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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 좋다는 것이 뭡니까? (요이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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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표된 `인구 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개신교 인구는 876만6000명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10년 전과 비교해 14만4000명(1.6%)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6만 교회 1200만 신도`를 자랑해 왔는데
      이번에 그 허수가 밝혀진 셈입니다.
이런 허수보다 더 큰 문제점은
    앞으로 한국교회의 전망이 그리 밝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한편에서는 Again 1907년 슬로건 아래
          2007년을 평양 대부흥운동 재현을 외치지만
평양 대부흥을 가능케 했던 동력이
    무엇보다도 진정한 회개운동임을 교회사가들이 증명하듯이   
    회개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 철저한 방향전환 없이는 
    한국교회는 결코 새 역사의 빗장을 열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한국교회가 선교120년을 지나면서
  이제 서서히 영적 성인병이 만성화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2005년 4월 대한내과학회는 ‘성인병’이라는 명칭을 
    ‘생활 습관병’으로 개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내과학회는 ‘이 질환들은 잘못된 생활습관의 반복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므로         
올바른 생활습관을 지녀야한다’는 인식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의도라는 것입니다.
성인병 증상은 잘못된 생활 습관으로 서서히 나타난다는데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발병하면 완치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성인병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비만이라는 것은
      너무 많이 먹어 세포수가 늘어나는 것인데
      한번 늘어난 세포는 좀처럼 줄지 않는다고 합니다.
습관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시작은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의 습관을 바꾸는 일이야말로
    습관의 덫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의 허세에서 벗어나
        영적 비만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예수 잘 믿고 있다는
        생각부터 바꾸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침체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물질 중심 가치관의 우상숭배요,
다른 하나는 대외 공신력의 붕괴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세상이 교회를 믿지 않습니까?
  교인들이 말하는 것 하고 삶하고는 다른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1997년 IMF의 위력을 실감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그 휴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1997년 IMF 위기가 왜 다가왔습니까?
전문가의 말을 빌리면 대외신용도 추락에 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신용도가 떨어진다면
        교회는 세상에 존재할 자리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여 사회로부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하여
바른 신앙과, 건전한 신앙의 삶을 회복할 수 있는 내일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요한1서는 요한 1서의 제강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요약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참 보람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요한의 고백처럼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명대로,
          진리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신앙생활 잘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빌4:1절에서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라고 부릅니다.
진정 신앙생활 잘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확인하고
    순종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오늘 본문말씀 가운데 사도 요한의 인사말에서
    목회자의 보람이 어디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1. 사도 요한의 요한2서 인사말에서 목회자의 보람이
                어디에 있다고 여겨집니까?(1-3절)
요한은 1절에서
[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한다 ] 고 합니다.
요한은 본래 사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자신을 장로로 표현한 것은
    푸레스뷔테로스 - 연장자란 뜻이지만 교회의 감독자란 의미로
                지금으로 말한다면 목회자란 의미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편지를 받는 대상자가 부녀와 그의 자녀라고 했는데
이 같은 표현은 글자 그대로 한 여인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서신 전체에 나타난 내용이 한 공동체에 주는 교훈으로 볼 때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의미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 목회자와 성도와의 관계에서 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요한은 성도들을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목사의 마음입니다.
목사마음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한번 따라 합시다.
[ 석탄 백탄 타는 데는 연기나 보이지                   
    목사 마음 타는 데는 연기도 안 보인다 ]
사실 이것은 목사 마음뿐만이 아닙니다.
[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다 ] 라고 합니다.
성도 사랑은 목사 몫뿐만이 아니라
    진리를 바로 깨달은 성도는 같은 마음입니다.
그저께도 교인 중에 제 한테 그래요
[ 목사님, 어느 집사님 가정이 너무 어려운데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
[ 감사합니다. 어떻게 도와야 할지 제가 알아보고 말씀드릴게요. ] 

사도 요한은 교인들에 대한 사랑을 진리와 연관시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자라면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을 참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진리 안에서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우리는 그 지체들이기 때문에
그 지체들인 우리는 교회와 성도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특히 요한 공동체의 교인들에게 이런 애정을 보이는 것은
2절에 [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
이 말은 우리 안에 거하여 - 공동체 즉 교회 안에 거하여
                신앙생활 잘 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는 뜻입니다.
목회자는 양들이 꼴을 잘 받아먹고 건강하게 자라갈 때 목회의 보람을 느낍니다.

