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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이 믿는 믿음의 내용을 보여라! (삿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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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환경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킴으로써 외부가 개선되게 하십니다.  세상은 사람의 외형의 변화를 중요시하지만 예수님은 본성의 변화를 원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외부를 먼저 바꾸어서 내면을 개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복은 내면의 중심이 변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작품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내면의 변화가 없는 외부의 변화는 의미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베데스다 연못가에 앉아있던 38년된 병자를 향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곤고한 심령을 이끌고 주님의 전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죄악의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십시오.  모든 저주와 절망의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마음을 새롭게 하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오늘 이 한 말씀을 곤고한 내 영혼의 깊은 곳에 붙들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이 시간 성령의 충만함으로 묵은 마음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하십시오.

인간의 우수성이란 단일 행동이 아닌 바로 습관에 의해서 판명됩니다.  아십니까?  좋은 습관이 좋은 인생을 만들고, 나쁜 습관이 삶의 비극을 낳습니다.  좋은 습관이 행복과 기적을 낳습니다.  습관의 씨앗이 성품을 얻고, 성품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 짓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좋은 습관을 만들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성품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제발 성질을 부리지 마십시오.  성질에 자신의 마음을 내 맡기지 마십시오.  사단은 인간의 성질을 사용하지만, 하나님은 성품을 사용하십니다.  사단은 인간의 성질을 돋우어서 끊임없이 공격하고 분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령은 온유한 성품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온유한 자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축복의 말씀을 합니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우리가 이 말씀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온유한 성품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꾸십시오.

사람은 그의 생각이 그의 행동을 낳고, 그의 행동이 그의 삶의 자리를 낳습니다.  성경에서 악인이라는 말은 습관적으로 불경건한 자, 어리석은 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복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우리가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습관적으로 악인의 길을 쫓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믿음의 사람은 언제나 생각이 경건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언제나 그의 삶이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경건한 자의 삶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자를 축복하십니다.

저는 종종 오벧에돔의 집에 임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생각합니다.
사무엘하 6장에 보면, 어느 날 다윗은 3만명의 사람들을 동원해서 아비나답의 집에 있는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 성으로 가져오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에 소들이 뛰어서 법궤가 떨어지려고 합니다.  그 때에 웃사가 그 법궤를 손으로 붙잡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죽습니다.

이 일 때문에 다윗은 법궤를 자기 성으로 가지고 오는 것이 두려워서 오벳에돔의 집에 두고 맙니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하나님의 법궤, 임금도 두려워하는 하나님의 법궤가 자신의 집에 놓여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오벧에돔이 당하고 있는 상황은 스스로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힘에 의한 강제적인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아무런 힘이 없는 오벧에돔은 이 현실 앞에서 얼마나 절망했겠습니까?  얼마나 속으로 분노했겠습니까?  이 황당하고 엄청난 환경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웃사가 만지다가 죽임을 당했던 그 두려움의 법궤가 지금 내 집에 있다.
웃사는 한 사람이 죽었지만 잘못하면 온 집안이 죽임을 당할는지도 모른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오벧에돔과 그의 가족들이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또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자신과 자신의 집에 이런 상황을 초래하게 만든 다윗을 향해서 독설을 퍼붓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법궤가 자신의 집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하는 행동이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마음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런데 그 분노를 아내와 아이들에게 표출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자신의 집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 때문에 오벧에돔과 그의 가솔들은 모든 행동이 달라집니다.  말투도 달라집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석달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두려워서 말과 행동을 조심했지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면서 그 행위가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저는 오벧에돔의 집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을 해 봅니다.
물질이 복이 아니라 사람의 좋은 습관이 복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좋은 행동이 좋은 습관을 만듭니다.  좋은 습관이 행복과 기적을 낳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행위는 습관을 굳힙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을 만드는 바 성격을 고정시키고 성격은 운명을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성품을 만들어 가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시고자 하는 그릇으로 자신을 만들어 가십시오.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을 감찰하고 계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을 보고 계십니다.

