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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1) (마 6: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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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 2차 대전 때 독일이 폴란드에 저지른 만행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폴란드 크리스천들의 모임이 있었을 때 서독의 평화 사절단이 방문을 하여 이런 요청을 했습니다. “독일이 폴란드에 행한 일에 용서를 빌고 서로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서독의 크리스천들을 용서하고 용납해 주시겠습니까?”
한동안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한참이 지난 후에 폴란드의 한 그리스도인이 입을 열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르샤바의 돌 하나하나가 다 폴란드인의 피로 젖어 있습니다. 우리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모임은 파행이 되었습니다. 주기도문으로 모임을 끝내기로 하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하면서 주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하는 부분에 와서 모든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멈추었습니다.

왜냐하면 독일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책이 되어서 그 기도문을 넘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방안에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오래도록 침묵이 흘렀습니다. 한 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독일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그렇게 힘주어 말하던 폴란드인이 입을 열었습니다.
“당신들의 요구를 수락해야 되겠습니다. 지금 당신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할 수가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이 힘주실 줄 믿습니다. 당신들을 용서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 약속이나 한 듯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하고 주기도문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폴란드 인들이 독일을 용서할 수 없다고 했던 것처럼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내가 죽기 전에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내 인생을 망쳐놓은 그 누구, 내 재산을 거덜 나게 했던 그 누구, 내 사랑을 배신했던 그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고 지금도 증오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를 배신하고 내 재산을 날리고 내 인생을 망쳐놓은 사람은 먼데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데 있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먼 미국의 라이스 국무장관이 내 인생을 망쳐놓았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부모나 형제나 자식이나 친구나 이웃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용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용서하지 못한 사람 때문에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가책을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라고 하면 가슴이 막혀오고 그 다음의 기도가 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까?
지금까지 용서하지 못한 사람을 오늘 이 시간 용서해서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하고 기도를 할 때 거리끼지 않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기도문의 네 번째 구절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다섯 번째 기도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하는 기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에 앞서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라는 말씀을 생각하면 이것이 어떤 조건이 아니겠는가 하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었기 때문에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우리가 이해하기 쉽습니다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주었으니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죄를 용서받은 증거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가 있습니다. 좀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다른 사람을 용서 안하는 사람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경험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면 그 결과로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죄, 내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 짐을 지고 있는 우리를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내게 섭섭하게 한 사람들, 내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용서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야 합니까?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지옥 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그 보배로운 피를 흘려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에는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에는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셨습니까?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을 때 용서하셨습니까? 로마서 5장에 보면 하나님 앞에 우리의 처지가 연약했습니다. 경건치 못했습니다. 죄인이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 원수 된 우리였습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해 주신 이 사랑, 이런 하나님의 용서를 본받아서 우리들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셨습니까?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창으로 찌르고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서 우리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한다면 이 세상에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서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용서가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가슴을 도려내는, 나 자신을 희생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희생을 함으로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율법에는 용서라는 말이 없습니다. 출애굽기 22장 23절 이하에 보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으라>고 했습니다. 이를 뽑은 사람에게는 이를 뽑고, 눈을 뽑은 사람에게는 눈을 뽑고, 뺨을 때린 사람은 뺨을 때리고, 사람을 죽인 사람은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두 번까지 용서하라, 그 이상은 용서하면 비겁한 짓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랍비들은 세 번까지는 용서하고 네 번째는 절대로 용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까지 하면 되겠습니까?” 그 당시에 일곱 번을 용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사랑의 극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490번 용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이상, 언제든지, 항상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마태복음 18장에서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셨습니다.
한 종이 임금에게 1만 달란트를 빚졌습니다. 1만 달란트는 얼마나 많은 돈인가 하면 6천만 데나리온입니다. 노동자가 하루 받는 품삯이 1데나리온인데 6천만 날을 벌어야 가질 수 있는 돈입니다. 이것은 햇수로 치면 16만 4천 3백 8십 3년 동안 벌어야 되는 돈입니다.
이 돈은 이 종으로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불렀습니다. “네 몸과 네 처와 네 자식, 네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나에게 갚으라.” 그러니까 이 종이 “임금님, 지금은 내가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갚겠습니다. 조금만 기회를 허락해 주십시오.”하고 엎드려서 애걸을 했습니다.
임금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종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돈을 갚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임금으로부터 빚을 탕감 받은 종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뛸 듯이 기뻤을 것입니다.
너무 기뻐 휘파람을 불면서 밖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밖에서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을 진 동료를 만났습니다. 종은 그에게 빚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빚진 사람이 돈이 없다고 하지 멱살을 잡으면서 갚으라고, 안 갚으면 옥에다 집어넣겠다고 했습니다. 빚진 사람은 “친구여, 내가 지금은 없지만 열심히 일해서 갚겠으니 기회를 다오.”라고 애걸을 했습니다. 그러나 종은 안 된다고, 지금 갚으라고 하면서 옥에다 집어넣고 말았습니다.     