그리고 물론 당시 신약교회의 관행적 인사이기도 하지만
3절에 [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
여기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옴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공로 없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부와 성자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긍휼을 거두시면 우리는 구원도 소망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평강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평안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속에 평강의 강물을 공급합니다.
이 강물이 우리의 심령에 넘칠 때, 우리의 마음에 참 평안이 깃들게 되고
      생의 무한한 활력소가 되는 것입니다.
기억나시죠? 민6:24-26절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제사장 아론에게 이렇게 축복하라는 말씀
[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
오늘도 이 강단을 통해 흘러나오는 말씀이
    은혜를 깨닫게 하고 마음에 평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 축도할 때 진심으로 축도합니다.
우리 내일의 가족들, 외국인 형제 자매들, 장애우 형제 자매들
특히 자모실에 있는 젊은이들과 품에 앉겨 있는 어린생명들 까지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럼 사도 요한이 지금 사랑하는 부녀와 자녀 같은 교인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2. 신앙생활 잘 한다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4-6절)
4절에서
[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
요한의 이 말은 모든 목회자들의 심정을 토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의역한다면 신앙생활 잘 하는 것 보니 ‘내가 심히 기뻐다’ 란 말입니다.
자기의 양 무리들이 계명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진리에 행하지 못하며
    어그러진 길로 행하고, 믿음대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목자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 무리들이 잘 순종하고 진리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그로 인한 기쁨이나 보람이란 다른데 비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히13:17절에는 [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복하고 복종하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 일을 하게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종들의 마음에
      기쁨을 주고 보람 있는 목회 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잘 하는 것입니다.

그럼 신앙생활 잘 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본문말씀 대로라면 [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 ]입니다.
계명대로 진리 안에 행하는 삶이 어떤 삶입니까?사도 요한은 진리와 계명과 사랑의 관계를 5절과 6절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했던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졌지만
      주님은 아무 대답지 하지 아니했습니다.
왜? 중생 되지 못한 자에게 진리를 설명해 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진리가 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사랑을 증거하는 말씀이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도 강조 합니다.
5절에 [ 부녀여 내가 이제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 고 합니다.
사도 요한이 교회에 구하는 바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말이 율법에는 기록되지 아니한 생소한 말 같지만
5절에 ‘이 사랑은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율법도 하나님의 사랑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의 두 강령에 대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풀이하셨습니다. 율법으로 밝히신 하나님의 계명도 사랑에서 출발한 것이요
복음으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도 이 사랑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제쳐놓고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나올 수 없으며 받을 수도 없습니다.
사랑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강물처럼 넘쳐흐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 좋다, 신앙생활 잘 한다는 말은
      바로 사랑을 베푸는 삶인 것을 말합니다.
6절 [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
바꾸어 말한다면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삶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젊었을 때 어느 날
    켈커다 빈민굴에서 어두운 방에 사는 환자를 발견했습니다.
더러운 방에 냄새가 지독한 남자인데
    그 방에 램프(등잔)가 있는데도 켜지 않고 있었습니다.
테레사가 방청소를 하기 위해 램프를 켜자 사나이는 소리를 지르며 불을 껐습니다. 테레사 수녀도 지지 않고 다시 켜자 환자는 램프를 던져 버렸습니다.
[ 난 등불이 없는 것이 좋아, 일 년 내내 램프는 켜지 않았어! ] 
  하고 버럭버럭 고함쳤습니다.
그는 육체의 병뿐이 아니라 마음의 병이 더 심했습니다.
이튿날 테레사 수녀는 새 램프를 사다가 불을 켜주고 돌아왔습니다.
그 후 10년이 지났습니다.
젊은 수녀들이 빈민굴의 사나이에 대한 보고를 했습니다.
그는 같은 빈민굴집에 살지만 깨끗이 개조된 집이요,
    의젓한 직업을 가졌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 그 키 작은 수녀님께 전해 주시오.
  당신의 등불이 지금도 내 생활 속에 불타고 있다고. ]       
지금도 세상에는                                 
어둠의 생활을 당연한 일상생활로서 받아드리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두운 세상에 직접 찾아오신 것처럼
십자가 사랑을 가지고 직접 찾아가 그 사랑을 삶을 통해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태워 진리의 불을 밝혀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
    예수 잘 믿는 성도의 사명입니다.
이렇게 사랑과 진리는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진리가운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거짓된 진리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삶을 통해 증명되지 않는 사랑은 거짓 사랑입니다.
사랑을 통해 증거되지 않는 진리는 거짓입니다.
사랑을 태워 진리의 불을 밝혀 세상의 빛이 되어
    진리를 생활로 증거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신앙이 좋은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진정 예수 잘 믿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마귀는 어떠하든지
    진리 가운데 행하려는 우리의 삶을 방해하려고 합니다.
그것도 예수 잘 믿어 보려고 하는 교인들에게 미혹을 합니다.
3. 마귀는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흔들어 놓으려고 합니까?(7절)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여러 번 미혹하는 자,
        적그리스도에 대해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요한이 말하는 미혹하는 자란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온 것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당시 ‘영지주의자(Gnosticism)’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셨음을 부인하는 대표적인 이단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때에 십자가의 복음이 널리 퍼지자
  사단은 깜짝 놀라서 그럴듯한 거짓사상을 꾸며서
        성도들을 혼돈 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단의 계략은 인류를 속여서
    구원함을 받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이므로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요일2:22-23에
[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사도 요한은 적그리스도의 유혹을 미혹이란 말로 표현합니다.
미혹이란 감미롭게 꼬신다는 말이지요.                 
이단 들은 처음 접근할 때 항상 달콤하게 유혹합니다.

