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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피그말리온 효과 (2) (약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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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말은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영향력(影響力)을 미치게 하는 엄청난 권세(權勢, power; influence; authority.)가 있습니다. 본문 2절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라고 하였는데 원문에 있는 '많다.'라는 단어인 '폴라'(* ,'많은, 많은 것에')라는 단어는 개역성경에서 삽입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명확한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Robertson, Martin, Moo, Dibelius-Greeven). 그러나 '폴라'의 의미에 대해 혹자는 죄의 '수량'(RSV)이나 죄의 '다양성'(NIV, 잠 10:19)으로 해석하거나, 또는 “이 두 가지 모두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Martin).”

사실 이러한 차이는 의미상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따라서 본문을 해석하면 말로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한다.' 혹은 '우리는 모두 많은 것에 실수를 범한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무난합니다.

특별히 '실수하다.'를 뜻하는 단어 '프타이오멘'(*)은 유대 문헌이나 신약성경에서 영적인 실패, 즉 '모든 죄의 행동'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2:10; 벧후 1:10, Moo, Burdick).

따라서 '야고보' 사도는 말로 행하는 범죄는 누구든지 쉽게 범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말을 잘 통제하여 실수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성숙되고 온전한 사람임을 강조하며 더불어 언어생활을 조심할 것을 권고합니다.

사실 우리가 삶을 살펴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죽이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여 그 말이 마치 상대방을 공경하는 비수(날카로운 칼)가 되어 상대방에게 커다란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며, 소망과 용기를 꺾어 버리고, 삶의 소망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또한 ‘이런 말의 공격을 자주 받게 되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극적으로 만들고 우울하게 만들며, 삶의 용기와 열정을 떨어뜨리고, 매사를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사람이 되게 만듭니다.’

동시에 죽이는 권세를 가진 말을 자주 듣게 되면 놀랍게도 결국 듣는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할 수 없다. 안 된다."라는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불평과 험담과 원망을 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다른 사람에 감정을 상하게 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하며, 남을 흉보는 말을 자주하게 하고, 과격한 말과 더러운 말로 남을 비방함으로서 마침내 그 말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낙심하게 만들어 결국 사람을 죽이는 말을 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결과를 만들고 맙니다.

반대로 '살리는 권세 있는 말'을 구사하면 결과가 다르게 나타납니다.??그러므로 "감사의 말, 세워 주는 말, 위로의 말,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말 등을 들으면 '꿈과 희망과 용기'가 생기게 합니다. 위로하고 격려하며 칭찬하는 말을 함으로서 낙심에 빠졌던 사람에게 용기와 소망을 갖게 합니다. 더구나 긍정적인 말로 상대방을 세워주고 자부심을 갖게 만듭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수고했습니다." 는 말을 자주 함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안겨 주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옛 속담에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을 거꾸로 해석하면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인생에 큰 유익을 끼칠 수도 있지만 손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고사 성어 중에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고 날카로운 쇠붙이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는 뜻으로 간단한 '경구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촌철ː寸鐵)이란 "작고 날카로운 쇠붙이나 무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예를 들어 한 치밖에 안 되는 바늘을 가지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처럼 비록 세 치의 혀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도 있고,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말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어느 정도로 큰가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로젠탈(T.L.Rosenthal)’이란 심리학자가 처음 실험하였던 놀라운 결과로 ‘말 한마디가 사람들에게 죽이고 살리는 결과에 이르게 하며 영향을 미치는 효과를 교육학(敎育學)에서는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혀는 크기로 따지면 아주 작지만 그 혀가 끼치는 영향력은 사람의 일생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편소설 '깊이에의 강요'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주인 공으로 한 여류 화가가 열심히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평론가가 작품을 구경한 후 그림에 대하여 평가를 하기를 "당신 작품은 재능도 보이고 마음에도 와 닿으나 아직 깊이가 부족하다." 는 말을 했습니다. 이 화가는 '재능도 보이고, 마음에 와 닿는다.''는 말은 다 잃어버리고 깊이가 부족하다는 말에만 마음이 걸렸습니다. 그녀는 '깊이'라는 두 글자에 집착을 합니다.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집념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깊이'를 진전시키지 못하는 자신의 몸을 술과 약물로 혹사시킵니다. 아름다웠던 모습은 고뇌와 집착으로 엉망이 되어갑니다. 살아갈 의욕을 잃어버린 그녀는 결국 '깊이' 없는 자신의 그림들을 전부 찢어버리고 1백 39m의 높이에서 '깊이를 알기 위하여 몸을 아래로 던져버렸습니다.' 말 한마디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우리 속담처럼 말이라는 것은 한 번 말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듣거나 말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씨가 됩니다. 그래서 결국 그 씨가 어느 때는 사람에게 활기와 용기, 힘, 기쁨, 소망, 행복을 주는 생명의 씨 역할로 심어질 경우가 있고 어느 때는 절망과, 우울, 슬픔, 고독, 포기 등의 사망의 씨로 심어지게 됩니다.