이 광경을 다 지켜본 임금의 신하가 임금에게 그 사실을 고했습니다. 임금은 노발대발해서 1만 달란트 빚진 그 종을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의 딱한 처지를 보고 불쌍히 여겨 1만 달란트라는 엄청남 빚을 다 탕감해 주었는데 너는 친구의 빚 100 데나리온을 용서해 줄 수 없었느냐, 그러므로 너도 내게 빚진 1만 달란트를 다 갚아야만 옥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다.”하고 종을 옥에 넣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1만 달란트, 6천만 데나리온의 빚을 용서받은 죄인들입니다. 이런 우리가 100데나리온 빚진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지 못하고 그들을 질타할 때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말하면 6천만 원 용서받은 사람이 100원 빚진 사람의 멱살을 잡고 갚으라고 독촉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죄를 용서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용서하라는데 어떻게 형제의 작은 허물을 우리가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형제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서 형제의 죄가 어떤 죄든지 용서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엄청난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본받아서 실천해야하는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2. 나를 위해서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용서해야 되는가하면 그것은 용서를 해야만 나 자신이 건강하고, 나 자신이 은혜 받고 축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 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먼저 병듭니다. 나 자신이 건강이 악화됩니다. 하나님과의 축복의 통로가 막힙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습니다.
암 전문의들이 말하는 암이 생기는 세 가지 원인은 첫째로는 담배를 많이 피우면 암이 걸릴 확률이 굉장히 높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지나치게 기름진 음식이나 냉장고에 오래 보관했던 음식을 먹게 되면 음식물 때문에 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남을 미워하는 감정과 스트레스 때문에 암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정신의학자 메닝거는 말하기를 “질병의 70%가 스트레스 때문이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의 90%가 미움과 증오와 용서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 50%가 내가 용서받았다는 확신과 남을 용서한다는 사랑의 마음만 있으면 바로 퇴원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없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해서 아직도 입원해 있는 사람이 50%나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남을 용서하며 살아야 되겠습니다. 남을 미워하면 그 미움의 독소가 먼저 내 자신을 해칩니다. 내 정신건강을 해칩니다. 내 영혼을 해칩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방해합니다. 기도응답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제물을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이 있거든 먼저 가서 화해하고 제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제물 드리는 것은 예배입니다. 예배드릴 때에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원망들을 일이 있으면 예배드리기 전에 먼저 화해하고 용서하고 예배드리라는 말입니다. 그러지 않고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고, 그러지 않고 드리는 기도에 응답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전에 어느 세미나에 참석했는데 그 세미나에서 용서에 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세미나에 참석했던 어느 분은 용서를 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아버지를 증오합니다. 자기 아버지가 죽이고 싶다는 것입니다. 목사이지마는 아직도 “아버지 사랑합니다. 용서합니다.”를 한번도 못해봤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해서 몹시 괴로워하더라고요. 옆에 있던 사람들이 아버지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용서합니다.”하고 소리를 내어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못합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같이 기도해주고 ‘아버지 용서합니다’를 따라하게 했습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더듬거리며 “아∙버∙지 용∙서∙합∙니∙다.”하고 말하는 순간에 회개가 터지면서 은사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집회 후에 전에는 겨우 몇 명의 목회를 하던 그 분이었는데 엄청나게 교회가 부흥되어서 서울에서도 굉장히 큰 건물을 지어서 목회를 하는 분이 되었습니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 죄가 우리의 건강을 막습니다. 우리의 정신건강을 막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라도 남을 용서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본의 전쟁 영웅 후찌다 씨가 일본 함대기 360대를 끌고 1946년 12월 7일 새벽에 진주만 미군 기지를 공격했습니다. 그때 미국의 태평양 함대 25척이 침몰되고 400대의 비행기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때 작전이 성공했다는 암호가 ‘도라’였습니다. ‘도라 도라 도라-이겼다, 이겼다, 이겼다’ 이것이 영화화되기도 했는데 바로 ‘도라 도라 도라’라는 영화입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인 후찌다 씨가 우리나라를 다녀갔습니다. 그는 한 손에 성경을 들고 복음의 사도가 되어서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하고 갔습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은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후찌다 씨가 예수님을 믿게 된 동기는 그가 어느 날 동경 역을 지나가는데 한 전도자가 신앙고백이 기록되어 있는 전도지를 주어서 받았습니다. 그 내용을 보니까 자기가 지휘했던 진주만 공격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자기가 진주만 공격을 해서 승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일본을 공격했습니다. 일본에 폭격을 하는데 그 미군조종사들이 너무 흥분했던지 비행기에 휘발유가 떨어진 것을 모르고 계속해서 퍼붓다가 돌아가려고 하니까 연료가 떨어져서 추락하여 포로가 되었습니다.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서 온갖 고문과 학대를 다 받으면서 ‘내가 만약에 살아서 우리나라에 돌아간다면 내가 다시 돌아와서 나를 고문한 놈을 죽이리라, 꼭 원수를 갚고 말겠다.’고 이를 악물고 그 고통을 견디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고국에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회복되지를 않았습니다. 내가 건강만 회복되면 꼭 일본에 돌아가서 복수를 하고 말리라고 마음을 먹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의사를 찾아가서 치료를 받는데 몇 달을 받아도 차도가 없었습니다.
