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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증인 (행 7:5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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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고양이 한 마리를 샀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이상하게 생겨서 이름을 “호랑이 고양이”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웃 사람이 보고, 호랑이 보다는 용이 더 신성하니 “용 고양이”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용이 승천하면 구름을 타야하니 구름 고양이”로 하자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구름은 바람보다 약하니 “바람 고양이”로 하자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바람은 강한 벽을 치면 충분히 막을 수 있으니 “벽 고양이”로 하자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뱍은 단단해도 쥐가 구멍을 뚫으면 무너지니 “쥐 고양이”로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한 노인이 웃으며 “쥐 잡는 것이 고양인데 쥐 고양이라니, 그냥 고양이에게 왜 그렇게 많은 이름을 붙여 본색을 잃게 하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착각 속에 삽니다. 마치 영원히 살 수 있는 것 같이 삽니다. 마치 세상을 다 얻을 수 있는 것 같이 삽니다.

사회학자 에릭 프롬은, 사람이 살아가는 스타일을 두 가지로 말했습니다. 하나는, 소유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항상 소유하려는 욕망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 소유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살고 사는 사람들. 그 마음껏 소유를 다 가지지도 못하지만, 그러나 자신의 마음에 만족 할 정도의 소유를 가지면 자신의 주제를 잃고, 교만하고 방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깊이 추구하며,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12:15,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다는 생각이야 말로 착각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도대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구약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의 알맹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자손손 가르치며 지키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신명기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 3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어떤 사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세상 창조 한 뒤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은 그 세상을 바꾸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사람이 그보다 좋게 만들 수 없습니다. 사람은 그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이 하나님 말씀의 결정적 말씀이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에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어요? 왜 하나님께서 당신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 그 고통의 죽음에 내어 놓으셨어요? 그것은 누구든지 예수 믿고 구원 받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을 다 하나로 말한다면 “예수 믿어라.”입니다. 바로 그 “예수 믿어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행복, 진정한 구원은 어디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스데반입니다. 성경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모두 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 주고 있지만, 이 스데반에게서 더욱 그리스도인들이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를 보게 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6장에서 보면, 그는 성경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일꾼으로 뽑혔습니다. 오늘 우리식으로 말하면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복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삶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복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냥 구제하는 일만 했다면 오래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 스데반을 누가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이게 믿음의 결과라면 누가 예수 믿겠습니까? 그런데 누가 스데반을 복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셨어요? 55절에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 눈으로 보면 불행한 사람이지만,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가장 귀중한 사람이 스데반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2:69의 예수님의 말씀,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 그런데 본문 55절, “서 계셨다.” 여기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그냥 앉아서 쉬고 계시는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이들을 눈여겨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이들을 돕기 위해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안식일 논쟁이 있을 때, 유대인들은 그날이 쉬는 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쉰다고 아무 일 안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으리라.”

또 하나,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소망은 분명한 것입니다. 빌립보서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 푯대, 그 부름의 상이란 뭐겠어요? 바로 구원의 자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3,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나님의 도우심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셨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셨을까? 하나는 스데반을 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6: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게 행하니.” 또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얼마나 좋을까? 또 하나, 스데반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로 불러 가시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답일까? 어느 쪽이 좋을까? 여러분 생각은? 어느 쪽? 당연히 살아  나는 쪽. - 손 한 번 들어볼까요?

그 기준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아니냐가 됩니다. 스데반이 살아야 한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당연히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죽어야 한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당연히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은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기도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물론 스데반은 살아 있어도 주님께 영광 돌렸을 것입니다. 그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의 죽음은 이보다 더 큰일을 해냈습니다.

