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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을 근사하게 하시는 하나님 (고후 5: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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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요즘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환경이 바뀌는 것을 복(福)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좋지 못한 환경이 좋은 환경으로 바뀌는 것을 복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복은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좋지 못한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훌륭하지 못한 사람이 훌륭한 사람으로, 형편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복 중에 최고의 복은 환경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뀌는 복입니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었습니다. 모양은 물론이고, 하는 생각과 행동 그리고 삶 전체가 하나님을 닮아 참으로 근사하고 훌륭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하는 순간 그 놀라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우리 사람처럼 악하고 추하고 더러운 것이 없다하리만큼 우리 인간은 타락하고 부패하였습니다. 근사하고 훌륭하다는 말을 감히 쓸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겉으로는 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속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비겁합니다. 정직하지 못합니다. 야비합니다. 욕심 사납습니다. 악합니다. 추합니다. 부끄럽습니다. 우리의 은밀한 생각과 삶들이 만일 드러나게 된다면, 들통 나게 된다면 우리는 그 수치 때문에 잠시도 견디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성경에 보니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 미처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못한 죄인들이 그 죄가 드러나는 것이 너무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워서 산과 바위에게 무너져 자기를 덮어 달라고 소리 지르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비하셔서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가리워 주시고 덮어 주셔서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의 수치 때문에 한시도 얼굴을 들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고사하고 사람을 마주 대하고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말씀이 옳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우리는, 저와 여러분들은,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될 가능성과 희망이 전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복음 중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사함 받게 되었습니다. 주홍 같이 붉은 죄가, 진홍 같이 붉은 죄가 흰 눈 같이, 양털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옮기어 졌습니다. 하나님조차 기억치 못하시게 되었습니다.

시험을 보다가 답을 잘못 적으면 선생이 다시 해 시험지를 주시듯, 그림을 그리다가 망친 학생에게 선생님이 다시 새 도화지를 주시듯,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망친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다시 새 도화지를 주시며 다시 시작하라 하십니다. 내가 너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씻어 주고 사하여 주었으니, 그리고 시간도 다시 충분히 줄 터이니 용기를 내어 다시 아름답고 근사한 인생을 시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인생의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아 그 값을 치루셨습니다. 그것이 우리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학생 때 읽은 소설 중에 아주 감동적으로 읽은 소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미우라 아야꼬’라는 여류 소설가가 쓴 ‘양 치는 언덕’이라는 소설입니다. 소설의 여 주인공 이름은 ‘나오미’입니다. 목사의 딸입니다. ‘료오이찌’라는 사람과 눈이 맞아 부모를 버리고 집을 나갑니다. 한 일 이년 정도를 함께 살았지만, 술버릇이 나쁘고 바람 끼가 심한 남편과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어서 도망을 나와 다시 친정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료오이찌가 폐병에 걸려 나오미에게로 옵니다. 나오미는 받아주려 하지 않았지만 친정 부모의 권면으로 받아 주게 됩니다. 처갓집에서 투병 생활을 하던 료오이찌는 장인 장모의 믿음에 감동을 받아 예수를 영접하게 되면서 점점 몸과 마음이 건강해 져 갑니다. 료오이찌는 투병생활을 하면서 매일 다락방에 올라가 그림을 그립니다. 나오미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기 위하여 그리는 그림이었지만 그는 자기가 그리는 그림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언제나 하얀 천으로 덮어 놓습니다. 나오미에게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 전에 사귀던 전에 사귀던 좋지 못한 여자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할 수 없이 나가서 만납니다. 그 여자가 술을 권하지만 사양합니다. 하룻밤 함께 지내자며 유혹하지만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 여자가 몰래 술에 수면제를 타 넣은 후 이 술 한 잔만 마시면 보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모르는 료오이찌는 그 술을 받아 마십니다. 그리고 잠이 오지만 그곳에서 잠들지 않으려고 나왔다가 길거리에서 잠이 들어 동사합니다.

