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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막 5: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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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막 5:21-43)

지난 주간에는 풍성한교회 집중훈련에 참여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교회가 실시하는 제자훈련 과정을 공부하였습니다.  8과의 제목이 “성령의 능력으로 영혼을 살려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치유목회에 대한 많은 것을 공부하면서 환자를 위한 기도에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두통은 사라져라”  “예수 이름과 성령의 권능으로 말한다. 관절의 통증은 사라져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위통을 사라져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근육과 힘줄과 신경줄을 치유되어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합니다. 주님이시여 역사해주옵소서.  주님이시여, 치료해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치유 이적의 사건이 다른 복음서에 비하여 아주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자 마가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마가복음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막1:1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1:1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셨습니다.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하는 핵심적인 의도는 복음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말로 이 마가복음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예수님의 사건을 나열하여 기록하므로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을 통하여 현존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예수님은 과연 누구시냐 하는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복음이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라고 합니다.  본래는 좋은 소식을 전해주어 고맙다고 주는 상(賞)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후대에 오면서 좋은 소식 그 자체를 뜻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 복음이란 말은 구원의 소식, 구원을 선포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이 기록하는 예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소개하는 세례요한이 예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막1:7에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우리 성경에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라고 했는데, 새번역에는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이가 내 뒤에 오십니다.”라고 했습니다.  “더 능력이 있는 이”, “능력이 많으신 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능력이 많으신 정도가 아니라, 능력 그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사탄을 이기시고, 질병을 이기시고, 질고를 물리쳐주시는 예수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분이시요, 우리를 죄와 허물에서 건져주시고 멸망의 자리에서 구원하신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어쩌다가 병자를 고쳐주시고, 이적을 행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 마침내 당신 스스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탄탄한 신학적인 배경과 구속사적인 의도를 가지고 기록되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힘이 있다는 로마의 네로황제가 그런 능력이 있었습니까? 세계적인 대재벌이라고 하여 어떤 능력이 있었습니까?  해박한 지식을 가진 랍비라고 하여 능력이 있는 것입니까?  오직 예수님은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하면 그런 능력을 나타내실 수 없습니다.  그는 인간 이상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리에게 오신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을 만나면서 위대한 스승을 만나실 것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실 때에 고상한 윤리도덕가를 만나고 가실 것입니까?  죽을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가셔야 합니다.  주님은 모든 죄와 허물을 사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두 가지 이적을 함께 상고할 것인데, 하나의 큰 사건을 기록하면서 중간에 전혀 다른 사건이 끼어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 거라사 땅으로 가셔서 귀신들린 광인을 고쳐주셨습니다.  한 사람을 살리시려고 돼지 2천 마리를 바다에 빠져 몰사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레기온이라는 군대 귀신 들렸던 사람이 깨끗이 고침을 받았는데, 그 지방 사람들은 물질적인 손해만 생각하고 자기 동리를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머물지 않고, 다시 배에 올랐습니다. 

  우리 주님은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 편 동리로 오셨습니다.  건너 맞은편이라고 하면 가버나움이란 동리로 추정됩니다.  같은 사건의 마태복음의 기록을 비교해보면 거라사에서 돌아와서 본 동리로 와서 집에 들어가셨을 때에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이 있었습니다.  본 동리라고 하면 예수님이 공생애를 보내신 가버나움이라는 동리였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많은 이적의 사건이 이곳 가버나움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이방인의 땅 거라사에서는 떠나가실 것을 요구받았지만, 이곳 가버나움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동리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닷가에 머물고 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나아왔습니다. 이때에 회당장 중의 한 분이신 야이로라는 사람이 와서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리면서 간곡히 구하였습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저의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부디 오셔서 아이에게 손 좀 얹어 고쳐주시고 살려주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그의 간구는 간곡하였습니다.  많이 구하였다는 말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라는 분에 대하여 자세한 기록은 없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정확하게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유대나라는 바벨론 포로 시절부터 회당제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동리에 유대인들이 10가정 정도만 되어도 회당을 두었고,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율법을 공부하고, 아이들을 교육하고 유대인 사회의 제반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회당은 회당장이 있었으며 2인자로 핫잔이라는 실무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밑으로 랍비가 있었습니다.  회당장은 백성에게 축복할 수 있었고, 회당의 성경 낭독자를 선정할 수 있고, 랍비-교사를 선택할 수 있고, 랍비의 교육내용을 검토하고, 유대인 사회의 모든 예법과 관례를 살피는 사람이었습니다. 회당장은 집회의 우두머리로 건물도 관리하고, 예배순서를 정하고, 질서를 유지하며, 재판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회당장이라고 하면 한 동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비록 제사장은 아니었으나, 일반 평신도로서는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른 사람이었고, 일반 회중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인물이었고, 온 동리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제사장 계급이 타락하여 로마의 권력과 결탁하므로 백성들에게 신망을 잃어버렸을 때에 이 회당장은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존경받고, 유망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여도 그도 한 사람이요, 하나님 앞에서는 허물 많은 죄인이요, 피조물에 불과하였습니다.

