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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내산에서 (출 19: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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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산악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 ‘고상돈’이란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한국 산악역사에 기념비적 업적을 남긴 인물로서 산에서 태어나 산에서 살다 끝내 산에서 뼈를 묻은 ‘산사나이’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특히 그는 1977년 9월 15일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에베레스트산 등정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한국은 1971년부터 시작된 정상 원정에서 무려 6년에 걸친 도전 끝에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세계에서 8번째로 산을 정복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는 1979년 북아메리카 최고봉인 매킨리산 원정대에 참가하여 등정에는 성공했으나 하산하다가 자일 사고로 추락하여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산을 오르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늘 같은 질문을 한다고 합니다. ‘왜 산에 오릅니까?’ 왜 산에 오르는 것일까요? 평범한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 휴가를 즐기기 위해 산을 찾지만 그들에게는 산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고상돈씨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뒤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여기는 정상,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다” 조지 말로니라는 사람은 왜 산에 오르느냐 라는 질문에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탈리아의 어떤 산악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망 때문에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다 산이 얼마나 험악하고 가혹한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는 사람에게 있어서 산은 그들의 인생이고, 전부였습니다. 그들은 인생을 산에서 배웠습니다. 산은 인생을 깨닫게 하는 귀한 현장입니다. 산악인에게 산이 인생이라면, 우리에게 있어서 산은 신앙을 배우는 현장입니다. 우리는 말씀 속에서만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 산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고 배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산을 더욱 유심히 보아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지난주에 이어 오늘 성경에서 두 번째로 언급되어 있는 시내산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시내산은 어떤 곳일까요? 시내산에서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성경을 보면서 시내산하면 무엇이 가장 떠올라야 할까요?

  우선, 축복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 속에 있었던 일입니다. 애굽을 탈출하고, 홍해를 건너고, 광야 길로 들어가서 광야의 한복판인 시내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곳에 장막을 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준엄한 뜻을 전하기 위해 모세를 시내산으로 올라오라고 부르셨습니다. 모세는 이곳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와 대면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이런 말씀이 배경이 되는 본문은 19장부터 20장까지 이어집니다. 그래서 오늘 전부를 읽지 않았지만 오늘 말씀은 19장과 20장까지 연결해서 보아야 합니다. 이 가운데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또한 백성에게 전하려는 하나님의 의도와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19장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절부터 6절까지가 첫 번째 부분이고, 7절부터 15절까지가 두 번째이고, 본문으로 읽은 16절부터 25절까지, 아니 20장까지 연결된 것이 세 번째 부분입니다. 그 중에서 첫 번째 부분에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놓고 축복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이스라엘을 사랑하는지, 그래서 그들에게 얼마나 큰 은혜와 축복으로 이끌었는지를 분명히 알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와 같이 이끄셨고 세계와 열국 중에 으뜸 되는 나라로 만드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가 되고, 그들은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축복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선택하고 인도하여 큰 민족으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시내산은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현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변함없는 은총으로 당대와 후대에 임할 것을 확인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시내산 하면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떠올라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은 우선적인 것이 바로 축복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시며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그를 축복의 근원으로 삼으셨고 복 덩어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축복하셔서 세계와 열방에 으뜸 되는 민족으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인간을 향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인 의도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형상으로 만드신 인간을 이처럼 사랑하여 은혜와 축복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오늘 이런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시내산을 생각하면서 거기에서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축복과 언약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요,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오늘 우리에게도 복을 주십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구약의 역사에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에서 말씀하시는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축복과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예수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만큼 우리를 축복해 주시는 분이 없고, 예수님처럼 우리에게 힘이 되는 존재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아침에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다시 새겨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택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그들을 애굽의 압제와 고통에서 해방시키신 분이 누구입니까? 홍해와 같은 난관을 기적적으로 건너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먹을 것이 없는 광야의 생활에서 만나를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반석에서 물을 내신 이가 누구십니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 앞서 이끄신 분이 누구십니까? 그들을 궁극적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분이 누구십니까? 나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신 분이 누구십니까? 나를 책임지시고 도우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지치고 힘들 때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위로자가 누구십니까? 내 인생의 크고 작은 문제로 고민할 때 그 문제를 해결할 자가 누구이십니까? 내가 곁길로 갈 때 나를 바른 길로 가게 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지금도 내 곁에서 영원토록 나와 동행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내 인생과 삶에 주인이 누구십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내 인생에 깊이 관여하여 나를 사랑하고 축복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복 주시는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과 더불어 복을 받고, 날마다 힘과 용기를 가지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성결입니다. 