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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삭개오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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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시에 여리고는 팔레스틴에서 가장 부유한 성읍이었습니다. 여리고는 종려의 성읍이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종려나무가 많았고, 발삼 향의 원료가 되는 발삼향나무 숲으로 유명했습니다. 여리고 주민들은 종려나무 곧 대추야자의 열매와 발삼향유를 세계 시장에 내다 팔았으며, 또한 사해에서 나는 소금과 역청과 유황도 거래해서 부유한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또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거나 요단강 저편으로 나가는 길목에 있었으므로 자연히 많은 사람이 통행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여리고는 팔레스틴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납부하는 성읍에 속했고, 자연히 큰 세관이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이 여리고 세관의 세리장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의례 과다한 세금을 징수해서 그 중 일부를 착복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삭개오는 말단 세리가 아니요 세리장이었으니 부정한 재물을 많이 착복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동족을 착취하는 죄인이요 로마의 앞잡이로 여기고 멀리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부자였으나 항상 고독했습니다.

그 날, 삭개오는 나사렛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을 멀리하지 않으시고 영접하신다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한번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저 앞에서 많은 사람에게 에워싸인 채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단번에 그 분이 나사렛 예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삭개오는 키가 작았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방향으로 앞질러 달려가서 길가에 있는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비록 백성들의 존경을 받지는 못하지만 명색이 세리장입니다. 여리고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삭개오는 체면 때문에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뵙고 싶었으면 그렇게 했을까요? 아마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 앉아서 점점 가까이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시고 나무 위를 우러러 보시며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이름을 아시고 불러주실 뿐 아니라 그의 집에 머무시겠다고 하시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기쁨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많은 사람이 이 같은 예수님을 보고 수군거리기를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고 했습니다.

그 날,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전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 저는 삭개오의 회심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살펴봄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신 분이십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아 나왔으나 감히 예수님을 만나 뵐 엄두를 내지 못하고 다만 나무 위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삭개오가 올라간 뽕나무를 무심코 지나치지 않으시고 그 나무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시고 친히 “삭개오야” 하시며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으며,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는 사람들의 비난을 개의치 않으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얼마나 자비하신 주님이십니까! 그러나 우리의 보기에는 놀랍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러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죄인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세리들을 죄인 시 해서 상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세리를 사귀는 사람은 세리와 같이 죄인 취급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세리들이 오는 것을 영접하셨습니다. 그들이 초대하는 식탁에 앉으셔서 음식을 나누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잃어버린 한 영혼을 귀히 여기시고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심정을 대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잃은 양의 비유가 나옵니다. “4)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5)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인생은 누구나 잃어버린 양과 같습니다. 한번 길 잃은 양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느 외딴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는 양은 제 힘으로 올라올 수 없습니다. 목자가 구해주지 않으면 떨어져 죽거나 맹수의 밥이 되고 말 것입니다. 혹은 길을 잃고 헤매다가 양 도둑을 만나 잡혀갈는지도 모릅니다.

목자는 이런 사정을 너무나 잘 알기에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양을 찾아 나섭니다. 그것도 의무적으로 마지못해 한번 둘러보는 것이 아닙니다. 잃은 양을 찾도록 찾아다닙니다. 찾기까지 쉬지 않고 이 골짜기에서 저 골짜기로 찾아다닙니다. 마태복음 18장에도 똑 같은 비유가 나오는데, 거기 보면 예수님께서 “14)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는 말씀이 덧붙여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긍휼이 한량없으셔서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다 구원 얻기를 원하십니다.

혹 보면 하나님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멸망시키기로 창세전에 작정하셨다”고 합니다. 그 같은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납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며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로 17절에 보니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9)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믿는 우리도 지난 날 삭개오처럼 하나님을 떠난 자요, 잃어버린 양과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방황하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인생들을 향하여 손을 펴시고 돌아오라고 호소하고 계십니다. 이사야서에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 “1)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고 천한 사람으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인들을 불러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구원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 받기 위해 선을 행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물질을 요구하신 적도 없으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는 성경의 일화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백성들이 길이 험하다고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이에 하나님께서 노하셔서 불뱀을 보내어 물게 하시니 많은 사람이 죽어갑니다.

