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함 얻지 못할 죄 (마 12:22-37)

  • 잡초 잡초
  • 451
  • 0

첨부 1


미국에는 사형제도가 폐지된 주들이 있는데, 그런 주에서는 최고의 극악 범죄에 대해서는 100년, 150년 등 평생을 살아도 다 못치를 장기복역을 언도합니다.
  그리고 그런 장기형의 선고에는 '가석방될 수 없는 조건하에'(with no possibility of parole)라는 문구가 첨가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아무리 긴 형을 언도받아도 경우에 따라서 모범수 특사 내지 감형의 가망성은 남아 있기 마련이고 그것만이 장기 복역수들의 유일한 희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처럼 '가석방 불가' 조건 하에 내려진 형기는 그런 희망조차 완전히 없애는 것으로서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최악의 죄인에게 적용시키는 벌인 것입니다.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란 그처럼 인간 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 속에서도 발견됩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에서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예수님께서 두 번이나 반복하시며 단언하고 계시는 죄입니다.
  이것은 언뜻 우리에게 일말의 의문을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 공로에 의지하여 회개만 하면 그 어떤 죄라도 다 용서받을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고 말씀하시니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도, 그 귀하신 십자가 대속의 힘으로도 사죄 불가능한 죄라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는 오늘 이 '사함 얻지 못할 죄'에 대하여 우리 주님께서 명백하게 가르치시고 경고하시는 말씀을 함께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 사함 얻지 못할 죄에 빠지게 되는 출발점은 곧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경시'하는 태도입니다.

  본문에서 나타난 바리새인들의 태도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우선 22절에서 24절 말씀에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셨을 때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무리들은 이를 보고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고, 즉 '이 예수님이 곧 우리가 기다리던 구세주가 아니냐?'라는 기대에 찬 질문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그에 비해 바리새인들은 "이 예수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저 자신이 귀신하고 한 통속이니까 그렇지. 귀신의 왕하고 줄이 닿아 있지 않다면 무슨 재주로 귀신을 쫓아내겠나"라고 코웃음을 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구원 능력을 그저 하찮은 귀신놀음에 불과하다고 냉소에 부쳤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에 대하여 세 가지로 즉시 반박하셨는데, 25절부터 29절까지를 보면 "예수께서 저희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25절과 26절의 말씀은 "만일 내가 귀신하고 짜서 다른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면 귀신의 집안싸움이라는 말인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세상에는 귀신이 벌써 다 없어졌을 것이다. 세상의 어느 국가이든지 사회이든지 혹은 한 집안에 이르기까지 내부분열 상태에서 제대로 유지되는 경우를 너희들이 보았느냐. 하지만 아직도 세상에 귀신이 존재하고 있지 않느냐?"는 논리입니다.
  둘째 응수는 27절에 기록된 대로 "너희 아들들" 즉 바리새인들의 제자들 중에서도 때로는 귀신 쫓아내는 신유를 행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렇다면 바리새인 자신들도 역시 바알세불 편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역공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명백한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믿으려고도 하지 않는 그들의 태도를 책망하고 계십니다.
  29절의 "사람"이란 예수님 자신을, "강한 자"란 사단을, "세간"이란 귀신들렸던 영혼들을 비유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강한 사단을 오히려 "결박하고" 그에게 빼앗겼던 영혼들을 "늑탈하여" 해방시켜 주실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역사되는 하나님의 능력이 사단보다 강함을 분명히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예수님의 신유 능력은 간단히 생각해도 "성령에 힘입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며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대표적인 표징임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가리켜 귀신장난이라고 일소에 부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에서 보여준 그런 자세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 아예 습관으로 굳어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무려 3년 동안이나 온 유대에 파다하게 펴져 있었고 자주 자기네들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을 수도 있었던 하나님의 구원 역사들을 대하면서도, 조금이라도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아니하고 늘 색안경 끼고서 경시하며 선입견을 가지고 멸시하는 버릇을 끝내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의 고질적인 악습은 결국 그들로 하여금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로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가는 출발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곳곳에서 시시각각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제까지 도무지 사람 같지 않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하루아침에 그 인격이 변화되는 것을 봅니다.
  사형 언도을 받고 죽을 날만 남았으면서도 조금도 뉘우칠 줄 모르던 극악범들이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오히려 감방의 동료 죄수들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전도하는 경우도 자주 듣게 됩니다.
  그렇게 부자도 아닌 사람들이 몇이 모여도 온 정성을 다해 교회를 짓고 선교사업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치는 일 정도는 오히려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믿는 성도의 눈에는 틀림없는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일 따름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역사하지 아니하시고서는 사람의 마음에 이런 변화를 일으켜 낼 수가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성령에 힘입은' 기적들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한' 생생한 증거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명백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하찮게 여기고 코웃음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갑자기 예수님 열심히 믿게 된 사람을 보면 "옛날에는 멀쩡했는데 이제는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하고, 무슨 귀신들린 사람 취급을 합니다.
  그처럼 마지막 순간에 변화된 사형수의 이야기를 들으면 "죽을 때가 되니까 심리적으로 겁이 나서 믿는 것이지 그게 무슨 진심일까?"라고 조소에 부칩니다.
  교회 짓는 성도들의 정성과 충성이 어떻게 생기는 것인지는 전혀 모르면서 "교회 건물이 쓸데없이 화려하다."는 따위의 비판만 해대는 것입니다.

