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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집념의 신앙인 야곱 시리즈(2) - 가로챈 축복 (창 2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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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서 해야 할 일

요즘도 가끔 뉴스에 부부 사기단뿐 아니라 부자 사기단, 모녀 사기단 사건이 나와 우리를 놀라게 하는데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도 그 유명한 '리브가-야곱 모자 공모 축복 탈취사건'이 나옵니다. 이 사건은 물론 야곱과 어머니 리브가가 공모한 것이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늙은 아버지 이삭이 제공한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집니다. 나이 먹으면 대개 동작이 느려지고 눈과 귀가 어두워져 잘 못 보고 잘 못 듣게 되지요. 우리는 이렇게 눈과 귀가 어두워지기 전에 부지런히 성경 보고 말씀 들어야 하겠습니다. 연세 들어 교회 나온 분들 중에 후회하는 분들을 봤습니다. 내가 왜 진작 눈과 귀가 밝을 때 교회 못 나왔는가, 왜 건강할 때 좀 더 성경보고 말씀 듣고 봉사하지 못했던가 하고 말입니다. 또한 나이 들어 눈과 귀가 어두워지면 아무래도 내 마지막이 가까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이 때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창세기 49장에 보면 야곱은 숨을 거두기 직전 열두 아들을 축복하는 일을 합니다. 우리도 나이 들어 세상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싶을 때 야곱처럼 영적으로 유익한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모들에게 주신 가장 큰 권한이요 의무는 바로 자녀를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는 일인데 우리가 늙어서 자녀들에게 해 줄 일 중에 이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나이 들어 이런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갖지 못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이삭처럼 실수를 하게 됩니다. 이삭은 나이 들어 늙게 되자 맏아들 에서를 불러 부탁을 합니다.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지 알지 못하니 너는 들에 나가 나를 위해 사냥을 해서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나로 죽기 전에 먹고 네게 마음껏 축복하게 하라." 물론 이삭의 이 말 속에도 야곱처럼 죽기 전에 자녀를 축복하겠다는 말이 들어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자녀를 축복하겠다는 말보다 왠지 별미를 먹게 하라는 말에 더 무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이삭이 나이 들어서 육신적인 안목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마지막 죽기 전까지도 아들이 잡아다 만들어주는 별미(別味), 특별한 음식에 마음이 가서 거기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어린아이처럼 된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나이가 많으면 판단력이 좀 흐려져서 떼를 쓰기도 하고 자기 뜻대로만 하려고 해서 이런 말이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었을 때 자칫하면 이삭처럼 욕심이나 고집, 인간적인 동기로 인해 실수하기 쉽기에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특별히 영적으로도 판단력이 약해지고 둔해 질 수 있기에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이삭도 나이 들어 영적 판단력이 더 약해지고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의 자손 야곱이 아닌 육신적인 장자 에서에게 더 집착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에 연세 드신 분들은 물론이고 젊은 분들도 늘 이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나이 들어 판단력이 흐려지거나 실수하지 않도록 맑은 정신을 허락해 주시고, 마지막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이 맑은 정신으로 찬송하고 말씀 보고 기도하다가 가게 하옵소서." 하고 말입니다. 신명기 34:7에 보면 모세가 죽을 때 나이가 120세나 되었지만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모세와 같은 강건함을 주셔서 자녀들 위해 맘껏 축복하고 마지막까지 기도하다가 주 앞에 서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모자 공모 축복 탈취사건

그런데 이 아버지와 맏아들의 대화를 엿들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어머니 리브가였습니다. 에서가 아버지 말을 듣고 사냥하러 나간 사이 어머니 리브가는 자기가 편애하는 아들 야곱을 불러 자신이 생각해 낸 계략을 일러줍니다. 맏아들보다 더 사랑하는 둘째아들이 장자의 축복을 받기 원한 어머니는 우선 염소의 좋은 새끼를 잡아오면 그것으로 아버지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주겠다고 말합니다. 평상시 남편의 식성을 잘 알았고 염소 새끼는 야생 동물의 맛과 거의 비슷하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그러나 이 그럴듯한 계략에도 불구하고 신중한 성격의 야곱은 걱정스럽게 이야기합니다. "어머니, 별미는 둘째 치고 형은 털이 많은 사람이고 나는 피부가 매끈매끈한데 아버지가 만약 나를 만져본다면 금세 들키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아버지는 진노해서 축복은커녕 저주를 내릴 겁니다." 당연하지요. 얼마든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걱정 말아라. 그런 일이 생기면 저주는 내가 다 받을 테니 말이다." 자식이 아프면 내가 대신 아프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이듯 리브가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 모든 저주는 자기가 대신 덮어쓰더라도 좋다고 말합니다.

