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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빛이시라 (요일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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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과 요한 1서, 2서, 3서, 그리고 요한계시록, 이 다섯 권의 성경을 합해  합해 요한문서라고 합니다.
복음서, 바울서신, 요한문서를 신약성경의 세 기둥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요한문서에는 하나님의 존재와 본성을 잘 알려주는 말이 셋 있습니다.
순서대로 말씀드리면, 먼저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그 다음은 하나님은 빛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은 중간부분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요한1서 4장 8절은 뒷부분에서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말하고, 16절 중간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 하나님은 빛, 하나님은 사랑, 오늘은 그 가운데 “하나님은 빛이시라” 이 말씀을 통해서 은혜와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5절을 다시 보는데 앞부분을 보세요.
사도 요한은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누구에게서 들었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에게 들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여러 번역이 5절을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들어서 여러분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표준새번역개정판」) 또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에게서 듣고”「현대인의 성경」)라고 번역하여 여기의 “그”가 그리스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자신이 빛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12장 46절의 말씀입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행전 4장에는 요한은 베드로와 더불어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고쳐준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놀라 모여든 사람들에게 설교하다가 잡혀서 심문을 당했는데 관리, 장로, 서기관, 대제사장들과 그의 문중 앞에서 “우리는 보고 들을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 20)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나는 빛이다’ 말씀하신 것을 우리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 요한ㅂ서에서 이렇게 적은 것입니다.

5절을 다시 보는데 이번에는 뒷부분을 보세요.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신데 어둠이 조금도 없는 빛이십니다.
어둠이 조금도 없는 빛, 이것을 두 글자로 줄여보세요.

힌트를 하나 드리면 본문 옆면에 있는 2장 8절에 답이 있습니다.
2장 8절 뒷부분,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그렇습니다. “참 빛”입니다.
참빛, 머리 빗는 빛 가운데  빗살이 아주 가늘고 촘촘한 대빗을 ‘참빗’이라고 하는데 그 참빗이 아니고 어둠이 조금도 없는 빛을 말합니다.

러시아에서 수고하고 있는 저희 교회 최성찬 선교사가 세 아들의 이름을 진광이, 영광이, 은광이로 지었는데 ‘진광(眞光)’은 참 빛을 한자로 바꾼 것입니다.

제 머리가 상당히 희어졌습니다.  사진을 보면 머리가 상당히 희어진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그런 일을 체험하시는지 모르겠는데 불빛 밑에서 거울을 보면 이 머리가 그렇게 희어 보이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 전등 불빛은 환하게 만드는 일을 해도 사물을 온전히 보여주는 데는 한계가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한계가 있는 빛이 아니십니다.
완전히 밝게 만들고, 완전히 보여주는 빛이십니다.

요한1서는 편지 성경입니다. 공동서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편지 형식을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른 편지 성경들은 거의 ‘나는 누구인데 누구에게 편지합니다.’ 이런 형식으로 시작되는데 요한1서 시작 부분을 보세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기독교 신앙의 근본 문제들에 대해 강한 어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요한1서를 기록할 때 마음이 급했던 모양입니다.
그 때 교회는 영지주의라는 이단에게 큰 시달림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 영지주의와 싸우는데 선봉대장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요한입니다.
요한은 급한 마음으로 기독교의 근본진리를 말하는데 먼저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참 빛이십니다.
이 사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빛의 자녀로서 소속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자녀들의 이름을 아들은 광남(光男), 딸은 광자(光子) 이렇게 지은 분이 있습니다.
‘빛의 아들’ ‘빛의 딸’ 이런 뜻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광남이고 광자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4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드립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빛의 아들들입니다. 낮의 아들들입니다.
여기 아들이라는 것은 ‘자녀’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빛과 어둠, 두 세력이 있습니다.
‘세상을 너무 이분법으로, 양극논리로 보는 것이 아니냐?’고 하실지 모르겠으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을 인종, 거주 지역, 국가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 동양사람, 서양사람, 유럽사람, 아프리카사람, 미국사람, 영국사람, 중국사람…, 참 복잡해집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예수 믿는 사람과 예수 믿지 않는 사람, 구원 받은 사람과 구원 받지 못한 사람, 빛에 속한 사람과 어둠에 속한 사람, 둘로 나누어집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빛에 속한 사람으로 소속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둠에 속해서는 물론 안 됩니다.
필요에 따라서 때로는 어둠에 속하고, 때로는 빛에 속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박쥐가 하는 일입니다. 
박쥐는  어두운 곳에 있다가 땅거미 때부터 활동을 시작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여기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박쥐는 몸과 머리는 쥐와 같습니다. 그런데 앞다리가 날개로 변형되었습니다.

