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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능자와 다투는 자 (욥 4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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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에는 욥의 고난당한 사건을 중심으로 당사자인 욥과 그의 친구들 간에 끝없는 공방전으로 변론하는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기들의 철학과 주관적인 논리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말장난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다 들으신 하나님께서 욥에게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찌니라”고 하였습니다(욥 38:3). 그러나 정작 욥은 아무 말도 못하고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고 하였습니다(4절).
오늘도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 중에서 속으로 하나님께 불평하며 전능자와 다투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이며 결국에 무엇이라 대답하게 되는지 살펴보면서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I. 우매무지한 자입니다.

시편 73편에 나오는 아삽의 시를 보면 하나님께 대한 불평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는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1) 악인이 형통함을 보고 불평했습니다.

시편 73:2-5에 “나는 거의 실족할 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옛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한 것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볼 때 심술이 나는 경우이지만 여기 아삽의 노래는 그런 비뚤어진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악인을 징벌하고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어서 정의로운 사회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공통적으로 구하는 내용입니다.
구약의 하박국 선지도 하나님께서 강포를 행하는 자에게 벌을 내리지 않으심으로 악인이 형통케 되는 것을 볼 때 참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박국 1:4에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2) 자기는 완전한 것처럼 착각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에게 벌을 내리지 않으신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다르게 말하면 자기에게 복을 주지 않으신다는 불평인 것입니다.
말라기 3:14-15에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똑같은 척도를 가지고도 자기에게는 유리하게 적용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불리하게 적용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심판을 하지 않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될 악인은 형통케 되고 복을 받아야 마땅한 자기는 오히려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신판이 이루어질 때 살아남을 자가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말라기 3:2에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의 심판을 예견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시편 73:12-19에 보면 하나님의 처사가 공의롭지 못하다고 불평하던 사람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결말을 보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12절에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비하여 14절에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13절에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공의에 의심을 품고 불평하며 마음에 고민하던 사람이 졸지에 악인이 몰락하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16-19절에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그는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크게 깨닫고 하나님께 고백하였습니다(20-21절). 22-23에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

Ⅱ. 하나님께 반항하는 자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체험이 있는 사람도 자기의 개성이 강하고 주관이 확실하다 보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맞서며 반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도 자기 마음에 안 맞으면 수용하기를 거부합니다.

(1) 독선적인 신앙입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은 그가 드린 제사를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안색이 변하고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지 아니했고 끝내 자기 동생을 쳐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하고 반항하였습니다(창 4:5-9). 이는 자기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여기며 하나님의 충고와 권면을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선지자 요나도 그런 사람입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는 배를 타고 다시스로 달아나 버렸습니다(욘 1:2-3). 그는 내심으로 이스라엘과 적대국 관계에 있는 니느웨 백성이 망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뜻을 곡해 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 불평하는 사람은 자기 나름의 도덕성과 정의감을 내세우곤 합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단정합니다(합 1:13, 말 3:15). 곧 죄를 지은 자는 당장 죽어야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에스겔 18:20에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악인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도 죽기는커녕 더욱 형통하고 잘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럴수록 악인은 교만하게 되고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회의를 가지게 됩니다. 이 경우 자칭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읽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따라 판단을 그르치고 맙니다. 에스겔 18:23에 보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심정은 예수님의 탕자 비유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가 용서하고 잔치를 베풀며 기뻐하는 것을 보고 큰 아들은 참을 수없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는 아비의 재산을 창기와 더불어 다 허비해 버린 아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받아주지 말고 엄벌에 처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은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눅 15:30-32).

(3) 자포자기 하는 자입니다.

자기의 주관이 뚜렷하고 그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매사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좌절하거나 낙망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고 그 기쁘신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는 믿음은 모든 것이 자기주장대로 되어야 그것을 은혜요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약시대 불의 사자로 불리던 엘리야는 한 때 아합왕과 그 왕후 이세벨에 맞서서 여호와의 종교를 파수하였고, 갈멜산 위에서는 850명이나 되는 우상의 선지자들을 진멸하기도 한 무적의 용사입니다. 그러나 세상일이 자기의 원대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오히려 바알과 아세라의 세력아래 짓밟히는 것을 보고는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기에 이르렀습니다(왕상 19:4).
요나도 니느웨성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징벌이 내리지 않는 것을 보고 심히 분노하면서 죽고 싶은 심정을 토로하였습니다. 요나 4:3에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Ⅲ.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지 못한 자입니다.

성도가 오래도록 극심한 고난 중에 시달리게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곤 합니다. 본문 말씀 2절을 개역판에는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욥은 의롭고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칭찬 받은 사람입니다(욥 1:8). 그러나 그도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극심한 고난에 시달리게 되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 고난이 극심하였을 때입니다.

욥이 당한 고난은 보통 인간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울 만큼 극심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당한 고난은 육체적인 고통과 함께 정신적인 충격을 겸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그는 동방에서 가장 큰 자라고 일컬을 만큼 모든 조건을 고루 갖춘 명망가였습니다. 7남3여의 자녀를 두었고, 양이 7천, 약대가 3천, 소가 5백 겨리, 나귀가 5백이나 되고 많은 종을 거느린 대 부호였습니다.
그런데 한순간 모든 재산은 없어졌고 자녀들은 몰사해 버렸습니다. 거기에다 그의 몸은 머리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악창이 나서 살이 뭉개지고 진물이 흐르는 등 통증으로 견디기 힘든 지경이 되었습니다. 욥기 2:8에 보면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라”고 했습니다.
그런 지경에서 욥은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며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욥기 3:11에는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이처럼 여간 신앙이 깊고 경건하게 사는 사람도 극심한 고난 중에 견디기 힘들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께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고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 때입니다.

성도가 때때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고난을 당할 수 있고, 또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을 수행하다가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지만, 전혀 원인을 모를 고난에 부딪치게 될 때도 있습니다. 특히 욥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허락하시고 의도적으로 겪게 되는 고난이지만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로 논란이 분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욥의 아내를 위시하여 그를 찾아온 친구들은 욥이 당하는 고난의 현장에서 그 원인을 규명하느라 끝없는 논쟁을 벌였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죄 없는 자에게 벌을 내리시는 일이 없다는 전제 아래 욥에게도 숨겨 놓은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도록 닦달하였습니다(욥 8:3-7).
그럴수록 욥은 마음이 초조하고 답답합니다. 욥기 23:3-5에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 그 앞에서 호소하며…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고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욥기 23:8-9에는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하고 탄식하였습니다.

(3) 인간의 한계를 노출시킨 것입니다.

욥과 같이 고난 중에 처한 성도가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면서 그를 만나고자 애를 써도 응답이 없으면 당황해하고 낙심을 하게 됩니다(시 42:3). 그렇게 되면 저절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와 만나서 따지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와 같은 경우는 누구에게나 오는 공통적인 현상으로서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욥은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찌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욥 9:3). 그는 또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랴”고 하였습니다(욥 9:12).
결국 인간은 어쩔 수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승복하게 되면 불평과 원망대신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고 하였습니다(욥 23:10). 그는 결국 하나님을 향하여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욥 40:4).
이것이 바로 성도가 고난 중에 받은 은혜입니다. 다윗은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찌어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고 하였습니다(시 3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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