코람데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인식하면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드리는 것입니다.  오벧에돔과 그의 집안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 마음에 하나님을 모십시오.  내 가정에 하나님을 모십시오.  여러분의 직장과 사업에 하나님을 모십시오.  그러면 내 인생이 달라집니다.  내 가정이 달라집니다.  일터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삼손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삼손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죄가 습관화되었습니다.  그는 습관적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창녀에게로 들어가지 말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가장 엄하게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창녀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죄가 습관이 되었습니다.  습관적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합니다.  죄가 나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십시오.  습관적으로 악의 자리에 서지 않도록 하십시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고 또 기도하십시오.  다윗은 이 문제에 대해서 아주 간절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한 사람이 되십시오.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이 땅을 밝히는 등불과 같은 존재로 살아가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말씀을 현대어성경에서는 아주 직설적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옳은 일에 더욱더 힘써 주기 바랍니다.  지극한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일에는 손을 대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인식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자리에는 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에는 손을 대지 마십시오.

립싱크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수들이 공연장에서 실제로 노래는 부르지 않고 이미 녹음해 두었던 음향을 틀어서 자신은 입술만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립싱크.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땅의 교회 안에도 립싱크 교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 생활에서는 어떠한 그리스도인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는데 단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몇 마디의 말로만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삶의 내용은 전혀 없는데 말로만 '주여, 주여'라고 외치면서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는 립싱크 교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을 보여주십시오.  여러분이 믿는다는 그 믿음의 내용을 보여주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그 모습을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보여주십시오.  아십니까?  증거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죽은 믿음으로는 어떠한 역사도 일으킬 수가 없습니다.  립싱크 교인은 종교를 흉내내는 종교꾼에 불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립싱크 교인인 미가의 가정에 대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미가가 어느 날 어머니의 재산 가운데 은 천백 세겔을 훔쳤습니다.  10절 말씀에 보면 은 천백 세겔이 얼마나 큰 액수인가를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하여 나를 위하여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주리라"

그러니까 당시 제사장의 1년 사례가 은 열 세겔이라고 한다면, 천백 세겔은 제사장이 110년을 일해서 받을 수 있는 돈입니다.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이 엄청난 돈을 잃어버린 미가의 어머니가 훔쳐간 도둑을 저주했습니다.  그리고 이 저주의 소리를 미가가 똑똑히 들었습니다.  결국 미가는 자신의 잘못이 마음에 걸려서 어머니에게 자신이 그 돈을 훔쳤노라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본문 2절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 이후에 나타난 어머니의 행동입니다.  분명히 그 엄청난 돈을 아들이 훔쳤다면 아들의 잘못을 나무라고 야단쳐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잃었던 은을 찾는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영영 못 찾을 줄 알았는데 아들이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오히려 감사하면서 아들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그리고 그 은으로 아들을 위해 신상을 만들고 또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까지 합니다.

그런데 4절에 보면, 더 한심스러운 일을 보게 됩니다.  본문 4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미가가 그 은을 어미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미가 그 은 이백을 취하여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보십시오.  은을 여호와께 바치겠다고 해놓고서는 겨우 은 이백 세겔만 썼습니다.  여호와께 다 바치겠다고 하고서는 천백 세겔 중에서 이백 세겔만 드렸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머니의 신앙과 그 됨됨이가 어떠한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아들이 어머니의 재산을 훔친 것처럼 어머니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한 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녀들에게 신앙의 본이 되십시오.  여러분들의 말과 행동을 자녀들이 다 보고 듣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그대로 따라서 합니다.  때문에 여러분의 신앙이 자녀들에게 복의 근원이 될 수도 있고, 악의 뿌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미가는 교회의 겉모습만 갖추면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신당을 짓고 제사장을 두었습니다.  진정한 신앙생활로 그 영혼이 복 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자신의 생활에 유익을 얻고,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묻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목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십니까?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동기와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인생의 크기는 우리가 누구인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하신 분이 누구이신가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지식은 하나님을 바로 알아 가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의 꿈과 생각과 언어와 행동과 가치관을 결정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크기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아십니까?  가장 위대한 만남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결단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내 인생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여러분의 인생을 바꾸어 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은 첫 단추가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바로 믿으십시오.  제대로 믿으십시오.  립싱크 교인이 되지 마십시오.  말은 아주 그럴 듯합니다.  종교적인 형식도 아주 괜찮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생활에서 경건의 내용이 없다면 그는 거짓된 신앙의 모습만 보여주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여러분의 자녀들이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형제와 이웃이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믿음의 내용을 보고 싶어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저 교회에 나와서 조금의 위로를 받고 싶어서 입니까?  아니면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마음이 허전하고,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 같아서입니까?  이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는 하나님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 편한 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마십시오.  나 편한 대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의 일차적인 관심은 진리가 무엇인가에 있지 않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는 어떤 일을 했을 때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유익이 되는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 편한 대로 행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손해가 가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불편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가차없이 외면합니다.