예전에 동물들과 새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는데 동물들이 유리할 때는 박쥐는 동물들에게 가서 자기의 몸과 머리를 보이며 ‘나는 쥐입니다. 당신들 편입니다.’ 했습니다.
새들이 유리할 때는 새들에게 가서 날개를 퍼덕이며 ‘보세요, 나는 새입니다.’ 했습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하다가 들통이 났습니다. 결국 양쪽으로부터 다 쫓겨나서 낮에는 어두운데 숨어 지내고, 날이 어두워진 다음에야 밖에 나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필요에 따라 빛에 속했다가, 어둠에도 속했다가 하는 사람은 결국은 이렇게 됩니다.
우리말로 ‘박쥐구실’ 한자로 편복지역(蝙蝠之役)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리저리 붙어 지조가 없이하는 행동을 이렇게 말합니다.
‘박쥐족’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다 좋은 뜻을 가진 말들이 아닙니다.

여러분 찬송가 521장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1절 가사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건가
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있나니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

우리는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데 물론 빛 편을 선택해야 합니다.
빛 편에서 떠나지 말아야합니다.

1970년대에 우리나라에 독재가 심했습니다.
이 때 민주화운동에 앞장을 선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매주 목요일 저녁에 종로 5가, 정확하게는 연지동에 있는 기독교회관에서 민주화를 위한 목요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첫 번째 목요기도회가 열렸을 때 제일 먼저 부른 찬송이 바로 이 521장입니다.
그 때 민주화를 위한 모임에서는 이 찬송을 참 많이 불렀습니다.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노력은 교회가 이 나라를 위해 한 큰 기여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희 교회 원로목사님이신 김찬국(金燦國) 목사님께서 그런 일을 지도하시다가 옥고를 치루고, 오랫동안 해직교수 생활을 하고,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 찬송은 앞부분에서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건가” 묻고 있는데 크리스천은 물론 참 편에 서야합니다.
크리스천이면서 거짓 편에 서는 사람을 우리는 ‘사이비 크리스천’이라고 부릅니다.
사이비 크리스천은 비크리스천, 아예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보다 교회에 더 큰 해를 끼칩니다.
우리는 사이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라는 경건한 수도사가 있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즈볼레라는 곳의 한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후배 수도사들을 지도하고 설교와 저술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은 기독교 고전 가운데 고전입니다.
이 책을 읽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가 쓴 기도시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오 거룩하신 주 예수여 
당신의 찬란한 빛을 저의 내면에 비추소서.
심연 깊은 곳의 어두움을 몰아 내 주소서.
방황하는 뭇 생각들을 주여, 붙들어 주시고
무섭게 파고드는 사탄의 유혹들을 
오 주여, 물리쳐 주소서.

주여,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주소서. 
이 세상을 밝게 비추어 주옵소서.
당신의 빛이 임하기 전에
저는 무질서의 세계, 흑암의 세계, 혼돈의 세계에 머물 뿐이옵니다.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줄로 당신과 저를 묶어 주소서.
오직 주님 한 분 만이 당신을 사모하는 자에게
참된 기쁨을 주실 수 있는 것을 믿나이다.
당신 없이는 모든 것이 헛되고 무가치한 것을 깨닫나이다.