그 소설의 클라이막스는 료오이찌를 장례한 후 료오이찌의 그림을 벗겨 보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시는 예수님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 한 청년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료오이찌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읽다가 받은 충격과 감동은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때 저는 속으로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료오이찌는 깨끗하다. 료오이찌는 아름답다. 료오이찌는 구원 받았다.>

그리고 그때 마음에 떠오른 찬송 하나가 있었습니다. 202장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이라는 찬송이었습니다. 그 찬송 중에 강하게 내 마음을 때린 가사는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는 가사였습니다. 저는 그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깨끗케 하시는가를 100%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던 사람입니다.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하여 밧세바의 남편이요 충성스러운 부하였던 우리아를 비열한 방법으로 죽이게 합니다. 요즘도 그와 같은 죄를 짓는다면, 그리고 그것이 드러나게 된다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비열하기 짝이 없는 죄를 지은 다윗이 다시 성군이 되고, 믿음의 조상이 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던 것도 십자가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윗은 십자가 이전의 사람인데 어떻게 십자가 때문에 다윗이 구원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라고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십자가는 역사적이면서 동시에 초역사적인 사건입니다. 2,000여 년 전에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이지만 그 능력과 의미는 초역사적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보혈의 능력은 역사적인 십자가 사건 이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십자가 사건 이전에도 동일하게 역사한다는 면에서 십자가의 사건은 초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전부터 있었던 것을 십자가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죄 사함을 받는 것이고, 십자가 사건 이전의 다윗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하여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비열한 짓을 한 다윗이 료오이찌처럼 깨끗해졌습니다. 아름다워졌습니다.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그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워서 시편 32편 1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 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 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아멘. 다윗의 죄는 치명적이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죄의 사슬과 결박을 끊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돈으로 되는 것도 아니요, 왕의 권력으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와 같은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와 같은 죄를 가지고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다윗에게 다시 기회를 주었습니다. 완벽한 기회를 주었습니다. 다윗은 그 기회를 잡고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에는 이와 같은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신약의 사도바울에게서도 그와 같은 다윗의 은혜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시편 32편 1절과 같은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중에 나오는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아멘.

사도바울이 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 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서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딸 받으려 함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고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 모든 사람의 죄가 그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사실을 오늘 본문 14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의 죄가 함께 죽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복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되고, 예수를 믿으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다 낫고, 기도를 통하여 자기의 소원을 이루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축복입니다.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할 때,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하고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를 하며 모세의 이야기를 할 때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그 설교를 들으셨습니다. 혹시 여러분과는 상관없는 말씀으로 듣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이니까, 모세니까, 요셉이니까 되었지 나는 그와 같이 훌륭한 사람이 못 되.’ 이렇게 생각하며 듣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같이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신 이유가 여러분과 하나님만이 아시는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이 요셉이 되고, 야곱이 야곱이 되고, 모세가 모세가 된 것은 다 저들이 요셉과 야곱과 모세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들을 깨끗케 하시고 새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도 우리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우리가 훌륭해서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훌륭하지 못해서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 못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우리의 허물을 가리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게 하시고 새것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이 은혜와 축복을 알게 되면
다른 축복에는 별로 관심이 없게 됩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하나입니다. 나 중심적인 삶을 살 때는 사는 것이 좋고 죽는 것은 싫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알아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게 되면 사는 것도 주를 위하여 죽은 것도 주를 위하여가 됩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매 일반입니다. 가난과 부함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얼마든지 가난해 질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된다고 하여도 부자의 의미는 부에 대한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주를 위하여 더 많이 쓸 수 있음에 있습니다.

다윗과 바울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축복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 축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던지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털어 하나님의 전을 짓고 싶어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도 오늘 본문 속에 평생 주를 위하여 살고, 주를 위하여 죽고 싶어 하는 열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 하시는 도다.>(14절)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13절. 바울은 정말 주를 위하여 미친 사람처럼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십자가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를 위하여 죽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그와 같은 마음을 오늘 본문 15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아멘.

여러분 부자와 가난한 자를 어떻게 구별하시는지 아십니까? 누가 부자이고, 누가 가난한 사람입니까? 부자와 가난한 자를 어떻게, 어떤 기준으로 구별할 수 있으십니까? ‘이만하면 충분하다. 더 모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부자랍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돈과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아직은 충분하지 않다. 조금 더 모아야 하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랍니다.

그런 면에서 다윗은 진정한 의미에서 부자였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왕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많은 것을 소유한 부자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부족함이 없습니다.’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솔로몬의 그의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모든 강물을 바다로 연하여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한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은 부자고 솔로몬은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과 은혜를 안 바울은 다른 축복은 그에 비하면 마치 배설물과 같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강함과 부함을 부정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세상적인 강함과 부함은 더 이상의 삶의 의미와 목적이 될 수 없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누구이시든지 간에 아무 상관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허물과 죄가 얼마나 크던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가 다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나님이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허물과 죄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은혜와 축복이 너무 커서 평생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살고 죽는 것의 의미와 목적을 자기 자신에게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두며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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