말이란 혼자 하는 말이든 상대가 있어 하는 말이든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든 말은 반드시 사람의 마음 밭에 떨어져 씨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말이 지니고 있는 위험성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1-2절)

하나님은 야고보 사도를 통하여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니 선생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심판'의 헬라어 '크리마'(* )는 '재판을 통하여 내려진 판결'을 의미합니다(롬 13:2,D-ibelius-Greeven, Robertson).

여기에서 말하는 교사란 오늘날로 말하면 좁은 의미에서는 가정의 가장이요. 교회지도자요, 넓은 의미에서는 가정과 사회에 높은 자리에 있는 모든 위치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누구든지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이 많으면 실수도 많고, 또한 ‘자신이 말해 놓고 지키지 못함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할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9절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순간적인 현상으로 그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꾸준히 지속되는 여러 과정을 통하여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속히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Ropes).

그러나 "말하기는 더디 하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말을 천천히 하라."는 뜻이 아니라 "성급하게 자기의 의견만을 주장하거나 자기의 고집만을 내세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계속하여 말하거나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논쟁에 빠지기 쉽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겸손히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추어야 합니다(Burdick,Tasker).

옛 말에도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는 말처럼 우리는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많이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를 듣고 둘 셋을 이상을 말하려다 보니 거짓말이 나오고 잘못된 얘기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말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2절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말에 실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온전하다'는 말은 흠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름다운 표정에 담겨진 아름다운 말을 하는 사람 때문에 아름다운 사랑의 가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언어는 표현한 것처럼 곧 그대로 결과를 나타낸다.’는 ‘피그말리온 효과’는 어떻게 나타납니까?(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첫째, 언어는 그 사람의 온 몸을 굴레가 됩니다(2절 하반 절).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을 얽어매는 굴레가 된다.'는 것입니다.??'굴레 씌우리라'의 헬라어 '칼리나고게사이'(* )는 '재갈을 물리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한 말에 의해서 스스로 제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무슨 말을 했든지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사사기 11장을 보면 "입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사가 등장합니다. ‘입다’는 본래 기생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용맹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웃 나라가 이스라엘을 침략하자 사람들은 그를 군대의 대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전쟁에 나가면서 하나님께 서원하기를 "제가 승리하고 평안히 돌아오게 된다면 가장 먼저 대문에 나와서 영접하는 사람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습니다." 라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데 자기 무남독녀가 춤을 추면서 환영하러 나왔습니다. 입다는 그 모습을 보고 옷을 찢으며 슬퍼하였지만 하나님과의 약속이었기에 그 약속을 지켜야 했습니다. 경솔한 말 한 마디 때문에 사랑하는 딸이 목숨을 잃게 된 것입니다.

한 번 내어 놓은 말은 주워 담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마디의 말이라도 신중하게 자신을 살피고 말하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잠언 6:2절에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는 말처럼 인간의 행동은 그의 언어에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3-6절에서도 '사람의 언어는 사람의 인생을 방향을 결정하는 것임을 비유한 교훈'을 해 줍니다.

달리는 말은 비록 사람보다 힘이 세지만, 그 입에 재갈을 물리면 사람의 뜻대로 조종할 수 있습니다. 말의 입에 물리는 조그마한 재갈이 말의 온 몸을 어거하고 제어하여 사람에게 순종하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재갈이 말의 '입'에 채워짐으로 말이 통제된다는 사실이 강조합니다(Moo).

