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구원 받지 못한 사람 (사 59:1-8)

  • 잡초 잡초
  • 293
  • 0

첨부 1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기를 바라면서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들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합니다. 그렇기에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귀를 기우리실 만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7,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지는 기도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머물러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물러 있을 때입니다. 이것은 기도라고 다 응답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8:9-14,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둘 다 기도 했지만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오,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그렇게 기도한 세리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여기에 반론이나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하나도 없으나 실제로는 그렇게 못합니다.

또한 허상을 좆는 기도가 있습니다. 오로지 물질적인 복과 현세적인 성공에만 관심. 개인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 요한일서 2:15-16,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은 모두 하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을 위한 기도입니다.

실상을 좆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이어 받기를 워하고, 그 뜻이 이 땅에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의 기도입니다.

두 기도의 차이는 뭡니까? 즉 내 뜻이냐, 하나님의 뜻이냐 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특히 성서의 기도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대부분입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들어 주시기만을 바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절박하게 드리는 기도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기도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가장 충실한 기도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길입니다. 그 길을 찾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충실한 기도를 잘 올리지 못하는 것만큼은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결정적 요인이 곧 인간의 죄입니다.
“주님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은 얼마든지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의 손입니다. 하나님의 귀는 어떤 작은 소리도 들으실 수 있는 능력의 귀입니다.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고.”

그런데 뭐가 문제입니까?
2절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의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에게서 얼굴을 돌리셔서, 너희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가 가로 막고 있다는 겁니다. 그 죄가 개인의 죄든, 민족의 죄든 간에 죄가 중간에 도사리고 있는 한 인간과 하나님의 사이는 멀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죄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내가 재판장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검사의 입장으로 내 죄를 낱낱이 드러내는 겁니다. 자기 죄를 변호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건 주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사실 내가 나의 죄를 고백하기란 어렵습니다. 자기를 합리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정당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냉정한 삼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죄를 고발해야 하는 겁니다.
회개란 자기의 죄를 찾아내서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보면 그 죄를 찾지 못합니다. 자기 얼굴, 자기가 못 보듯이. 거울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나를 보면 내 죄가 보입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의 죄를 찾아내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왜 죄를 고백 못하나요?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자기를 보는 게 아니라, 사람 입장에서 자기를 보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자기 죄를 감추려 합니다.

개인이든, 민족이든. 잘못되고 불의한 것을 “잘못하였다.” “불의하다.”고 하지 않는 한 고백도 회개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백과 회개가 없는 한, 아무리 애써서 기도해도 응답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 사이의 죄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회개 없는 기도는 그것이 어떤 기도이든, 무슨 소원을 아뢰는 기도이든 간에 응답될 수 없습니다. 설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라 할지라도 회개 없는 기도는 응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애당초 하나님께서 들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들어 줄 수 없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만약 들어 주신다면, 그야말로 하나님 자신도 불의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불의 하실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기도에는 응답이 없는 겁니다.

죄는 모든 것을 비뚤어지게 만들고 뒤집어 놓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그것이 본래의 뜻대로 쓰이지 못하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다스려야 합니다. 생육하고 번성케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죄가 그리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복 받은 땅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고통과 슬픔, 불안, 걱정... 이런 것이 없는 사람에게 고통과 슬픔과 불안과 걱정을 안겨 주었습니다.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우리의 손은 생산하는 것입니다. 약한 자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는 우리의 손이 사람을 죽이게 하거나, 남의 것을 훔치게 하거나, 부정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입은 진실을 말하게 하고 전하게 합니다. 찬양하고,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죄는 우리의 입이 거짓이나 지껄이게 하고, 비방하고, 헐뜯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게 합니다.
이처럼 죄가 있는 곳은 진실이 왜곡되고 온갖 터무니없는 모략과 중상이 판을 칩니다. 인간의 행위들이 그야말로 독을 뿜어냅니다. 폭력, 살인, 잔악한 계책이 도처에서 기세를 올립니다. 무지와 공포와 불안이 도처에 깔려 있게 합니다.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기도하는 사람조차도 죄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 없습니다. 마치 아무 죄도 없는 것 같이 당연하다는 듯이 하나님의 구원을 요구하고, 나가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기도이며, 그런 기도가 어떻게 응답이 될까? 만약 이런 기도가 응답된다면(될 리 없지만), 그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일 수 있습니다. 라인홀드 니이버의 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에 나오는 예화입니다. 해적선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 그가 열심히 일하면 할수록 그는 나쁜 짓만 더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간구하는 기도, 소원만 바라는 기도를 했다면?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시다면?