오, 주여! 
제게 빛을 비추소서.
진리를 밝혀 주옵소서.
우리도 이렇게 기도해야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끊임없이 빛을 보내달라고 구하면서, 빛의 자녀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힘을 달라고 구하면서 빛 편에 서서, 빛의 자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7절을 다시 보세요.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성도의 교제, 코이노니아는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참된 성도의 교제는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들끼리 가능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좋지 않은 친구들과는 저절로 멀어지는 것을 많이 체험하게 됩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기 피가 많이 부족해서 생명이 위독한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내 피를 주어 그를 살리고 싶어도 그 사람의 혈액형이 나와 같아야만 피를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통해 우리가 사죄함을 받으려면 우리가 예수님의 혈액형과 같아야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A형인지, B형인지, 저와 같은 AB형인지, O형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지금 그것을 밝혀내는 사람이 있다면 크게 각광을 받을 것입니다.
상징적으로 예수님의 혈액형은 ‘빛 형’입니다. ‘빛 형’은 제가 만든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빛의 자녀로서 우리의 피 가운데 빛의 인자가 있어야 하며,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편 36편 9절의 말씀을 보세요.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이 말씀과 같이 주의 빛 안에서 주의 빛을 보면서 걸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43편 3절의 말씀을 보세요.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빛 안에서 행하는 사람은 주님 계신 곳에 이를 수 있습니다.
빛 가운데 행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우리 얼굴에서 빛이 납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선교사가 힌두교 지역에 들어가서 열심히 선교를 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원주민이 그 선교사를 찾아왔습니다. 그 원주민은 ‘선교사님, 당신들이 사용하고 있는 얼굴을 빛나게 만드는 약을 내게도 좀 나눠주십시오.’ 했습니다.
선교사는 얼굴을 빛나게 만드는 약이라니 그것이 무엇이냐고 했습니다.
이 원주민은 ‘선교사님을 비롯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얼굴에서 빛이 납니다. 그것은 무슨 약을 먹거나 바르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나도 얼굴에서 빛이 좀 나고 싶습니다. 그러니 그 약을 내게도 좀 주십시오.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얼굴에 기쁨의 빛, 소망의 빛, 사랑의 빛이 가득해야 합니다.
그 원주민은 이것을 보고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한 것입니다.
이 예화는 여기에서 끝납니다. 그 선교사가 어떻게 했는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짐작하기를 선교사가 ‘아 그렇습니까? 이것이 바로 얼굴에서 빛이 나게 하는 약입니다.’ 하면서 무엇을 주었을 것 같습니다.
무엇을 주었을까요? 성경을 주었겠지요.
원주민은 성경을 먹고, 아니 읽고 그 역시 얼굴에서 빛이 나게 되었을 것으로 믿습니다.
성경도 약입니다. 신약과 구약, 좋은 약입니다. 만병통치약입니다.

시편 37편 5절과 6절은,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로다
이렇게 우리가 여호와의 길을 걸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빛 같이, 아주 밝은 빛 같이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오랫동안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의 그런 생활을 괴로워하면서 친구의 정원에 앉아있는데 밖에서 어린이들이 놀면서 ‘들고 읽어 봐! 들고 읽어 봐!’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침 손에 신약성경을 들고 있어서 그것을 열었더니 로마서 13장 뒷부분의 말씀이 나왔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 12~14)

어거스틴은  크게 회개하고 이 말씀에 따랐습니다.
빛 편에 속해서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 빛을 위해 싸우는 사람, 빛의 진리를 전하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주님이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우리는 찬양을 하면서 그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의 길이 되십니다.
찬송가 502장이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나의 맘속에 차고도 넘쳐
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러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

이 찬송은 2절에서

캄캄한 밤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의 길 되시고
나에게 밝은 빛이 되시니 길 잃어버릴 염려 없네
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길은 어둡다고 보이지 않는 길이 아닙니다. 어두울수록 더 잘 보이는 길입니다.
여러분, 그 길, 빛의 길을 걸으시기 바랍니다.
빛 가운데 행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27편 1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빛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두려워하지 않고 빛 가운데 행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우리는 그 빛을 받아 비추어야합니다.
달은 자기가 빛을 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해의 빛을 받아 그 빛을 우리에게 비추어줍니다.
우리는 해는 되지 못하더라도 달은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은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라고 우리들을 빛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등대 길이 길이 빛나니
우리들도 등대되어 주의 사랑 비추세
우리 작은 불을 켜서 험한 바다 비추세
물에 빠져 헤매는 이 건져내어 살리세(찬송가 272장)

여러분, 작은 등대 역할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등불을 돋우어서 거친 바다를 비추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성경과 찬송가 가사를 유난히 여러 번 인용하게 됩니다.
사실은 그것이 좋은 설교입니다.