이제 14절부터 보십시오. 리브가는 야곱이 잡아온 염소를 가지고 남편이 즐기는 별미를 만들고 야곱에게는 맏아들 에서의 가장 좋은 옷을 입힙니다. 눈이 잘 안 보이면 후각이 발달하기 때문에 에서의 체취가 배어있는 옷을 입힌 것이지요. 또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야곱의 매끈매끈한 손과 목을 감싸 눈이 어두운 대신 촉감이 발달한 남편이 야곱을 에서로 착각하도록 합니다. 이 과정을 보면 아주 치밀한 계획으로 늙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이려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모자의 계획대로 잘 되겠습니까? 그 다음 이야기를 보지요. 야곱은 어머니가 해준 별미 요리를 들고 염소 털로 손과 목을 감싸고 아버지에게 들어가 이 별미 드시고 나를 마음껏 축복해달라고 요청하는데 아버지 이삭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나 봅니다. 쉽게 믿지를 않습니다. "너 어떻게 이렇게 짐승을 빨리 잡았느냐?" 야곱은 둘러댑니다.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의심 많은 아버지는 또 한 번 아들을 시험합니다. "아들아, 내게 가까이 와라. 내가 너를 만져봐야겠다." 여기까지는 리브가도 예측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예상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이삭이 야곱의 목소리를 의심한 것입니다. "참 이상하구나. 목소리는 분명히 야곱인데 손은 에서의 손이로구나." 하지만 이삭은 미심쩍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귀로 듣는 목소리보다는 자신이 만지는 야곱의 손의 털을 더 믿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늙어서 눈이 어두워졌으니 당연히 귀도 어두워졌을 터이고 이런 경우 눈이나 귀보다는 자신의 초감을 훨씬 더 신뢰하게 마련입니다. 최근 맹인들이 안마사 자격에 대해 시위를 벌이고 있는데 맹인들이 안마사를 잘 할 수 있는 것은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감이 훨씬 더 발달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삭도 자신의 어두운 눈이나 귀보다 촉감을 훨씬 더 신뢰했고, 또 27절에 보면 에서의 옷에서 나는 체취 를 맡고 자신의 후각을 신뢰해 약간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야곱을 장자 에서로 알고 축복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삭은 야곱이 가져다 준 별미를 더욱 신뢰합니다. 25절을 보세요. 이삭은 야곱이 가져온 염소 고기를 에서가 가져온 별미인 줄 알고 맛있게 먹습니다. 여러분, 이삭은 자신의 촉감이나 후각, 미각을 의지한 사람입니다. 별미를 지나치게 좋아하고 자신의 감각을 신뢰한 나머지 명백하게 잘못된 판단을 하고 맏아들 에서에게 돌아가야 할 축복을 야곱에게 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의 감각을 지나치게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이 가진 감각, 흔히 5감이라고 하는 시각, 후각, 청각, 미각, 그리고 촉감 이 다섯 가지를 통해 인간은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판단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5감을 통해 느껴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불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져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듭니다만 이것만으로는 절대 판단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특히 이런 방법으로 인간의 성격이나 인격을 절대 알 수 없고 더욱이 영적인 부분은 더 알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감각적인 느낌만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한 순간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맛보고 손으로 만져보는 오감의 말초적, 육신적 쾌락 만족에 모든 것을 걸곤 합니다. 이삭도 미각과 촉감과 후각에 의존해 축복의 대상을 잘못 택했고, 야곱은 한 때 예쁜 여자 라헬을 얻으려고 그토록 애를 썼습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보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해서 먹습니다(창 3:6). 다윗은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음욕에 빠져 간음죄를 짓습니다(삼하 11:2). 이렇게 오감에 의지하는 사람은 그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유혹으로 인해 죄를 지을 때가 많습니다. 실제로 죄의 대부분은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져보는 것을 통해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에 의존하는 사람은 말년의 이삭처럼, 에서처럼 육적인 안목에 의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원한 영적인 세계와 가치관이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육적인 감각에 의지하지 말고, 세상적인 것에 가치를 두지 말고 영원한 영적인 세계와 그 가치를 깨닫기 바랍니다.

참된 복이란 무엇인가

28절부터 보면 이삭이 야곱에게 속아서 준 축복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물질적인 축복 뿐 아니라 만민과 열국을 다스리고 형제들을 다스리는 장자의 특권입니다. 물론 본래는 형 에서가 받을 축복이었지요. 그래서 그 다음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들에서 사냥한 별미를 만들어가지고 에서가 뒤늦게 나타난 것입니다. "너는 누구냐?"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입니다." "그러면 방금 전에 별미를 만들어 온 것은 누구냐? 나는 이미 그에게 모든 축복을 다 주었다." 에서는 방성대곡, 울부짖으면서 아버지에게 간청합니다. "아버지, 내게도 축복해 주십시오. 그 놈 이름이 야곱, 즉 사기꾼인 것처럼 그 간교한 놈이 나를 속인 것이 벌써 두 번째입니다. 전에는 팥죽 한 그릇에 내 장자의 명분을 빼앗더니 이제는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까지 빼앗고 말았습니다." 결국 에서는 아버지에게 남은 복이라도 달라고 간청합니다(36절).