  실제로 불신사회에서는 누가 다른 사람을 조금만 변화시킬 수 있어도 아주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무슨 심리학자나 상담자들이 문제 있는 사람에게 조언을 해 주고 약간의 변화의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만 해도 실로 대단한 일이고 훌륭한 성과인 것으로 여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영혼이 완전히 새사람으로 변화되는 이 놀라운 역사를 두고서는 그처럼 하찮게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제 눈으로 보면서도 그것을 경시하는 무서운 악습이며, 그것이야말로 종내 가서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에 빠지게 되는 출발점이 됩니다.
  교회를 우습게보고 성경에 계시된 복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경시하는 태도이며 그것은 정말 악습도 보통 나쁜 악습이 아님을 깨닫고,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완벽하게 계시되었으며 바로 그 복음으로 변화 받은 영혼들을 통하여 '구원의 능력'은 충분하게 증거되었음을 깨닫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사함 얻지 못할 죄의 정의는 곧 '예수님을 구주로 믿도록 도와주시는 성령의 사역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30절로 32절의 말씀에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훼방"이란 말은 '방해'가 아니라 '신성모독(神聖冒瀆)'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훼방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자면 성령이 하시는 일을 거부함으로써 성령을 모독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 중에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예수님을 믿도록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의 말씀을 이해해야만이 그 뜻이 분명해집니다.

  30절은 바로 그런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예수님을 믿는 것과 그 성령을 끝까지 거부하며 불순종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중립적인 자세가 있을 수 없음을 명백히 밝혀주시는 말씀입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흩어버리는) 자"라는 말씀은 바꾸어 말하자면 사람은 예수님 편이 아니면 마귀 편 이 둘 중의 하나 밖에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가리켜 예수는 믿지 않지만 그렇다고 마귀 편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정의에 따르면 오직 마귀 편일 따름인 것입니다.

  31절의 "말로 인자를 거역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고 입으로 거부하는 경우인데 그런 죄까지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일단 나중에 가서라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이전에 우리의 입술로 예수님을 거역했던 죄들은 다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언제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지난날에 지었던 "사람의 모든 죄"는 물론이고 "훼방까지도 사하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성령을 거역하는 죄" 즉 그 심령이 끝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마귀 편에 서 있으면 그 사람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용서받을 길이 없는 것이 자명합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역을 끝까지 모독하고 그처럼 교회와 성도를 흩어버리려 하는 마귀 편에 서 있는 사람에게 임한 심판이 어떠한 것이 될 것인지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거부한다는 것이 본인 생각에는 그리 큰 잘못이 아니라고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대부분의 불신자들이 '나는 예수를 믿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나쁜 짓하는 악인은 아니다.'라고 자부하고 삽니다.
  '나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신자 못지않게 착한 일은 오히려 많이 하고 산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아주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 "너는 이 편도 저 편도 아닌 중립적 입장을 평화스럽게 잘 유지하고 있다."라는 따위로 인정해주지 않으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사람이 저지르고 있는 죄야말로 곧 '성령을 훼방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자기도 예외가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죄인'일 뿐이며 오늘도 어찌하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사람의 영혼 속에서 역사하시는 이 성령을 끝까지 거부하고 있는 실로 무서운 신성모독의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아무리 자기는 기독교를 비판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도하지 아니하는 자는 아무리 자기가 기독교의 전도의 자유를 반대는 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판결에 따르면 그는 곧 '헤치는 자' 즉 모이는 것을 방해하는 자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결국 마귀와 함께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할 뿐인 것입니다.