불가사리는 특이한 방법으로 조갯살을 먹는다고 합니다.
처음에 불가사리는 조개들과 그냥 어울린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조개들이 먹이를 찾아 껍질을 벌리면  재빨리 속살을 간지릅니다. 그 간지름은 어리석은  조개에게  즐거움을 느끼게 하고  껍질을 더 벌리게 합니다. 바로 그때 불가사리는 번개같이 조개의 심장을 찾아 눌러 버립니다. 
조개는 특이한 채질을 가지고 있어
    심장의 압박을 받으면 곧 죽어 버립니다.
    그러면 곧 바로 불가사리의 먹이가 되는 것이지요.
불가사리는 단숨에 공격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같이 놀아주고 간지러 주고,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신속 정확하게 잡아먹습니다.
`서서히 조금씩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게 바로 유혹하는 자의 습성입니다.
이것이 이단들이 교인들을 미혹하는 특징입니다.
그러니 누가 옆에서 간지러거든 뿌리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단들 가운데는
적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 라고 했는데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 1서에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며    예수님 말씀의 권위를 부인하였으며    인간의 죄 성을 부인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한 구원을 부인하였으며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과 깨끗한 삶을 거부하고    교회 지도자들의 권위도 부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런 것을 부인하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소위 독선적 분파주의 자들이 강조하는 것이 성령의 증거라고 하면서
    불건전한 신비를 강조합니다.
그러니 불건전한 신비주의도 우리는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하여 주의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4.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하여 주의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8-9절)
1) 8절에 [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 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 고 합니다.
8절에서 `너희는 너희를 삼가라`고 했습니다.
왜 삼가라고 합니까? 오직 온전한 상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온전한 상은 천국에서 누리는 상입니다.                 
마귀는 구원받은 성도가 어떻게 하든지 하늘의 상급을 받지 못하도록 유혹합니다.

루이스 (C.S.Lewis) 의 작품 The Secrewtape Letters 에
사탄이 자기 조수인 웜우드 (Wormwood)를 교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탄은  말합니다.
[ 우리의 목적은 인간들이 악행을 하도록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결과적으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이 죽게  만드는 것이다.
  웜우드야, 명심해 들어라.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네가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인간들을 안락하고 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들이 누구에게도 방해되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 살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라.
우리의 두 가지 무기를 결코 잊지 말라.
그것은 무관심과 연기이다.
인간들에게 부와 편안을 주어 남에게 무관심하게 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편리와 만족을 주어 모든 고상한 계획을 연기하게 만들라.
그러면 천국에서 상급이 없을 것이다. ]