의사가 물었습니다. “당신의 마음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는 자신의 지난날을 이야기하고 건강만 회복되면 일본에 가서 고문한 자들을 죽이고 말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의사가 말했습니다. “당신의 마음에 그와 같은 증오의 불길이 타는 한 미움이 있는 한 당신의 건강은 절대로 회복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를 위해서 달려 돌아가시면서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당신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치료가 된다는 말에 그는 예수님을 믿기로 하고 성경을 읽고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난 뒤 그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이 한 역사적인 인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나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도 용서하신 그 사랑을 깨닫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마음속에서 ‘아, 나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되겠다. 내가 죽이려고 했던 그 일본의 원수를 용서해야 되겠다’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건강이 회복되면 그에게 가서 이 사랑의 예수님, 용서의 예수님을 증거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 뒤 어느 날 그는 자기의 몸이 감쪽같이 나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조종사가 이제는 복수하기 위해서 일본에 간 것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일본에 갔습니다. 일본에 가서 물어 물어서 자기를 고문했던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그 일본사람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는 “내가 전에는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 복수하기 위해서 건강을 회복하려했지만 내가 예수님을 믿고 당신을 용서하기로 하고 당신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이제 내가 믿는 예수님을 당신도 믿어보시기 바랍니다.”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사람이 그 말을 듣고 어떻게 예수님을 안 믿겠습니까?  이런 신앙의 전도지를 후찌다 씨가 보고 그도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용서해야 내가 건강할 수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내 질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내가 용서해야 내 경제가 풀릴 수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내 신앙에 축복의 물꼬가 터질 수 있습니다. 아직도 회복되지 않는 병이 있습니까? 혹시라도 내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없는가 살펴보세요. 내가 계속해서 건강이 나빠진다면 내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없는가 살펴보세요. 내가 예배드려도 기쁨이 없고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다면, 성령을 사모해도 하나님의 은사가 오지 않는다면 내가 혹시라도 미워하고 있는 사람이 내게 걸림돌이 되어 가로 막아서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 경제가 될듯하면서 계속해서 무너지고 추락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혹시 내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지는 않은가 자신을 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내 모든 영육간의 축복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라도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의 몸이 건강하고, 우리의 신앙이 건강하고, 우리의 정신이 건강하고, 하나님의 축복의 물꼬가 내게로 몰려드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나를 교육시키는 도구이기 때문에 용서해야 합니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도구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주변에 있는 나라들을 도구로 사용하신 적이 있습니다.
바벨론 같은 나라를 보세요. 성전을 허물고 임금을 잡아서 눈을 뽑아버리고, 개 끌고 가듯이 끌어가고, 백성들을 다 죽이고, 쓸만한 사람들은 포로로 잡아가고, 건물들을 다 불태워버린 바벨론은 이스라엘 백성이 볼 때는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하나님의 도구였기 때문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훈련하시기 위해서 사람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우리를 칠 때가 있습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성전을 지으려고 하니 너무 기쁘다, 네 자녀들이 혹시 죄를 범한다고 할지라도 저 사울처럼 단번에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사람막대기와 인생채찍으로 자식들을 때려서 고쳐 쓰지 버리지는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사람이라는 막대기가 나를 괴롭히고 나를 때릴 때가 있습니다. 나를 찌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도구로 나를 회개시키고 훈련시키고 나를 기도하게 하고 나를 겸손케 하여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나를 때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적이 있어서 그런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때리는 그 매를 보고 미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막대기로 내 머리를 탁탁 친다면 그 막대기를 보고 이 막대기가 왜 나를 때리느냐고 막대기보고 욕하는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그 막대기를 쥐고 있는 사람을 욕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막대기라는 그 사람으로 나를 때리고 훈련시키실 때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그 사람에게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을 용서할 뿐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요, 그 사람은 나를 훈련시키고 나를 성장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용서 못할 어떤 사람 때문에 내가 오히려 더 크게 된 적은 없습니까? 그 회사에서 나를 쫓아냈기 때문에 내가 더 크게 되었고, 그 사람이 나를 자꾸 괴롭혔기 때문에 내가 더 성장했고 그 사람 때문에 내 신앙이 더 돈독해진 그런 경우는 없습니까?