또한 4절에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라고 말함으로 '배에 붙어 있는 키의 기능'에 비유하여 말의 기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배의 뒤꽁무니에 붙어 있는 ‘키’라고 하는 것은 아주 작은 부속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것은 물속에 들어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조그마한 키를 이용하여 선장이 원하는 방향으로 배를 조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야고보는 작은 부분을 통해 커다란 몸체를 조종할 수 있음을 암시하면서(Moo, Dibelius-Greeven) 배와 키의 관계를 제시합니다. 큰 몸체가 '광풍에 밀려갈 때' 일지라도 사공은 자그마한 키를 통해 원하는 방향으로 배를 조종할 수 있다고 비유합니다.

야고보는 말과 재갈, 배와 키, 몸과 혀를 비교시켜서 혀가 작지만 혀를 제어하지 않을 경우 엄청난 범죄가 발생하게 됨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본문 6절에서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말은 '많은 나무를 태워 큰 불을 일으키는 작은 불씨와 같다.'고 비유합니다. 어떠한 불이든지 작은 불씨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강원도 고성지방에 큰 산불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 불도 작은 불씨에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지난 6월 19일 사망 8명, 부상 12명의 대형 인명피해가 발생한 서울 '잠실 고시원 화재'는 건물 지하1층 노래방 업주가 저지른 방화로 드러났습니다.

이 사고를 수사 중인 '서울 송파경찰서'는 22일 이 고시원건물 지하 노래방 업주 정모씨(52)를 '현조건조물방화치사 혐의'로 긴급체포했습니다. 정씨는 "사귀고 있던 3층 고시원의 여자가 최근 잘 만나주지 않아 홧김에 노래방 소파에 휴지를 풀어 놓고 불을 질렀다."고 진술했다고 경찰은 전했습니다. 당시 정씨는 혈중 알코올 농도 0.108%의 만취 상태였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혀는 마치 불과 같이 모든 것을 태워 버릴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악들과 연관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범죄 하도록 만듭니다(Burdick).

이와 같이 우리 몸에서 혀는 비록 가장 작은 지체 중의 하나이지만 말이 곧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 것'으로 말은 능력이 있습니다.(3-6절)

따라합시다. “말에는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가 있습니다. 즉, 말하는 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말하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입으로 믿는 대로 시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한 마디의 말은 작은 것이로되 무심코 내 보내는 한 마디의 말은 다른 사람과 우리가 속한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칩니다. 말이 우리 인간사회나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아주 대단한 위력을 나타냅니다. 잘못된 말로 가정이 깨어지고 자녀가 탈선하고 사회가 혼란하고, 정치가 바로 서지 않는 것은 따지고 보면 언어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교훈하실 때, 마태복음 7:1-3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비판을 하고 헤아리는 사람은 자신을 먼저 살피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색 안경을 끼고 보니 모든 세상이 색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적인 자리든지 공적인 자리든지 꼭 필요한 말만하고 그렇지 않으면, 상대의 말을 많이 듣는 편이 되어야 합니다. '말을 많이 듣다보면 그 사람 의 인격, 됨됨이, 생각,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하여 모두 다는 알지 못하지만 대강은 알 수 있게 됩니다.

가장 나쁜 사람은 '자신도 온전하지 못하면서 남의 약점과 아픈 곳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 '남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원칙을 따지기를 좋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 자신에게 관대하듯이 남에게도 관대하게 대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살리는 말로 길들여야' 합니다(7-8절).

본문 7-8절에 보면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여지지만 사람의 혀를 능히 길들일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물원이나 곡마단에서 잘 길들여져서 사람들 앞에서 조련사의 지시대로 움직이며 조롱을 떠는 짐승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모든 짐승들은 조련사에 의하여 조련되고 길들여집니다. 그러나 사람의 혀는 작은 것이로되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능히 길들 일 수 없는 혀이기 때문에 어떤 때는 그 혀를 기지고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어떤 때는 같은 그 혀를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형제를 저주하기도 하는 것입니다.(9-10절)

이와 같이 우리의 언어생활을 살펴보면 때로는 좋은 말을 하지만 때로는 같은 입으로 형제의 인격을 모욕함으로 상처를 입히고, 저주하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성도들은 그 언어생활부터 거듭나야 합니다. 앞 절에서 언급한 바대로 인간은 모든 짐승을 다스리고 길들였습니다. 반면에 인간은 자신의 지체 중 하나에 불과 한 혀를 스스로 제어할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앞 절에서 인간이 다스린 동물과 본 절에서 인간이 다스릴 수 없는 혀를 대조시켜서 혀의 악함과 파괴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록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는 혀를 제어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의 혀는 성령에 의해서 지배되며,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과 은혜로 말미암아 제어될 수 있습니다(Burdick, Moo, Mayor, Martin). 할렐루야!