  야이로라는 이름은 구약의 ‘야일’이라는 이름과 같은데, 그 뜻은 “그가 깨우치리라”는 뜻이 있습니다.  야이로에게는 12살 된 딸이 있었는데 외딸이었습니다.  야이로는 사회적으로 유력하고 존경받는 성공한 사람이지만, 그에게는 가장 큰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그의 12살 된 외동딸이 죽을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정말 아버지로서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러다가 낫겠지”가 말이 아니라, “이러다가 죽는다.”고 해야 되었습니다.

  우리도 한번 야이로의 입장이 되어보아야겠습니다.  12살 된 무남독녀 외동딸이 이제 12년을 살아간 것으로 일생을 마감해야 한다고 생각하자니 기막힙니다. 무엇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다 건강한데, 어쩌다가 몹쓸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맨다는 말입니까?  이 아버지가 대신할 수만 있다면 대신 죽고 싶습니다.  딸아이만 살아난다고 하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유일한 길은 예수님에게 가서 사정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많으신 선지자이셨습니다.  자기와 같은 정도의 선생이 아니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교권들은 그를 따르기만 하면 출교시키자고 하는 강력한 제재안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회당장의 체면으로 예수님에게 나아간다고 하는 것은 체면이 말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볼 때에도 예수님은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었고, 구원이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몰라서 예수님을 배척하려 드는 것이지, 모든 사람이 예수님에게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들게 된 것도 딸의 질병으로 인하여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딸의 병이 없었다면 자기의 체면을 지키고 회당장으로 그냥 있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딸의 질병이 아버지로 믿음을 가지게 하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질병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고, 우리 주님 앞에 나아가게 하시는 은총이었습니다.  12살 먹은 딸이 있다면 예수님의 나이보다는 조금이라도 위였을 것으로 생각되어지는데,  그는 예수에게 직접 나아가서 그냥 서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발아래에 꿇어 엎드리어 간곡하게 요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실 무명의 청년이었고, 아무런 지위도 없었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바닷가에 나가서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당도하시니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갑니다.  야이로도 체면 불구하고 달려 나가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간곡하게 간구하였습니다.  우리의 중보기도는 허공을 맴도는 것이 아닙니다.  중보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 가정의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여러분, 오늘 야이로를 통하여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여러분, 은혜 받는 데는 자기를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신분이나 체면이나 잘 살고 못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세워주지 못합니다.  사람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체면이 무슨 힘이 될 것입니까?  그동안 공부한 해박한 율법이 무슨 힘이 될 것입니까?  딸은 다 죽어가는 데, 그에게 물려줄 수 있는 유산이 얼마나 많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입니까? 

  우리 주 예수님만이 해답입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예수님만이 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십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죽어가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 

