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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휴가는 소생의 기회입니다! (시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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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휴가는 소생의 기회입니다!
본문 : 시편 23편 3절

1. 하프타임

지난 6월 독일 월드컵 때, 일본과 호주 경기를 해설하던 차두리 선수에게 아나운서가 물었습니다. “호주가 전반전에 졌는데 호주 국가대표팀 감독인 히딩크가 하프타임 때 선수들에게 뭐라고 하겠느냐?” 그러자 차두리 선수는 “제가 히딩크 감독을 잘 알기 때문에 하프타임 때 선수들에게 침착하라고 했을 겁니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아나운서는 “그럼 2002년 당시 한국과 미국전 때 하프타임 라커룸 분위기가 어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차두리 선수는 “아, 그땐 제가 후보 선수였기 때문에 라커룸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고, 물은 아나운서나 그 곁에 있던 아버지 차범근 감독 모두가 식은땀을 흘렸다고 합니다.

차두리 선수의 말처럼 전반전을 뛰지 않은 후보 선수에게는 별 의미가 없지만, 전반전을 열심히 뛴 선수들에게는 반드시 하프타임이 필요합니다. 하프타임은 꿀맛같은 휴식 시간이기도 하고, 전반전을 돌아보며 후반전 작전을 다시 짜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밥 버포드(Bob Buford)라는 분이 「하프 타임(Half Time)」이라는 책에서 40대를 기점으로 인생을 전반전과 후반전으로 나누었습니다. 인생에도 전반전과 후반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며 자기 직업에서 성공하기 위하여 열심히 살아온 삶의 전반전을 끝낸 사람들은 전반전과는 다른, 그러면서도 인생의 승패가 결정되는 후반전을 잘 준비하여 성공하는 인생이 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하프타임이라는 것이죠.

인생에 전반전과 후반전이 있고, 그 중간에 하프타임이 있는 것처럼, 한 해의 삶에도 전반전과 후반전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름휴가는 전반전과 후반전 사이의 하프타임과 같은 기간입니다.

이번 주부터가 본격적인 휴가 기간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미 휴가를 다녀오신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이번주간부터가 대부분의 휴가객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기간입니다. 꽉 막힌 고속도로, 서울에서 강릉이나 부산까지 몇 시간 걸린다는 방송,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괜찮은 곳은 다들 사람들로 넘치고 ….

‘이렇게 복잡하고 먼 길을 고생 고생해서 가야 하나? 또 거기 가 보아야 사람들로 붐벼서 제대로 쉬지도 못할텐데, 이래도 가야 하는가?’라고 투덜거리면서도 가는 것이 휴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이번 휴가는 다른 때와 다르기를 바랍니다.

2006년 한 해의 절반을 보낸 여러분들은 하프타임인 휴가 기간을 통하여 지난 반 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절반에 대한 점수를 매겨보시고, 후반기를 어떻게 살지를 계획하는 시간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은 한 해의 하프타임과 같은 휴가를 맞으면서 그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소생”

오늘 본문 3절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사용된 “소생시키다(슈브)”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나오는 말이며, 그리고 아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 말입니다.

1) 소생의 의미

이 말의 기본적인 의미는 ‘되돌아가(오)다, 회복하다’입니다. 우선적으로 이 말은 하나님이나 사람이 주체가 되어서 ‘다시 돌아가다 혹은 다시 돌아오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이 말은 ‘다시’라는 조동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회개’의 의미로서 죄를 버리고 악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여호수아 24장 23절은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라”, 이사야 30장 15절에서는 “너희가 (하나님께로)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예레미야 4장 4절은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여호와께 속하라” 등에서 이 “소생”이라는 말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소생”의 일차적인 의미는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 앞에 서는 것입니다.

2) 성경의 또 다른 용례

다음으로 이 “소생”이라는 말은 창세기 45장 27절에서 조금 특이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 야곱이 … 기운이 소생한지라.” 여기서 ‘소생한다’는 말은 야곱이 죽을 줄로만 알았던 아들 요셉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한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그 앞에 나오는 37장 35절 “…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는 야곱 자신의 말과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즉 창세기 37장 35절에서 야곱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는 다른 아들들의 보고를 들었을 때, 자신도 아들이 있는 죽음의 세계로 내려가는 것, 즉 자신도 아들과 함께 죽었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그는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잊지 못했고, 그는 죽음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요셉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 즉 생명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마 우리나라 표현으로 ‘소생되다’이라는 말은 여기에 가까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소생이라는 말의 두 번째 의미는 죽음이나 그와 비슷한 상태에서 살아나는 것, 회복하는 것입니다.