부산에 있는 어느 전도사님은 어느 장로님이 너무 괴롭혀서 도저히 있을 수 없어서 이를 악물고 나와서 서울로 갔습니다. 조그마한 교회의 담임을 했습니다.
그는 그 장로님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목회를 하여 수만 명을 목회하는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그를 괴롭히는 장로님이 그 목사님에게는 공로자였습니다. 그런 예들이 우리 주변에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텔레비전에 중국에게 나라를 뺏긴 티베트의 한 노인이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그 노인은 자기의 조국 티베트를 사랑한다는 그 이유 때문에 27살에 감옥에 들어가서 70살이 되어서야 나오게 되었습니다. 43년간 감옥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의 얼굴은 참으로 평화롭고 온화했습니다. 서양의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나는 평생 감옥 근처에도 안 갔지마는 생활은 늘 감옥과 같은 답답한 삶을 살았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행복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40년 이상을 감옥생활을 한 당신은 어찌 그리 평화롭고 행복한 표정으로 살고 있습니까?”
노인이 대답을 했습니다. “감옥은 나에게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어떤 욕망도 다 내려놓을 수 있는 기도하는 공간이었습니다. 40여 년 동안 나는 그곳에서 온종일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기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을 고문하고 괴롭힌 중국 사람들에 대한 복수심 같은 것은 없다는 말입니까?”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며 복수심을 가질 시간에 나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 내게는 훨씬 더 값진 일이었습니다. 중국인들은 내 적이 아니라 나를 공부시키고 성장시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는 나를 성장시키고 나를 공부시키고 축복을 끌어오고 나를 더 겸손하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 인도한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를 용서해 줄 뿐 아니라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때리는 회초리를 보고 미워하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사람이라는 채찍과 막대기로 나를 때리실 때에 그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눈으로 바라보세요. ‘당신은 나를 훈련시키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나를 깨닫게 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나를 성장케 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나를 겸손케 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나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나를 깊이 기도케 하는 사람입니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케 하는 사람입니다.’하고 그 사람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용서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축복하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죽어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지옥 갈 억만 죄악을 용서해 주신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용서하였으니 내가 너희를 용서한 것처럼 너희도 형제를 용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어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은 나를 훈련시키는 도구입니다. 오히려 막대기로 쓰임 받는 그 사람에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예수님 믿게 되었을 수도 있고 더 성장하고 더 깊은 은혜 가운데 들어가고 더 겸손케 되고 더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죽어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용서하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 용서하며 살아야 되겠습니다. 용서하지 못한 부모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배우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형제와 친구와 이웃, 그 누군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아무개를 용서합니다. 나는 내 아버지를 내 어머니를 용서합니다. 내 남편을 내 아내를 내 자식을 용서합니다.”하고 용서하게 될 때에 진정한 자유가 우리 마음속에 넘치게 될  것이고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축복이 강물같이 물밀 듯이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그것도 구체적으로 이름을 불러가면서 기도해야만 그 미움의 감정이 끊어집니다. 그냥 마음으로만 용서해야지 하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미움의 감정은 얼마나 우리 마음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실질적으로 그 이름을 불러가며 입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끊어지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권사님들과 교역자들이 함께 지리산 수양관에 가서 종일 기도하고 말씀 연구하고 서로 격려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갑자기 이런 순서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권사님들을 빙 둘러 서게 하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권사님, 제가 의도적으로는 아니지마는 본의 아니게 권사님에게 잘못한 것, 마음 섭섭하게 한 것 있으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도 권사님을 사랑합니다.”하고 권사님들에게 고백을 했습니다. 권사님들과는 용서해야할 분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제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에게도 가서 “용서합니다. 사랑합니다.”하고 용서하고 난 다음에 그 분의 허물과 잘못을 다 없었던 것으로 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아무개를 용서합니다.”해 놓고도 돌아서서 또 욕하고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죄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한번 고백을 해 보십시다. 한번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아버지를 용서합니다. 내 어머니를 용서합니다. 내 남편을 용서합니다.  내 아내를 용서합니다. 내 자식을 용서합니다. 내 형제를 용서합니다. 내 이웃을 용서합니다. 내 친구를 용서합니다. 우리 성도들을 용서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그 고백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미워했던 어떤 사람이 있다면 오늘 이 시간을 통하여서 완전히 다 끊어버리고 이제는 정말 용서하지 못할 사람 없이 다 용서하고 기도하고 그를 위해서 축복하고 이제 다시는 그를 인해서 분노하지 말고 욕하지 말고 축복하고 사랑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이 시간 하나님 앞에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내가 지금까지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개에게 있는 내 미움의 감정을 끊어주시옵소서. 아무개를 용서합니다. 아무개를 사랑합니다.”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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