삼손이 문제가 무엇입니까?  결국 자기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았던 것이 아닙니까?  자기 정욕이 이끄는 대로, 자기 혈기가 이끄는 대로 그렇게 내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 결과 삼손은 자기 영성에 무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삼손을 떠나셨고, 자신은 두 눈이 뽑힌 채 처참한 비극으로 끝이 났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기에서도 나 편한 대로 신앙 생활을 하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본문 5절에 보면, 미가에게는 신당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신당을 교회로 바꿔서 읽을 수 있습니다.  미가와 그의 어머니는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에 드라빔이라는 신을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아서 다른 신을 예배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하나님이 지정하신 예배 장소가 있었습니다.  사사기 18장 31절에 보면, 당시에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었습니다.  실로는 미가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다지 먼 곳이 아닙니다.  미가는 에브라임 산지에 살았는데 실로는 에브라임 지파의 지역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미가는 가까운 곳에 하나님의 집을 두고서도 더 가까운 곳을 찾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에 신당을 세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병들게 하는 싹은 게으름에서 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게으름에는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첫 신앙의 감격을 체험하면 그 열정과 흥분이 우리를 모든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열정이 차츰 식으면 일주일에 세 번, 일주일에 두 번, 나중에는 일주일에 한 번도 마지못해서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교인의 체면을 차리려고 합니다.

왜 이런 결과가 생기는 겁니까?  신앙 생활의 초점을 편리함에 두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올바른가를 묻지 않습니다.  자신의 현재 영적 상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편리하고 유익한 것만 염두에 둡니다.  거기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자기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는 데 있습니다.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남을 돕기 위한 참된 사랑을 할 때 행복은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행복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여인, 남편을 다섯이나 가졌던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는 어떻게 해서 일어났습니까?  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발견함으로써 일어났습니다.

아십니까?  사람이 스스로 행복한 존재가 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달라집니다.  다른 사람을 귀하게 여길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자신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을 좋아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사람을 싫어한다면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집을 소유한 사람은 많지만 행복한 가정을 소유한 자는 극히 적습니다.  그것은 관계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 편한 대로의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진정으로 행복하고, 복된 존재로서의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면 이제부터라도 신앙생활의 초점을 편리함에 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고, 어떻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를 물으면서 신앙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인간의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자기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는 데 있습니다.  이런 소중한 것을 발견하면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미국에 유학을 간 세 학생이 고층 아파트에 방을 얻어서 함께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함께 외출을 하고 돌아와 보니 그날 따라 정전이어서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한 학생이 이야기나 하면서 천천히 걸어서 올라가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좋은 생각이라며 모두들 같이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철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법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신학을 하는 사람이 구원에 대해서 흥미롭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그들이 묵고 있는 24층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지칠 대로 지쳐서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래도 퍽 유익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루하지 않게 올라왔다면 서로가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려고 보니까 열쇠가 없었습니다.  1층 수위실에서 열쇠를 가지고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대인들이 걸려 있는 가장 심각한 병 가운데 하나가 자기 상실증입니다.  세상일에 온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말세가 되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체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때가 되면 내용은 없고 형식만 있는 껍데기 교인들도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입술만 움직이는 립싱크 교인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들을 향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형식이 우리의 신앙 생활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화려한 교회, 엄숙한 의식, 장엄한 예배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내용이 빠진 믿음은 위선이요, 거짓입니다.  미가와 그의 어머니는 형식을 갖추는 데는 신경을 썼지만 정작 중요한 믿음의 내용을 소홀히 했습니다.  신당을 짓고, 신상을 세우고, 제사장을 두는 것이 그들의 관심사였습니다.  어떻게 신앙으로 바르게 살아야 할지는 그들의 고민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교회가 신앙의 내용을 상실하면 그 교회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에게는 복음의 감격이 있이어야 합니다.  신앙을 추구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세계 선교에 대한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자손들에게 올바른 신앙을 유산으로 남겨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형식이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의식이 필요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의식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용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 생활의 목표가 되시기 바랍니다.  내용과 형식을 갖춘 그런 믿음을 소유하십시오.  여러분이 믿는 그 믿음의 내용을 자녀들과 이웃 사람들에게 보여주십시오.  보여주지 않는 신앙은 죽은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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