3) 왜 목자이신 하나님의 양들에게 소생이 필요한가?

이러한 소생의 의미와 함께 이제 저와 여러분들은 오늘 ‘본문의 상황에서 이 소생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물어야합니다. 시편 23편은 목자이신 하나님과 그의 양인 백성들의 관계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왜 하나님의 양들에게 소생이 필요한 경우가 생기는가? 하나님의 양인데 어쩌다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야할 상황, 혹은 생명을 다시 회복해야할 상황이 생기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예수님의 비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는 일백 마리의 양을 소유한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는 것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은 목자가 부주의해서 잃은 것이 아니라,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길을 잃었다”는 말(πλαναω)은 ‘스스로 속다’, ‘오해하였다’는 뜻입니다. 즉 양이 길을 잃었다는 것은 양이 자기 꾀에 속았거나, 아니면 뭘 잘못 알고 잘못 판단하여 길을 잃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진리에 대해, 세상과 삶에 대해, 아니 자신의 상태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그 지식에 따라 바른 판단을 내리시며 살아오셨습니까? 비록 성도라고 할지라도 잘못된 판단과 시행착오로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잘한다고 했는데, 옳은 길이라고 선택했는데, 신중하게 결정한 일인데, 이 일만은 옳다고 결행했는데, 그만 실패로 치달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소생”이 절실한 자리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외부로부터, 즉 마귀의 시험 때문에 소생이 필요한 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마귀의 최대 사명은 성도를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입니다. 마귀는 양이 목자를 보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더 좋아하고 따르도록 만들려고 합니다. 이런 마귀의 유혹 때문에 양은 소생이 필요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때로는 세상의 지식이나 가치관이 양을 소생이 필요한 지경으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과학과 합리적인 눈으로 볼 때 도무지 기독교는 믿을 수가 없어! 너무나 비과학적이고 논리적이지 못하고 거짓말이고 사기 같애!” “내가 아는 기독교는 이런 것이 아니야”, “내가 아는 신앙은 이런 것이 아니야”, “내가 바라는 교회는 이런 것이 아니야” “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나는 신앙을 포기하겠다.” … 이런 생각들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게 되어 소생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이 욕심과 죄에 빠져서 소생이 필요한 상태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내 눈에 바라고 원하고 즐기는 것들, 그리고 이 세상의 자랑거리들로 인하여 그만 목자를 보지 못하고 길을 잃게 되고 살려달라고 외치는 자리에 있게 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생이 가지는 궁극적인 한계가 여러분을 소생이 필요한 상황으로 몰고 갈 수 있습니다. 사실 인생이 얼마나 연약합니까? 연약한 인생이 어렵고 각박한 현실을 살다보니, 어쩔 수없이, 본의 아니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넘어설 수 없는 인간관계, 갑작스러운 육신의 질병, 돈이라고는 씨가 말라 보이는 형편. 때로는 너무나 무거운 절망감이 짖누를 때가 있고, 때로는 비통하고 슬픈 마음이 물밀듯 밀려올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궁핍이 성도에게 밀려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고백하지 않은 죄, 불신자들과의 거룩하지 못하고 자신을 더럽히는 잡담, 타인에 대한 험담 등이 성도를 영적으로 잠들거나 혹은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또한 말씀에 대한 불순종, 개인적인 성경 묵상과 기도의 부족이 성도를 영적인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들은 우리가 의도적으로 저지르는 경우가 아니라, 인생 자체가 연약하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살아계신 하나님,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주님을 느끼고, 보고, 체험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영적으로 꽉 막혀 답답하기 짝이 없으며, 여러분의 실제 생활에서 목자되신 주님의 구체적인 인도를 받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혹시 여러분은 불안, 잦은 분노,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거나 헐뜯고, 불평과 원망 혹 책임전가가 입에 달려 있고, 주님의 나라와 교회에 대해 무관심하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무기력하고, 죄와의 싸움에서 늘 패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경건의 훈련을 무시하며, 말씀 묵상하는 일과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을 피하고 있으며, 기도의 깊은 세계를 경험하지 못하고 겉도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상과 같이 오늘 본문의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는 말씀은 여러분이 비록 하나님의 양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그 보호하심과 은혜로부터 떠나 “소생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여러분의 영혼이 어떤 심각한 상태, 혹은 영적인 죽음에 빠져있을지라도, 타락에 빠져있거나 방황하고 있을지라도, 슬픈 일이나 침울하고 암담하고 어두운 그늘에 있어 낙심해 있을지라도, 뭔가에 눌려서 고통과 지속적인 괴로움을 받고 있거나,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에 빠져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찾으셔서 만나주시고, 치료해주시고, 고쳐주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소생의 의미입니다.