첫 번째로 일반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모법을 보여 주었습니다. 즉 생명까지 내어 주면서 사랑하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교회에 힘이 되었습니다. 스데반이 죽음 이 후 교회는 전면적으로 박해를 겪었습니다. 사도행전 8:1,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3절)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이렇게 박해 당하는 교회에게 복음 때문에 죽을 수 있는 순교 정신을 보여 준 것입니다. 핍박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지키도록 모범과 힘을 준 것입니다. 세 번째로 사도들에게 새로운 각오를 주었습니다. 스데반은 평신도 지도자입니다. 구제하는데 필요한 사람입니다. 사도들은 처음부터 예수님 따라 다니며 특별하게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사람인지라 때로 약해 질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스데반의 죽음은 새로운 각오를 주었습니다. “스데반이 복음 때문에 죽었다. 그렇다면 사도라고 하는 우리야!” 네 번째로는 대적하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이란 생명도 내걸 수 있는 가치 있는 것이다.” 다섯 번째로 경건한 유대아들에게,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 긴가 민가 했습니다. 구약의 말씀을 보면 어쩌면 예수라는 분이 메시야 일 것 같은데 그렇다고 유대인이라는 것마저 포기하고 믿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됨을 포기 한다는 것은 그들 사회에서는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구약에서 예언하신 바로 그분임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스데반의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여섯 번째로 사울에게, 사울은 전에는 의기양양해서 믿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생명 건 스데반을 보고선 아마도 조금씩 생각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스데반의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 54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듣는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사울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의 죽음은 사울이라는 큰 일꾼을 세우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스데반이 죽는 그 자리에 사울이 있었다고 기록했다고 여겨집니다.

그렇게 보면 스데반의 죽음은 결코 헛된 것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살아있음 보다 더 큰일을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큰일을 했느냐 안 했느냐는 우리의 생각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큰일하거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큰일 못한 겁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찾아보아야 할 것 또 하나. 그런 죽음 직전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당당하게 전하고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었던 스데반의 배짱이 어디서 나온 것 일까?

(55절) “스데반이 성령에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21편,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우리의 구원은 세상에 있는 것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제대로, 멋진 그리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신앙생활을 못하는가? 자꾸만 세상에서 도움을 찾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볼 때 복을 받는 모습이 흐뭇하였는데, 좀 나아지니까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보는 눈이 더 커졌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볼 때 하나님이 1순위 이었는데 세상에서 얻어지는 재미가 있다 보니 하나님은 3, 4순위까지 밀려났습니다.

스데반은 땅의 것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살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것에 마음을 두었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생명조차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믿음 아니던가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관심은 세상일이고, 세상에서, 환경에서 만족을 찾고 기쁨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다 “주여”하고 부르짖는 때가 언제입니까? 세상일이 내 마음대로 안 될 때, 세상일 해결해 달라고 하는 때가 아니던가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때로 사방 문은 다 닫쳤어도 하늘 향한 문은 늘 열려 있음을 믿고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만 바라보는 자들, 그래서 자기의 생명조차 드리는 자들. 우리 주님은 결코 나 몰라라 하시지 아니 하십니다. 예수님은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만약 스데반이 살고자 해서 그 사람들과 타협했다면? 만약 스데반이 살고자 해서 아무 말도 안하거나 자신의 신앙을 굽혔다면? 그의 생명은 건졌을 것입니다. 살아나기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죽고 마는 것입니다. 영원한 구원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 위해 생명을 포기하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 그 영광의 나라, 그것이 우리의 소망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승리인줄 믿습니다.

그것을 보자 “내 영혼을 받으소서.”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드렸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구원을 확신했습니다.
그것을 보자 원수도 사랑도 가능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위해 고난당하는 자들은 하나님은 결코 침묵하시지 아니하십니다.
출애굽기 3장, 하나남께서 모세를 불러 (7절)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그래서 (10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왜 그셨습니까?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니까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곧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하나님은 움직이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생명 내놓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어찌 그냥 두시겠습니까?

사람도 자기 자식을 사랑할 줄 알거든, 하물며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인 여러분을 그냥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문제는 자꾸만 자기 생각대로 살려니까, 자꾸만 세상에서 살려고 하니까, 세상에서 만족 세상에서의 기쁨을 찾으니까 그래서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는 겁니다.
스데반은 자기 생각, 자기 만족, 자기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만족,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사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스데반을 받아 주셨고 영원한 구원을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을 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구 선수로 뛰는 사람은 생명 걸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승리합니다. 그렇게 승리하면 누구의 기쁨입니까? 감독? 국민? 감독도 국민도 기쁩니다. 그렇다면 본인은? 더 말할 것도 없이 기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생명 걸고 살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또한 끝내 승리한 본인의 기쁨인 것입니다. 주님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을 마치 손해 본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스데반이 살아야만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기는 그것은 세상적인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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