본문 11-12절에 보면 우리의 언어생활을 "샘과 열매"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외부로 나타내는 것이며, 인격의 표현인 것입니다. 즉, 우리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그 언어생활의 정도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같은 입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형제를 저주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입술과 혀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돌아서면 형제를 비판하고 비방하는 말로 가득 채울 때가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입술을 통해 형제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이간질하는 말을 일삼을 때가 있습니다.

한편 '구멍'을 나타내는 헬라어 '오페스'(* )는 땅의 갈라진 틈 또는 바위 표면에 갈라진 한 틈을 의미합니다(Roberts-on, Tasker, Adamson).

이러한 틈새에서 솟아나는 두 종류의 물 즉 '단 물'과 '쓴 물'은 '신선한 물'(fresh water)과 '짠 물'(salt water)을 가리킵니다(NIV, RSV). 한 샘에서 신선한 물을 내놓다가 다시 짠 물을 내놓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Moo, Martin, Ada-mson), 만약에 신선한 물에 쓰거나 짠 물이 첨가된다면 그 물은 이미 신선함을 잃어 효력을 발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물을 마시는 자에게 피해를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입에서 찬양과 저주가 나오는 것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혀가 사악하게 활용 되었을 때 그 말은 바로 이 쓴 물과 같아져서(Moo) 비극을 초래하며 전체를 그릇되게 함을(Martin) 깨닫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야고보는 자신의 마지막 권면을 위하여 두 가지 비유를 들었습니다. 첫 번째 비유는 ‘한 우물에서 두 가지 종류의 물을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쓴 물을 내는 우물에서 단물을 동시에 낼 수 없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입은 하나인데, 그 한 입으로 찬양과 저주를 낼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비유는 ‘한 나무에서 두 가지 종류의 열매를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에서 감을 맺을 수 없으며, 감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언어생활의 성패는 우리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의하여 조절되는 것입니다. 악한 것을 담고 있으면 우리의 언어생활은 악할 수밖에 없으며, 선한 것을 담고 있으면 우리의 언어생활은 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2장 34-35절에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말씀한 내용 중에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말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사람의 말은 곧 그 사람의 속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언어생활을 살펴보면 그 사람의 마음과 인격과 신앙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언어생활은 곧 그 사람의 마음의 표현이요, 인격의 표현이며, 신앙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말 중 우리의 자녀, 부부, 성도들의 생명 속에 파고들어 생명의 씨앗의 역할을 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파고들어 사망의 씨앗의 역할을 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미국 정신과 의사 ‘제럴드 젤리슨 박사’는 “사람들이 평균 8분에 한 번씩 거짓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해 있기 때문에 언어 관습이 거짓말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내 자랑 같지만”으로 운을 떼는 사람은 사실은 자기 자랑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드리고 싶지 않지만”으로 얘기를 시작하는 사람도 사실은 꼭 그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약하고 악하므로 늘 자기방어와 자기 이익을 챙기게 되고 그 과정에서 거짓말은 자신도 모르게 싹트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내용이 사실이고 상대에게 유익을 준다고 하더라도 공동체의 덕을 살리는 말이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의 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어떻게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 중에는 부정적인 사람이 있고 긍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특성은 말로써 드러납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무슨 말을 해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

생각을 해도 안 될 조건만 찾아내고, 말을 해도 안 될 조건만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람은 생각과 말이 긍정적입니다. 결과를 보면 긍정적인 사람이 성공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는 역동적인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말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하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하면 살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우리의 언어생활을 통해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자신의 말을 다듬어 나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입술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3절에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라고 한 말씀에서 ‘어거한다.’는 “말은 내가 가고 싶은 대로 끌고 간다.”는 말입니다. ‘내 입술에서 나오는 말도 내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피그말리온 현상’ 입니다. 내 운명은 내가 말하는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난 이런 사람이 된다.’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난 안 돼, 난 글렀어.’ 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안 되기만 기다리고 사는 사람이며,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난 틀렸어! 틀렸어!’ 하는 사람은 좋은 일이 생기면 ‘어~ 이상하다. 글쎄 이럴 리가 없는데, 잘된 것은 뭔가 잘못된 거야!’ 라고 말합니다. 이건 안 되잖아! 이건 안 되잖아!