  자, 예수님은 오늘 이루어질 일들을 다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야이로의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동리로 들어오시고 있습니다.  큰 무리가 따라가면서 예수님을 에워싸고 서로 밀고 당기면서 예수님을 따라 오고 있었습니다.  큰 하나의 사건 안에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12년간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가 있었습니다.  혈루증은 하혈하는 병으로 유출병이라고 했습니다.  현대의학으로는 자궁내막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병은 부정한 병이었습니다.    여인이 이 병을 앓으면 성전에 나갈 수 없습니다.  사람들과 자유롭게 접촉할 수도 없습니다.  가정생활이란 말이 아니었습니다.  여성으로 치명적인 질병이었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다보니 가진 소유를 다 탕진하고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여성은 12년 동안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며, 아무런 효험도 없고 병세는 더 깊어만 갔습니다.  그동안 병을 치료해보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병만 치료할 수 있다면 돈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백약이 무효하였고, 병만 키웠습니다. 
옛날 치료한다는 의사들은 체계적인 학문이 아니었고, 민간요법이었고, 말도 안 되는 엉터리였습니다.  현대 의학은 질병의 원인을 알고 병원균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치료하고 있습니다.  옛날 고대의 의사들은 어떤 병에 걸릴 때에는 무엇을 먹으면 났더라는 말만 듣고 사람을 괴롭혔습니다.
옛날 기록이 내려오는데, 혈루증에는 “은전 하나 무게의 알렉산드리아의 나무진과, 은전 하나 무게의 명반을 갈아 포도주에 섞어서 마시게 하라”고 했습니다. 글쎄요, 이런 식으로는 위장만 버리고 병을 키우는 결과만 가져올 것이었습니다.  그런 처방을 내리고도 치료비를 받았습니다.  저는 오늘과 같은 의학이 발전된 시대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만 듣고 무리 가운데로 끼어들어와 그것도 앞에 선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고침을 받으리라고 생각하고 옷자락에 손을 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순간 여인은 확실히 느꼈습니다. 그의 혈루 근원이 마르고 병이 나은 줄을 몸에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능력이 당신의 몸에서 나간 것을 아시고 무리 가운데로 그 몸을 돌이키면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합리적인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에워싸고 미는 것을 보면서 “아니, 예수님, 이 사람들을 보시면서도 누가 내게 손을 내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당신의 몸에 손을 대었는지 알고 싶어서 둘러보셨습니다.  그 여자는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면서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놀라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34절입니다.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입니까?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도 걱정되는 사람은 회당장 야이로였습니다. 예수님이 길에서 지체하고 있는데, 조금이라도 지체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길에서 지체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조그만 서둘렀으면 딸이 살 수도 있었는데, 예수님이 빨리 가시지 않아서 딸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때는 낫게도 하고, 호전시킬 수 있지만, 이제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노랗고, 어떤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어린 것이 고통 중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옆에서 듣고 계시던 우리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소망이 없다.’, ‘다 끝났다.’고 할 때에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야이로가 혈루증 여인의 사건을 지켜보면서 더욱 큰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사실은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들을 때에 모든 소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혈루증 여인의 고침은 나를 위한 나의 사건이요, 나에게 믿음을 주는 사건인데, 오히려 방해만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고침을 받는데, 주님이 친히 가셔서 손을 대시면 못 고칠 질병이 없다고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의 집에 친히 따라가셔서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는 것을 보시면서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사람이 죽은 것을 모르고 자는 아이를 보고 죽었다고 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눈에 비치기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비웃는다.’는 말은 말 같지 않아서 웃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상식도 없고, 무식하고 무지하기에 비웃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웃음이 예수님의 능력을 드러내 주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떠들고 울던 사람들을 다 내보내시고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을 데리시고 방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이었습니다.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일어나자마자 일어서서 걸었습니다. 사람들이 크게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경계하시면서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완전히 살아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정말 자상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에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우리들이 살아가는 동안 크고 작은 문제들을 가지게 됩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 사람 같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할 것 같은데, 만나보면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여인처럼 조용히 다가가셔도 됩니다. 다른 사람이 모르게 나만이 아는 기도를 드려도 됩니다.  알려진 질병이면 감출 것이 없습니다.  기도를 부탁하고 소리 높여 기도해도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절망이다, 다 끝났다, 죽었다고 손을 놓는 순간에도 우리 주님은 능력이 많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시고, 손잡아 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보실 때에 세상적인 지위를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진 것도 보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무엇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며, 주님에게 칭찬을 받을 것입니까?  오직 믿음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건과 사역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아야 하고, 하늘나라를 맛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현재 여기에 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모든 병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오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위대한 치유자이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 중에, 우리의 찬송 중에, 우리의 기도 중에 치유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서로 기도하면서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만져주심을 바라며 겸손하게 우리의 모든 질병을 내어놓고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으로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질병을 위하여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혈루증 여인처럼 믿음을 가지고, 또 회당장 야이로처럼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서 깨끗하게 치유함을 받고, 능력 받아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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