우리는 여기서 에서가 잘못된 축복관을 가진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잘못된 축복관을 가지고 있으니 결국 복을 못 받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첫째, 에서는 남은 복이라도 달라고 간청하지만 세상에 남은 복이란 없습니다. 물론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께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라도 달라고 해서 딸이 치유를 받지만 말이 그렇지 정말 부스러기 복이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겸손하고 재치 넘치는 대답에 감동해서 '부스러기 복'이 아니라 복덩이 그 자체를 선물로 주십니다. 여러분은 남은 복 조금 나누어 받을 생각 마시고, 내 부모나 배우자가 받은 복, 남이 받은 복 옆에서 덩달아 받을 생각일랑 아예 마시고 내가 복의 주인공이 되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복 받은 인생이 되기 바랍니다. 둘째, 에서는 복 받는 일에 한 발 늦었습니다. 자기가 받을 복은 이미 동생이 가져간 후입니다. 복 받는 데에도 분명히 때와 순서가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주실 때 놓치지 말아야 하며 복 받는 일에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제일 먼저 가야 합니다. 늦으면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셋째,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복을 좋아해서 복이라면 뭐든지 다 좋다고 생각합니다. 에서도 38절에 보면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라며 복을 달라고 조르는데 세상 사람들 중에도 복이라면 뭐든지 좋다고, 어디 복이 하나뿐이겠냐고 생각하며 무조건 복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에서의 이 말은 "어디 복이 하나뿐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주는 복만 복이겠습니까? 복이라면 뭐든지 좋으니 받기만 하면 됩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복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복을 주실 수 있지 복이라면 무조건 좋다며 부처님도 복주고 신령님도 복 주고, 이 세상의 복도 다 좋다는 식의 에서 같은 태도를 가지다면 참된 복을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억울해서 소리 높여 우는 에서에게 아버지 이삭이 줄 수 있는 것은 39절부터 나온 대로 축복이 아닌 저주뿐이었습니다.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이 말은 에서가 기름진 땅이나 식물을 자라게 하는 이슬조차도 떠난 장소에서 살 것, 즉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척박한 땅에 살면서 칼을 믿고 사는 생활, 즉 약탈이나 해서 먹고 살다가 결국은 아우의 민족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뜻이지요. 결국 좌절감과 분노를 이기지 못한 에서는 아우 야곱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이를 눈치 챈 리브가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며칠 동안만 하란에 있는 외삼촌에게 피해 있으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이 며칠이 결국 20년의 세월이 되었고 20년 후 야곱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어머니 리브가가 세상을 떠난 후였던 것입니다. 어머니와 둘째 아들이 합작한 이 축복 탈취사건은 결국 불행한 가정사로 끝을 맺고 맙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 가정의 불행한 운명도 하나님은 축복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 내용은 다음 주에 나눌 것입니다만 하나님은 뜻하신 바가 있으면 모든 운명과 미래를 바꾸어 놓는 분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사건은 겉으로만 보면 어머니와 둘째 아들이 합작한 사기사건입니다. 그 결과 한 가정이 풍비박산 났기 때문에 그 책임은 리브가와 야곱 모자에게 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핵심을 들여다보면 결코 그 책임을 어머니와 둘째 아들에게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리브가는 자기가 편애하는 둘째 아들에게 복을 주려는 욕심만으로 이 엄청난 일을 벌인 것이 아닙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그녀는 태중에 쌍둥이가 있을 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장자의 축복을 주실 대상은 육적인 혈통을 따른 맏아들이 아닌 둘째 아들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리브가는 육적인 안목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영적인 안목과 비전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녀에게 공부 잘 해라, 뭐 잘 해라 요구하기 전에 부모가 먼저 내 자녀에 대한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부모가 비전이 없으면 자녀도 비전이 있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 리브가처럼 하나님이 내 자녀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영적인 안목과 비전을 가진 어머니와 달리 육적인 안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아버지 이삭과 맏아들 에서가 어쩌면 이 사건의 실제적인 원인 제공자가 아닐까요?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단순한 사기사건만 보지 말고 우리의 안목을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 안목이 우리 자신의 미래뿐 아니라 우리 자녀와 가문의 미래, 나아가 우리 주변 모든 사람의 미래와 복된 삶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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