  죄수가 가석방 허가를 받고자 할 때 필수조건은 바로 자기 범죄를 인정하고 참회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석방 위원회 앞에서 '나는 당신네들 도움 필요 없다.'고 코웃음치고 건방지게 구는 죄수가 만약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 남아 있는 일이란 평생토록 감옥에서 썩다가 죽는 일밖에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도우심을 끝내 거부하는 자는 영원히 지옥 고통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무슨 죄, 그 어떤 악한 죄를 지어도 반드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믿게 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결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저지르는 최악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일에 대해서는 아무리 양심적으로 살고 선하게 산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바람에 끝내 용서 받지 못할 죄에 빠지지 말고, 먼저 이 예수님을 나의 모든 죄를 사해주실 '구세주'로, 바로 나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하여 화육강생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이미 용서 받고 '저 세상'에는 무죄한 의인으로 영접해주심을 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사함 얻지 못할 죄에 대한 판결은 '각자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심령의 신앙고백'에 달려 있습니다.

  본문 33절로 3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사람이 자기가 함부로 한 "무익한 말"로 인하여 정죄함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조금 의외의 말씀처럼 들릴 것입니다.
  말 한 마디 잘못했다고 심판까지 당하게 된다는 것은 너무 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그 말이 바로 그 본인의 심령과 생활 상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33절의 나무와 실과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설명해주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나무가 좋으면 실과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실과도 나빠질 수밖에 없듯이, 사람의 본성에 악한 것이 있으면 당연히 악한 말이 나오게 되고 사람의 삶에 선한 것이 있으면 선한 말도 자연히 따라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 '악한 말' 때문에 결국 심판과 정죄에 이르게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그 말을 하게 한 그의 '악한 마음' 때문이며, 그런 악한 마음은 바로 "그 쌓은 악" 즉 '악한 행위'와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두고 귀신놀음이라고 함부로 말한 것은 단순한 '말의 실수'의 차원을 넘어서 그들의 "마음에 가득한 악"과 그들의 행위를 통해 "쌓은 악"을 여지없이 반영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기를 끝까지 거부하는 그 악한 마음은 이미 그들의 모은 언행을 악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악하고 무익한 말들은 그처럼 그들의 인생에 '가득히 쌓인 악' 중에서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던 것인 까닭에, 결국 그들에게는 "심판날의 심문과 정죄" 밖에 남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실로 중요한 경종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의 길에 들어서 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 사람의 입으로 나오는 말에 달려 있습니다.
  자신이 정말 예수를 믿고 있는지 믿지 않는지 그 심령 상태를 바로 지금 내 입으로 어떤 말들이 나오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스스로 진단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나 자신의 입술에서 과연 어떤 말들이 잘 나오고 있습니까?
  교회에 대한 불평이 하구한날 나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목사와 성도에 대한 비난이 내 입버릇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말들만 내 입에서 술술 잘 나오면 정말 내 교회에 문제가 있고 내 이웃 성도에게 문제가 있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먼저 내 심령에 큰 문제가 있는 것 아닌지 이것부터 잘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내 말이 좋지 않은 것이 혹 내 불신앙 때문이 아닌가?'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내 말이 주변 교인들에게 덕스럽지 못하고 교회 앞에 은혜롭지 못하다는 사실은 바로 내가 혹 실제로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고 그래서 그 믿음에 다른 행위의 열매도 전혀 없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정말 겸손하게 한 번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분명히 밝히신 그대로, 사람은 그의 심령 상태와 자신이 평소에 하는 행위에 따라서 말이 나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판날에는 그 말 때문에, 아니 그 말의 원인이 된 그 심령의 불신앙, 혹은 신행일치를 나타내지 못한 그 거짓 신앙고백 때문에 '결코 용서받지 못할 자리'에 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예수님 믿는 성도의 입에서는 늘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나와야 마땅합니다.
  신자의 입에서는 무슨 일을 당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말이 먼저 나와야 합니다.