그제야 백성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고 모세에게 와서 호소하기를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이에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았습니다(민 21:).

장대에 매단 놋뱀을 쳐다보는데 무슨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쳐다보기만 하면 됩니다. 불뱀에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 본 것이 그의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공로가 되어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고 하셨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놋뱀이 장대에 높이 달렸듯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받는 것입니다.

한편, 교회에 다니면서도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을 지루하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문밖에 세워둔 채 썩어질 세상 것을 위해서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이와 같은 자들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고 호소하십니다. 우리는 타성에 젖은 신앙인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나태함을 회개하고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자들을 새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본질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삭개오를 보십시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놀랍게 변했습니다. 평생 돈만 알고 살아왔던 사람이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자기 재산의 절반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나머지 재산도 토색한 일을 배상하는데 사용하겠다고 했습니다. 이기주의자가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이타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까? 그렇다면 삭개오처럼 변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으십니까? 예수 믿기 전이나 믿은 후나 생각이나 언행에 아무런 변화가 없고, 여전히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교만하다면,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언뜻 보면, 예수님을 만난 것 같으나 삭개오처럼 진실한 마음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떡을 얻어먹기 위해 따라다닌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에 불과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를 따르던 무리와 주고받으신 대화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셨을 때, 이를 본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자 반기면서 문안 인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찾아온 이유를 아셨습니다. 그들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묻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것은 주님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본질적인 목적은 자기가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구세주이심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메시야의 표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기 위한 기적이 곧 표적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떡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지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고 하셨을 때,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우리가 원하는 것은 떡이지 이 사람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고 하면서 예수님 곁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예수 믿는 목적이 잘못되면 한 때 열심히 주님을 따라 다녔을지라도 언젠가 주님 곁을 떠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는 목적이 잘못된 사람은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녀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진실로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혼의 구주로 믿는 사람은 본질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삭개오처럼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갈릴리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였는데 예수님을 만나 그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자기들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려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았던 여자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귀신들에게서 해방되어 자유 함을 얻었고, 추악한 삶을 청산하고 주님을 따르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 앞에 거룩할 성(聖) 자를 붙여서 성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핍박자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던 그가 예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7)…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빌 3:)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 뿐 아니라, 초대교회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습니다. 아무리 사악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만나면 새 사람이 됩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성도님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 받은 사람들인 줄 믿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과 같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이요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것이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목표가 달라졌습니다. 똑같아 보이는 행동이라도 인생의 목표가 달라진 만큼 이전과는 전혀 다른 행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매끼 식사를 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목적을 갖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살기 위해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먹기 위해 사는 것이나 살기 위해 먹는 것이나 오십보백보에 불과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먹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을 만나 새 사람이 되는 변화를 경험하셨습니까? 삭개오처럼 변화 받은 여러분의 모습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나타내 보이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고백을 들으시고 그에게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아브라함은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입니다.

그러나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이방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10장 11절 이하에 보니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이므로 위대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영예는 그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됨으로써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신 것은 육신의 혈통을 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혈통으로 치자면 삭개오는 날 때부터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비록 동족의 미움을 받는 세리 노릇을 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기를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이 최상의 명예요 특권으로 여겼지만,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혈통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은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믿음이 있어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3장 7절로 9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7)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8)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삭개오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기 때문에 주님께로부터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인정을 받았고 구원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현세적인 복을 받기 위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얻기 위해 믿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 믿지 않는데도 성공 출세하고 부자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반대로, 예수를 잘 믿는데도 출세하지 못하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엄격히 말하면, 현세적인 성공과 실패, 부함과 가난함은 예수 믿는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현세적인 복이 약속되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차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받아 누리는 복은 영적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니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멸망 받을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더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로 7절에 보니 “6)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처럼 구원은 단지 우리가 지옥 형벌을 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을 상속받는 것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구원받은 사람은 삭개오처럼 구원 받은 자답게 변화 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로서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마귀를 따라 살던 자들이었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습니다.

그런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결코 우리의 공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런즉 구원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며 삭개오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화 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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