신앙생활에는 언제나 삼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삼가란 말은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벧후1:6절 말씀에는 `지식에 절제`를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식은 뻗어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절제가 따르지 않으면 진리에서 이탈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삼가 하는 자세를 가지고
말씀의 테두리 안에서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려고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2) 9절에 지내치지 말라고 합니다.
‘지내 쳐’라는 말은 앞으로 훨씬 더 나아갔다는 말로써
영지주의 자들이 기독교 신앙의 틀을 넘어서
      자신들의 지혜와 철학을 주장하였든 것입니다.
가끔가다 보면 주변에 지내 치는 거짓 교사들이 있습니다.
현대교인들은 설교도 많이 듣고 각종 집회 세미나 또는 훈련을 받으니
    말씀 수준이 보통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꾸 별미를 좋아하다 보니 엉뚱한데 미혹되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
건강의 비결 첫 번째가 뭔지 아십니까? - 집에서 밥 잘 먹는 것
미식가들 치고 성인병 없는 사람 있는가 보세요.
          별난 것 좋아하지 마세요.
한번은 제가 알고 있는 집사님 한 분이                   
    말씀을 쪼개는 목사님이 부흥회 한다고 와보라 해요
말씀을 쪼개는 목사님은 어떤 목사님인가 싶어 갔더니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어도 바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하면서
예수님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가 보통 십자가 인 줄 압니까?
오른 편은 백향목 나무로 되었고 왼 편은 잣나무로 되었는데
      백향목은 향기를 날라고 잣나무는 썩지 아니한데요
그래서 십자가의 신앙은 향기를 날려야 하고 변질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니
    앉아있는 교인들이 아멘 하면서 탄복을 합니다.
    믿으시면 아멘 - 여기도 정신 차려야할 분이 있네요.
강사가 기도하니 이빨이 금이빨로 변하고
    짧았던 다리가 길어지고 하니 와~! 하고 몰려가요. 지내치지 마세요.

3) 교훈 안에 거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9절 하반절 [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 가능하면 말씀을 많이 알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고 많은 말씀을 아는 것보다
      적은 말씀을 알더라도 아는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훈에 거했고 계속해서 거해야 할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중에 요한이 왜 미혹이란 말을 사용한지 알겠는 것 있지요.
왜? 일단 미혹을 받으면 좀처럼 지도자들의 교훈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니 꼭 목회자가 교훈하거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단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5. 우리의 신앙을 미혹하는 이단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10-11절)
10절 [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
초대교회는 세 종류의 지도자의 직책이 있었습니다.
사도와 장로와 예언자 또는 선지자입니다.
이 세 가지 직제 중에 문제가 되었던 것은 <예언자>,
      즉 순회 전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성령을 빙자하여 교회를 갈취하며
    자기들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교회 분열을 획책하므로
    초대교회의 두통거리가 되다시피 했던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을 <장로>로 부르면서
교회 분열을 조장하고 교회를 혼란시키는
    거짓 선지자 무리들의 거짓 사랑에 미혹되지 않도록
    이들은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들과는 아예 상종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본문에서 적그리스도의 특징을 밝힌 후             
성도들로 하여금 그러한 이단에 미혹되지 않도록 경계하고,
그리스도의 바른 교훈에 거하지 않는 거짓 교사들과는
      아예 상종조차 하지 말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오늘날도 우리 주위에는 진리를 왜곡시키며
      믿는 성도들을 미혹하는 거짓교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들에 대해 단호해야 합니다.

평소에는 사랑을 강조한 사도 요한이 거짓 교사들에게는
      어떠한 동정도, 배려도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인사하다’는 말의 어원적인 의미는 ‘ 문안하다’는 뜻으로
결국 거짓 교사의 악한 교훈에 대해 묵인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만약 이런 자들을 묵인하는 것은
우리를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사랑을 배반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서 승리하는 신앙의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씀 안에는
    그들과의 대화까지도 단절하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단자들과의 성경적인 토론은 절대로 삼가야 합니다.
그들은 비록 성경 토론에서
    그들의 주장이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인 줄 알았다 해도
    결코 진리로 돌이킬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교묘히 성경을 배웠으며 거짓된 방법으로 진리를 왜곡하기 때문에
    토론에 말려 들어가 이단에 물들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근묵자흑(近墨者黑),
    즉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미혹하는 자와 가까이 있으면 그 미혹의 마음에 감염되므로
  요한은 처음부터 그들과의 접촉을 아예 금지시키는 것입니다.
11절에 [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
사도 요한은 서신을 맺으면서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하는 것보다
    방문하여 만나서 말하고 싶다고 하면서 서신을 끝냅니다.

요한 2서의 핵심은 - 예수 잘 믿는 것이 무엇인냐?
    계명대로 진리 안에 행하는 것 - 즉 사랑의 실천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에 온전한 상을 잃지 않기 위해서
    이단들의 미혹에 삼가 조심하라고 합니다.
영적 비만에서 단호한 결딴을 내려 건강한 신앙인으로 거듭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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