  아니 그전에 무엇보다도 우리의 입술에서는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는 신앙고백부터가 나와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이야말로, 그 고백을 진짜로 인쳐주는 신행일치의 삶에 근거한 그 진심의 한 마디야말로 예수님께서 심판날에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고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근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세례 받을 때 "나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나의 구주로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한 마디는 보통 말이 아닙니다.
  그 한 마디를 진실하게 고백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전 생명이 다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입으로 신앙고백한 교인들 중에도 그에 따른 합당한 열매가 없는 사람은 그 신앙고백 자체가 거짓말인 까닭에 절대로 구원 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입으로 시인하는 것조차 없는 사람이라면 백이면 백 다 구원 받지 못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자' 곧 거룩한 공회에서 신앙고백하고 세상을 향하여 전도하는 신자가 됨으로써 재림하실 주님으로부터 '하나님 앞에서 시인함을 받는 자' 곧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 얻는 반열에 들어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저나 여러분에게나 참으로 부끄러운 죄가 많지 않습니까?
  도저히 남에게 말할 수도 없는 정말 창피스러운 죄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사죄의 구세주'로 확실히 믿기만 하면 그 모든 죄와 훼방까지 다 깨끗이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실로 다행한 일이며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예수님 아니었더라면 저와 여러분의 그 말 못할 모든 부끄러운 죄들을 도대체 어떻게 처리할 길이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반면에 혹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스스로 그다지 큰 죄를 짓고 있지는 않다고 자부하는 가운데 정말로 심각한 죄를 짓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주변에서 오늘도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간과하고 경시함으로써 나 자신이 성령을 훼방하고 있지는 않은지 겸손히 돌이켜 보시기를 바랍니다.
  내 입으로 어떤 말이 나오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내 심령과 내 삶이 실제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솔직히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분명히 용서 받을 수 있는 죄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도 절대로 용서 받지 못할 죄에 대해서는 오히려 아주 관대한, 기가 막히는 목사들이 이 지상교회에 수두룩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가운데서 어쩔 수없이 저지르게 되는 자범죄와 아예 예수를 믿지도 않는 죄 - 정말 예수님 따르고 성경대로 선포하는 목사라면 이 둘 중에 과연 어느 쪽을 더 강력하게 비판해야 마땅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십자가 구원도, 천당도 믿지 않는 교회들을 두고서는 '보수교단이 진보교단과 화해하고 통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그런 이단교회들과 하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목사나 교회에 대해서는 교파 분열주의자라고 비난의 화살을 쏟아 붓는, 참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높이는 목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그런 목사일수록 이 시대의 기독교계에서 크게 높임을 받고 불신사회로부터도 인정받는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목사들은 그야말로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는"(롬 10:3) 자들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사람의 모든 죄"는 물론이요 하나님을 "훼방"한 신성모독의 죄를 저질렀다 할지라도 다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조금 감형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깨끗이 사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분명한 약속인데, 왜 그렇게들 믿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신자라는 사람들까지, 때로는 목사들까지도 이런 고맙고 은혜롭기 짝이 없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까?
  너무 좋아서 믿지 못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의'를 일부러 '힘써 복종치 아니하는' 이상한 아집 때문입니까?

  여러분은 예수 십자가의 무한한 대속의 능력을 그렇게 함부로 과소평가해서는 아니 됩니다.
  날 위해 공짜로 흘려주신 그 놀라운 보혈의 은총을 그렇게 제멋대로 경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사람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극악한 죄이며 그 죄만이 유일하게 결코 사함 얻지 못할 죄임을 깨닫고, 오늘도 어찌하든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믿도록 돕고 계시는 성령의 능력을 힘 입어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성도들이 꼭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