그러다가 재수 없는 일이 벌어지면 ‘맞아! 그러면 그렇지. 재수 없는 내 팔자 어디 갈까봐?’ 라고 말합니다. 이건 안 되잖아! 이건 안 되잖아!

이런 사람은 불행을 기다리며 사는 어리석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아니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는 정말로 나 자신에 대하여 얼마나 긍정적으로 말하고 삽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앞날에 대하여 얼마나 소망스럽게 말하는가에 대하여 실상과 사정을 알게 되면 깜짝 놀랄 일들이 많습니다.

민수기 1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한 것을 기억하시기에 ‘들린 대로 행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광야 40년을 방랑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죽겠네, 죽겠네.” 라고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릴 죽이려고 여기까지 끌고 왔나?”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듣다가 마침내 “들린 대로 행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고 싶다고 계속 말했으니 내가 죽여줄께’ 그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을 다 듣고 계십니다. 또한 나의 속사람이 내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인도합니다. 내 말은 내 운명을 지도합니다. 그러니 말조심해야 합니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한 폴란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소년은 음악학교에 입학했으나 교수로부터 매우 비관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네 손가락은 너무 짧고 굵다. 유연성도 부족하다. 다른 악기를 택하도록 하라." 소년은 낙심이 되고 마음의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만찬회에서 피아노를 쳤습니다. 그런데 식사가 끝날 무렵 한 신사가 소년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너는 피아노에 탁월한 소질을 갖고 있다. 열심히 노력해라." 소년은 중년신사의 격려에 크게 고무되었습니다. 이 노신사의 이름은 '안톤 루빈스타인'이었습니다.

소년은 그날부터 하루에 일곱 시간씩 피아노를 연습했습니다. 그리고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피아니스트로 성장했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피아노의 천재'로 불리는 ‘잔 파데레우스키’입니다. 소년도 지혜로 왔지만 충고하는 사람 역시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루빈스타인 존경받는 본받을 만한 사람의 말이 효과를 보고 영향력을 키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어느 날 한 여인이 아들을 데리고 간디에게 상담하러 왔습니다. 여인은 간디에게 “자기 아들이 사탕을 너무 많이 먹으니 많이 먹지 않도록 이야기 해 달라.”고 했습니다. 여인은 생각하기를 훌륭하신 분이 아들에게 그러한 충고를 하면 아들이 잘 순종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간디는 여인에게 일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일주일 후에 여인은 아들과 함께 다시 간디를 찾아 왔습니다. 간디는 아들에게 "얘야 사탕을 먹는 것은 몸에 해로우니, 먹지 않도록 해라."고 했습니다. 여인은 간디에게 "별다른 이야기도 아닌데 왜 일주일씩 기다리게 했다가 다시 오게 하여 이제야 말씀하십니까? 그런 이야기라면 그때 해주셨어도 됐을 텐데요."라고 했습니다.

간디는 "나도 실은 그 동안 사탕을 많이 먹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일주 전에 나는 사탕을 끊었지요."라고 했습니다. 간디는 옳은 가르침이라고 해도 자신이 행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복된 소식을 전하고, 상한 심령을 치유하고, 좌절과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을 일으켜 살리기 위하여 우리에게 혀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언어의 표현이 그 근원으로부터 나오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언어는 곧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말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을 알 수 있고 인격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사람도 자기의 말을 뛰어 넘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에 의하여 우리의 삶이 더욱 풍요로워지는 축복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변에 망한 사람이 많습니다. 힘들고 어렵게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돈이 없어서? 아닙니다. 기술 부족 때문에 그것 때문에 망한 사람도 몇 퍼센트 안 됩니다. 그럼 뭐 때문에 망했을까요? 죽이는 말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정의한다면 말이란 내 인격이요. 나의 미래의 운명이 됩니다. 그리고 심리학에서 말하는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는 반드시??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이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인생을 망치게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로 죽을 사람을 살리기도 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가 “주여! 내 입술에 파숫군을 세워 주시옵소서(시 141:3)! 라고 한 말씀을 명심하고 우리도 이런 기도와 피그말리온 현상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최후에 심판대에서 "무슨 무익한 말을 할지라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아니하여 최선을 다하여 나의 입술을 통제하고, 다스리므로 말에 실수가 없는 온전한 사람들이 되시고 내가 말한 복된 말 때문에 복된 인생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황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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