두 번째 단락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성결’입니다. 스스로 성결케 하라는 것입니다. 14절에서는 구체적으로 백성들이 어떻게 성결하게 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옷을 빨고, 기다리고,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22절에서도 하나님 앞에서의 성결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만약 성결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돌격할지도 모른다는 아주 의미 있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이 성결 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내산의 사건입니다. 시내산은 축복만 선포된 현장이 아닙니다. 그곳은 성결이 요구된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내산 하면 축복의 선포와 함께 성결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이 시대를 하는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임을 깊이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성결’이란 ‘거룩하고 깨끗함’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때, 하나님 앞에서 설 때,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으로 세상을 살 때, 거룩하고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많이 부족하지만 우리는 늘 거룩하고 깨끗한 성결을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살기를 위해 몸부림치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이요, 하나님이 더럽지 않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어둡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깨끗하시고, 빛이십니다. 빛과 어두움은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빛이시기에 우리가 빛이어야 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이 한참 진행될 때 영국의 개혁을 주도한 사람들을 ‘청교도’라로 부릅니다. 이들은 영국 속에 남아 있는 타락한 천주교의 요소를 철저히 벗겨버릴 것을 주장하다가 박해를 받고 여러 곳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들 중에 한 부류가 ‘메이 플라워’라는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와 오늘 미국을 건설한 초창기 멤버가 된 것입니다. 청교도를 영어로 ‘puritan, 퓨리탄’이라고 부릅니다. 이 퓨리탄은 ‘purity'에서 나온 말로서, 이 말의 뜻은 성결, 깨끗함, 거룩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퓨리탄, 청교도들은 타락한 천주교와 세상을 보면서 스스로 성결하기를 다짐했던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캄캄하여 어둠 속으로 깊이 들어가도, 세상에 남아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한줄기의 빛이 되어 어두운 세상을 밝혀야 한다는 것을 신앙과 삶의 목표로 삼고 평생을 헌신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헌신적인 수고와 땀으로 오늘의 프로테스탄트, 개신교가 만들어졌고, 청교도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나라 미국을 세웠던 것입니다. 지금도 세계역사에는 청교도와 청교도정신이라는 것이 깊이 새겨질 만큼 그들은 잘 믿은 사람들입니다. 그 정신을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시대의 퓨리탄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부족하지만 정신은 잃어버려서는 안되고, 늘 성결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거룩, 성결을 요구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담고, 이 시대에 퓨리탄으로서, 특히 한국의 퓨리탄이 되기를 다짐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계명입니다. 시내산 사건의 세 번째 단락인 본문의 말씀과 20장으로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전하려는 가장 중요한 의도는 바로 율법이요, 계명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 유명한 십계명이 돌판에 새겨지는 말씀으로 이어지는 것을 봅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받은 계명은 십계명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받은 십계명을 포함한 모든 계명을 다 받은 것입니다. 그들이 받은 계명을 율법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받은 율법은 적어도 600가지가 넘습니다. 이렇게 많은 계명과 율법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사회법으로서 그들이 당시 삶의 규범과 규례가 된 법입니다. 또 하나는 의식법으로서 제사와 신앙에 대한 규례를 자세하게 강조한 법입니다. 특히 이것에 대한 말씀이 레위기에 집중적으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도덕법으로서 이것은 사회법이나 의식법을 넘어 보통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포함한 계명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율법의 마침과 완성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율법을 문자그대로 지키지 않습니다. 율법에는 정신과 실제가 있습니다. 사회법이나 의식법은 이제 정신만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도덕법은 정신과 실제가 다 남아 있는 법으로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방향과 목표가 되는 법입니다. 이제 주님으로부터 자유하게 된 우리에게는 율법과 계명이 더 이상 우리를 옭아매진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물론 옛 율법에 비하면 동기와 원인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도 계명을 지킵니다. 계명에 대하여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6)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이것이 계명과 율법을 받은 우리에게 주시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우리가 계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여기 이 나라에서 지켜야 할 헌법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헌법을 지키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계명도 지켜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계명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주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실제 행동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나에게 주신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결국 계명을 지키는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런 자를 더욱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더 큰사랑을 받는 길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사랑을 받는 길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놀라운 축복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면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 자들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신실히 믿고 그 계명을 잘 지키면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까지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한 예를 아주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복 받는 길, 우리 후대가 복 받는 길은 계명을 지키는 길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길이요, 성경이 제시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길을 향해 묵묵히 걸어야 합니다.

  축복, 성결, 그리고 계명, 이것이 시내산 하면 가장 떠오르는 중요한 단어들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현장으로 등장하는 시내산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이 귀한 교훈을 마음에 새기시고 축복과 성결과 계명의 길을 향해 이번 한 주간도 힘차게 출발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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