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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 (시 55: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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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청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말이 많고, 또 말을 길게 하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이 많고 말을 길게 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가 말이 많은 그 자체보다는 그가 듣는 사람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듣는 사람도 할 말이 많은데, 상대방이 기회를 주지 않아서 그 사람을 싫어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는 숨어 있는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잘 해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것은 잘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매일 보는 큐티집 <날마다 솟는 샘물> 뒷 표지에 나와 있는 <경청>이라는 책 제목을 보고는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 책을 샀습니다. 그 책의 서문에 보면, “누군가 당신의 말을 사랑으로 주의 깊고 정중하게 들어줄 때 어떤 기분이 듭니까?”라는 지은이의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대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소중한 존재라고 느껴집니다.”
“위안을 얻습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갈 수 있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내가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즉 누군가가 그냥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말하는 그 사람은 위로를 받고, 자신이 귀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잘 들어주는 것이 대단한 위력이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 잘 들어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특별한 선물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자,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십니까? 여러분들이 상대방의 말들을 잘 들어주어 그 상대방을 위로하고 그들을 세워주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일인데, 우리의 사정을 정말 잘 들어주는 분이 계십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2.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1) 너무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

시편 55편은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특별히 이 시는 그가 아주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한 후, 너무나 아프고 괴로운 가운데서 지은 것입니다. 다윗이 많은 아들들 가운데 특별히 사랑했던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압살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압살롬이 다윗이 병이 들어 고생을 하고 있을 때, 병 때문에 나라 일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버지를 배신하고서는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게다가 압살롬과 한패가 되어서 다윗을 축출한 사람들은 대부분 다윗의 부하들, 젊은 시절부터 다윗과 함께 전쟁터를 누볐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성경의 제갈공명’이라고 부를만한 아히도벨이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 반란으로 인하여 궁과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도피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 압살롬은 다윗이 가장 많이 사랑했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 아들이 자신을 배반하고서는 죽이겠다고 칼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전쟁터를 누비면서 생사를 같이 했던 전우들이 배신했습니다. 자신이 젊을 때부터 환호와 박수를 보내던 대다수의 국민들이 삽시간에 마음을 바꾸어서는 불효막심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압살롬을 지지하고 있었고, 다윗이 가는 곳마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여 압살롬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다윗에게 견딜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너무나 괴롭고 힘든 다윗의 마음은 55편의 첫 번째 단락인 1절부터 8절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을 몰아 낸 사람들, 그것도 아주 가까운 사람들인 그들은 다윗을 향해 악담을 하고, 중상모략을 하고, 위협하며, 윽박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번 참에 아예 다윗을 죽여버리는 것이 후환을 없애는 것’이라며, 마치 다윗을 쳐서 가루로 만들어 버릴 듯이 무자비하게 공격을 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다윗의 마음은 매우 불안하고,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근심과 걱정으로 마음의 평화를 잃고 있었습니다. 또한 사방에서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 때문에 늘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있는 다윗의 숨소리를 바로 신음 소리요, 다윗이 하는 모든 말은 탄식이었으며, 어느 누구를 향해서도 자기의 마음을 드러내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들과 생사를 같이한 전우들로부터 배신을 당한 사람이 도대체 누구를 믿고 의지하며 자신의 괴로움을 토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6, 7절에서, 만약 자신에게 새의 날개가 있다면, 아무도 살지 않는 사막으로 날아가서 거기서 혼자 지내고 싶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대적들에게 시달리는 자신보다 광야의 바위틈에서 살아가는 비둘기가 더 부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날개도 없고, 그가 안전하게 피하여 있을 곳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누구를 의지해야할까요?

2) 그 백성의 고통과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

다윗은 대적에 대한 분노나, 대적을 피하는 것이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한 가장 우선적인 해결책은 바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16절 말씀에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부르짖는다”는 말은 ‘부르다, 소환하다’라는 뜻입니다. 누군가를 자기에게 오라고 부른다는 뜻입니다. 즉 지금 다윗은 어느 누구를 믿을 수도, 의지할 수도 없이 너무나 괴롭고 외로운 가운데 있으면서, 그가 ‘지금 당장 나에게 와 달라’고 요구하는 분이 있으니 그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을 원어에 맞게 번역하면 이런 뜻이 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지금 내게 와 달라고 요청하리니 ….’

성도 여러분, 아무리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 있어도 외롭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지 않던가요? 가족들 틈에서도 문득 문득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할 때가 있는가 하면, 힘이 들고 어려워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해도 막상 생각나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들도 다윗처럼 하나님을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지금 좀 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힘 듭니다. 제가 외롭습니다. 제가 아픕니다.’