논문을 심사할 때 이차 자료보다 일차 자료를 얼마나 많이 인용했느냐 하는 것이 심사의 기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일차자료들을 많이 인용한 논문일수록 좋은 논문으로 평가 받지요.
성경은 설교의 영원한 일차자료입니다.

오늘 우리가 입례송으로 부른 찬송 259장은 우리를 “빛의 사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빛의 사자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빛의 사자들이어 어서 가서 어둠을 물리치고
주의 진리 모르는 백성에게 복음의 빛 비춰라
빛의 사자들이여 복음의 빛 비춰라
죄로 어둔 밤 밝게 비춰라 빛의 사자들이여

빛을 비추는 일입니다.
복음의 빛을 비추는 일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인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빛을 비추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15절과 16절의 말씀입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예수님은 흑암에 앉은 백성들에게 빛을 비추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스블론 땅, 납달리 땅, 요단 강 저편 해변 길, 이방의 갈릴리, 어두운 곳들은 지금, 우리 주변에도 많습니다. 
우리는 그 곳에 빛을 비추어야합니다.

바울 사도가 평생 가지고 있었던 자기 인식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이방의 빛이다’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 46절에서 48절까지,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 모인 시민들에게 한 설교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바울은 ‘나는 이방의 빛이다’ ‘주님이 나를 이방의 빛으로 삼으셨다.’ 철저하게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세계에 복음의 빛을 전하는 일에 평생 수고했습니다.
그 일에 자기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몽골에  아르바르헤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저희 교회 청년부 단기선교 팀이 3년 전 겨울에 이 아르베르헤르에서 선교활동을 한 일이 있습니다.
인구가 8만 명인데 몽골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몽골은 인구가 270만 명 안팎인데 수도인 울란바토르에 집중해서 많이 살고 있습니다.

2001년 여름 서울 송천감리교회에서 이곳에  단기선교 팀을 파송했습니다.
그 가운데 김성호라는 청년이 교회 지붕에 올라가 전기를 고치다가 감전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나이로 스물다섯, 송천교회 담임목사님의 외아들이었고  목원대 영어교육과 4학년 이었습니다.
그의 모교인 목원대학교에서 그가 세상을 떠난 자리에 돌비를 세웠습니다.
그 돌비에 새겨진 비문이 이렇습니다.

여기 목원의 아들 김성호
주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을 드리고 몽골의 별이 되었네.
드넓은 몽골 땅에 그 별빛 영원히 비치어
그리스도의 복음과 평화로 가득하기를 원하면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김성호 청년은 몽골에 복음의 빛을 전하다가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원한 별이 되어 그 별빛에 그리스도의 복음과 평화가 몽골 땅에 가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지금도 몽골 땅을 비치고 있습니다.

그 청년의 아버지, 송천교회의 목사님, 저는 한 번도 뵙지 못했는데 참 존경하고 싶은 분입니다.
자기 외아들의 생명을 잃은 그 몽골 땅에 계속해서 복음이 빛이 비춰져야 한다면서 부담임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그 분이 지금 몽골 복음화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김종진 선교사입니다.
저희 교회에도 여러 번 다녀갔습니다.
이 분이 얼마나 왕성하게 활동하는지 이상규 장로님이 저에게 ‘몽골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김종진 선교사님이 된다고 하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송천교회 담임목사님도 자주 몽골에 가셔서 선교활동을 하신다고 합니다.

빛을 받기만 하고 비추지 않는 것은 복음의 이기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망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이기주의입니다. 특히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복음의 이기주의는 교회에 큰 해악을 끼칩니다.
빛을 받기만 하고 비추지 않다가는 결국 사해처럼 됩니다.
사해는 물을 받기만 하고 내주지 않아 결국은 아무 것도 살지 못하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빛을 비추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사야서 60장 1절에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면서 마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을 제일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면서 보시기에 좋아하셨는데 제일 먼저 보시기에 좋아하신 것이 바로 빛입니다.
창세기 1장 3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을 읽어 드립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낯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어둠 가운데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빛 가운데 두셨습니다.

그 하나님께 감사하며 빛 편으로, 빛의 자녀로서 소속감을 분명히 하며, 빛 가운데 행하며, 빛을 전하기에 힘쓰는 것으로 창조의 섭리에 화답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빛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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