 남은 음식을 바구니에 거뒀습니다. 모두 열 두 바구니에 차게 모았습니다. 기적의 은혜는 차고 넘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남은 음식을 모았을까요? 그 음식은 어디에 쓰였을까요? 그것은 다음 기적을 준비하는 씨앗입니다. 현재의 기적은 미래의 기적을 저축합니다. 한 번 기적을 맛본 사람은 두 번째, 세 번째 기적을 또 다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기적은 준비된 자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정리해 봅시다.

첫째, 오늘 기적의 주인공들은 20 Km를 맨발로 달렸습니다.

오직 은혜를 갈망하는 열정 하나로 뛰었습니다. 그들은 잔머리를 굴리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만 보고 뛰었습니다. 예수님을 태우고 호수 가운데로 나간 배가 어디에 배를 댈지 아무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호수 가운데에 있는 배의 행선을 보면서 뛰고 또 뛰었습니다. 온 몸이 땀으로 젖고 숨은 턱에 차올라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호숫가를 달리는 광경 자체가 기적입니다. 이들이 달리며 만들어낸 소리는 이미 주님을 감동시켰습니다.

달리는 자들에게 짐은 거추장스럽습니다. 그들은 신발도 벗어 던지고 뛰었습니다. 그러니 당장 끼니를 넘길 음식을 준비하지 못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은 집에 가려면 몇 시간 뛰어 왔던 길을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도 그런 것들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당장 주님을 만나 은혜 받을 일만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합니다. 기적을 맛보려면 주님을 향한 타는 열망이 가득해야 합니다.


둘째, 한 어린 아이가 기적의 씨앗을 주님께 바쳤습니다.

어린 아이는 자기 먹을 것을 양보하기 어렵습니다. 욕심을 마음껏 부릴 나이입니다. 그럼에도 이 아이의 헌신을 통해 기적이 잉태되었습니다.

내 작은 것을 먼저 주님께 드리십시오. 겨자씨만치 작아도 정성껏 드리십시오. 주님은 그것을 씨앗으로 기적을 창조해 내십니다. 주님께 아무 것도 드리지 못한 채 은혜를 구하는 것은 염치없는 짓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는 아주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이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만드는 씨앗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셋째, 무리는 떡이 불어나기 전에 이미 질서 있게 공동체의 대형을 갖췄습니다.

기적이 시작되기 전에 기적을 맞이할 준비를 끝낸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똑 같은 마음을 품었기에 무리는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멋진교회도 공동체가 먼저 되지 아니하면 기적을 맛볼 수 없습니다. 주님의 기적은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공동체의 것입니다. 그러나 준비된 공동체라야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넷째, 남은 음식을 거뒀습니다.

한 번 기적을 체험했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주님의 능력은 준비된 자에게 다시 나타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 또 있습니다. 오늘의 기적은 내일의 기적을 부릅니다.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다음 기적은 쉽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기적은 믿음으로 일어나는 비결을 터득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기적을 체험했으면 널리 간증하십시오. 거둔 12 바구니는 기적의 증거물입니다. 그리고 다음 기적을 예고합니다. 12 광주리는 제자의 수와 같습니다. 제자마다 한 바구니씩 가득 거뒀다는 것입니다. 제자 모두 기적을 증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기적을 체험하고 기적의 증인들이 되십시다.
(홍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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