성도가 이렇게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16절 하반절은, 성도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구원하다”는 말은 ‘구출하다, 구조하다’는 뜻입니다. 시 40편 2절은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라고 노래합니다.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져서 막막하기만 할 때, 다시 재기하여 일어설 수 없다는 절망이 눌러 올 때, 갈 때까지 가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이 탈진했을 때,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당한 것 같은 처참함 속에 몸부림칠 때, 바로 그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구하여 내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하면 하나님은 119 구조대보다 더 빨리 오셔서 여러분을 그 힘들고 어려운 데서 구출하여 내신다는 말씀입니다. 놀랍지 않으세요? 또한 17절 하반절에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말은 ‘주의를 기울여 듣다’, 즉 ‘경청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대충, 적당히 듣지 않고 주의를 기울여 잘 듣고 응답하신다는 말입니다. 나도 힘든 데 다른 사람이 와서 ‘힘들다’, ‘어렵다’고 말하면, 처음에는 좀 들어주다가도 금방 딴 생각 하고 딴 데 눈 돌리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에 대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제니퍼 밀러라는 분의 “통곡의 방”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녀는 이 글에서 주님에 대한 자신의 영적인 체험을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수많은 방이 있는 거대한 저택으로 초청하셨는데, 그 집은 바로 “아버지의 집”이었습니다. 그녀는 주님과 함께 각각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그 많은 방들을 일일이 구경했습니다. 그러던 중 주님은 그녀를 그 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방은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로 단장된 정말 멋있는 방이었습니다. 그 방은 바로 예수님의 방이었습니다. 그 방으로 인도 된 그녀는 베드로처럼 그 방에 영원히 머물고 싶은 마음이 솟아났습니다. 그런데 그 방을 두루 살피던 그녀는 그 방의 침대 옆 바닥에 지하로 통하는 나무문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작은 나무문은 귀품 있고 우아한 그 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의아한 생각이 들어서 주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 문은 ‘다른 방으로 내려가는 통로’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물었습니다. “왜 이 문을 하필 이 아름다운 방의 침대 곁에 두셨습니까?” 그러자 주님은 “그 문을 거기에 둔 것은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그 밑에 있는 방에서 보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그러면 이 아래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통곡의 방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녀는 주님과 함께 바닥에 있는 조그마한 문을 열고 어두운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그 문은 너무 작아서 무릎을 꿇어야 통과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방에 들어갔더니 그 방은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그 방에 있는 것이라고는 작은 나무 의자 하나와 작은 창문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주님은 그 의자에 앉으시며 얼굴을 창문 밖으로 돌리셨습니다. 그 즉시 그녀는 그 방이 왜 통곡의 방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창밖을 내다보시면서 지상의 사람들로부터 들려오는 모든 통곡을 하나하나 보고 듣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 아픈 신음소리, 버림받아 아파하는 소리, 몸이 아파 괴로워하는 소리, 등 세상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들을 귀 기울여 들으시는 것이 그 방에서 주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사람들의 모든 기도와 울부짖음을 그 의자에 앉아서 듣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본 그녀는 그 자리에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만왕의 왕, 아름답고 존귀하신 우리 주님이 이 초라한 곳에서 당신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 때문에, 아니 주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이 기도하는 소리, 신음소리, 울부짖는 소리, 때로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꺼억꺼억’ 하며 숨이 넘어갈듯 외치는 그 소리를 듣고 계신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을 살피시고, 여러분의 작은 신음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시고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자세히 잘 들으시고,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으며 그를 향하여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여러분을 구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체험했던 다윗은 뭐라고 말합니까? 17절에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즉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대적이나 처지와 환경을 탓하며 원망하며 분노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전심으로 매달려 기도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와 달라’고 하면 즉각적으로 오셔서 응답하실 주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다윗은 자기 자신을 향해, 그리고 모든 성도를 향하여 권고합니다. 22절에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의 사정을 살피시고, 그 백성의 부르짖음을 다 들으시고는 즉시 응답하실 것이기 때문에, 형편을 탓하고, 사람을 원망하기보다는 하나님께 기도로서 그 문제를 맡겨버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정을 아뢰십시오. 여러분의 사정을 경청해주지 않을 사람을 찾지 마시고, 들어도 응답하고 해결해 줄 수 없는 사람을 더 이상 찾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께 부르짖어, 하나님의 응답과 구하여 주심을 맛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우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

설교 초에 소개했던 <경청>이라는 책의 저자 조이스 허기트 여사는 청각 장애 청소년들의 선생님으로 수고하신 분입니다. 그가 초기에 만난 장애아들은 거칠고 무례하고 공격적이었습니다. 서로 서로 심각하게 괴롭혔으며, 교사들의 말도 잘 듣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장애 때문에, 학교라는 환경에 적응이 안 되어서 그렇겠거니 생각을 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알고 보니 그들의 문제는 다른데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비록 잘 듣지 못하고 그래서 말도 잘 못하는 청각 장애인들이었으나, 자기 나름의 의사를 말하고 알리고 싶어 했는데, 가족들이나 친구들이나 교사들이 그들에게 귀를 기울여 듣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들어주지 않으니 그렇게 거칠고 공격적이고 반항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이스 여사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애를 쓰자 그들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주목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작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시고, 아주 작은 한숨소리와 그 한숨에 담긴 의미까지 다 읽어내고, 여러분을 구하시고 응답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하나님입니다. 다윗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그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왕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입니다.

그 분에게 뭔들 못할 말이 있겠으며, 뭔들 하소연하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께 말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때로는 말로 내 뱉지 못하고 여러분의 머리와 마음에만 두고 있는 것까지도 다 들으시고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단순히 듣기만 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처럼 듣고, 즉각적으로 해결하시고, 구하여 내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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