이사야, 그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인을 뵙다니!”
그래요. 죄를 회개하지 않고, 그래서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용서 받지 낳고, 그러고도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곧 죽음인 겁니다. 그러므로 알든 모르든, 죄를 생각하든 못하든,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죄에 대한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이르다 보면 우리의 죄 또한 드러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울 앞에만 서면 안 보이는 우리 얼굴 볼 수 있듯이, 하나님 앞에 서면 안 보이는 우리 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는 기도는 죄를 고백하고 그래서 회개하는 일이 있게 됩니다. 만약 어떤 문제로 하나님께 기도하려 할 때, 우리의 죄가 드러나면 그 죄에 대한 기도부터 해야 합니다. 아무리 내 기도가 급하고, 절박하더라도 먼저 죄에 대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실상 무엇 때문에 기도를 시작하였든 간에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설 것이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그 기도는 응답이 되는 겁니다.

12절 “주님, 주님께 지은 우리의 죄가 매우 많습니다. 우리의 죄가 우리를 고발합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우리가 발뺌할 수 없으며, 우리의 죄를 우리가 잘 압니다.”
13절 “우리가 죄를 짓고 주님을 부정하였습니다. 우리의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물러가서, 포학한 말과 거역하는 말을 하면서, 거짓말을 마음에 품었고, 또 실제로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의 잘못이 어떤 것이든 지간에 그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할 때 진정한 기도는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기도가 시작될 때만 하나님께서 들어주실만한 기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래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바탕이 마련되고,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가 기도하는 사람과 이 땅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와 뜻을 구하는 기도는 본디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세계 속에서 당장 얻을 수 있고,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이라든지, 평화, 정의 같은 것은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더구나 하나님은 나라, 하나님의 의 같은 것은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막연하기만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나라고, 무엇이 하나님의 의란 말인가? 그것이 차라리 돈이라면 내 얼마라도 드리겠는데. 그것이 차라리 손에 잡히기나 눈에 보이는 거라면 얼마든지 하겠는데……. 세상에 이렇게 막연한 게 또 어디 있는가?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그냥 입으로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가 되었고, 기도하는 가슴은 “도대체 이게 뭔가?” 싶은 겁니다.

한마음 기도회.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이런 생각이 듭니다. 기도하는 건 막연한 거니까. 당장 손에 잡히는 것 아니니까 그래서 재미없는 겁니다. 만약 기도하자마자 내 손에 딱 떨어지는 것이 있다면 어찌 기도 안하겠습니까?

성경에 “복 받으라.” 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복이란 무엇입니까? 대부분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을 많이 가지는 것을 복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분명한 복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겁니다.
아브라함. 이삭을 얻었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복 주셨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했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대부분, “이건 복이 아니라 저주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을 때, 믿음의 사람 곧 창세기 12:1-3에서 말씀하신 복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해가기보다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온 인류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6절 이하에,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시라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양을 먹여라.”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요한복음 21:18에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는 거랍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비참하게 죽을 것을 번히 알면서도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셨습니다. 그렇다고 그 비참한 죽음을 벗어나게 하시는 것 아닙니다. 오히려 그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하신 겁니다. 그것은 그 비참한 죽음 뒤에 생명과 하나님의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찾기보다 자기 뜻을 찾는 겁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자기 뜻을 찾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은 주님의 손이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의 외아들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지고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다.” 그럼요.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십니다. 그리고 응답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런 구원을 얻기를 원하십니까? 그런 응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죄를 회개하십시오. 죄를 고백하는 기도의 자리를 많이 만드십시오. 나는 죄 없는 것처럼, 나는 용서 받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지 마십시다.
정말 감사하는 것은 무슨 죄든지 회개하면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 죄를 깨끗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하시고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겁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구원 받은 흰옷 입은 사람들. 그들은 죄가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예수님의 피로 씻음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그분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을 덮는 장막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그 밖에 어떤 열도 그들 위에 괴롭게 내려 쬐지 않을 것입니다. 보좌 한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계 7:14-17)

은혜를 베푸시는 손, 그 손의 역사를 체험하십시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