3. 하나님께서 소생시키시는 방식

그러면 주님께서 문제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성도들을 소생시키시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요?

때로 하나님은 신자의 마음에 분명한 깨달음을 주시기도 합니다. “현재 내가 처해있는 형편이 정말 잘못되었구나!” “빨리 벗어나지 못하면 더 큰 일을 당할 수도 있겠구나!” 이런 경우는 참으로 감사합니다. 뭔가 잘못된 것을 금방 깨닫게 하시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때로는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나 아픔이나 슬픔을 당하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징계가 있습니다. ‘너 지금 잘못 가고 있구나! 길을 잘못 들어섰다!’ ‘너 지금 잘못하고 있어. 그러면 안된다’ ‘이 정도에서 그만해라! 계속 그러면 더 잃고, 더 아프고, 더 괴로울 것이다!’ 이런 경고와 징계로서 우리를 깨닫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성도의 환경이나 주위 사람을 바꾸실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적이고 마음만의 기쁨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기쁠 조건을 만들어 주시기도 합니다. 낙심하고 어려움에 처한 성도가 기뻐할 수 있도록 물질적인 것이든, 건강이든지, 대인관계든지, 불안과 고통과 문제의 원인이 되는 것들을 제거해 주시면서 “걱정하지 말아라”하시고, “이제는 안심하라”하시면서 소생시키실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때로는 신비한 힘, 영적인 힘이 전기 오듯 찌르르 와서 성도를 소생시키기도 합니다. 말씀 읽다가, 기도하다가, 아예 기도원에 짐 싸들고 올라갔다가 거기서 맛 보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적인 경험들이 바로 이것입니다.

또 때로는 현재 자신의 소생이 필요한 너무나 힘들고 아픈 상태가 하나님의 연단과 훈련의 과정이라는 깨달음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더 나은 모습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서게 하시려는 의도입니다. 그러니까 소생시킨다는 것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거룩한 심성을 본받고 그리스도처럼 장성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숨은 계획일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고생과 괴로움과 어려움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성장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의도적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알 때에 성도는 소생할 수 있습니다.

4. 휴가는 “소생”의 기회

말씀을 맺겠습니다. 2006년도의 절반을 보내고 잠시 쉬면서, 지난 전반기를 돌아보고, 남은 후반기를 잘 보내라는 의미의 휴가 기간을 맞았습니다. 휴가란 그냥 조용히 쉬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간다면 더할 수 없이 좋고, 맛 있고 분위기 좋은 음식점에 가서 모처럼 맛을 즐기는 일도 좋습니다. 책 읽기, 영화 실컷 보기, 아이들과 편한 마음으로 노닥거리고, 아내와 하루 정도는 밤새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리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 등 휴가 기간에 할 만한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휴가는 이것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번 휴가가 “소생의 기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모든 사람에게는 “소생”이 필요하다고 말씀했습니다. 양과 같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길을 잃는 경우가 많이 생기기 때문에, 마귀의 유혹이 심하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관에 속아서, 우리의 욕심과 죄 때문에, 그리고 인생으로서 넘어설 수 없는 한계, 즉 우리가 연약한 인생이기 때문에, “소생”이 필요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기 때문에 휴가가 필요합니다. 휴가가 “소생의 기회”, “소생의 시간”이기 때문이지요. 반 년 동안 소진한 육신의 힘을 되찾으시는 것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영성을 회복하십시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소생”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나 영적인 활기, 영적인 생동감을 되찾는 것’이 쉼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휴가는 여러분에게 바로 이러한 “소생”이 일어나게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그 은혜와 능력으로 채워지지 않는 휴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러한 소생이 이번 휴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시기 바랍니다. 저는 휴가를 몇 가정이나 구역이 함께 떠나실 것과 떠나기 전이나 그 곳에 교역자들을 초청하셔서 하룻밤 부흥회를 여시기를 적극 권합니다. 영적 회복이 없는 휴가는 정말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너무나 좋으신 우리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소생을 바라신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이 적당한 때와 장소에서 소생케 하시는 하나님을 불러 아뢰며, 그분의 소생케 하시는 능력을 구할 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영 육간의 모든 것을 소생케 하실 것입니다. 혹시 지난 전반기에 잃은 것이 있다면 후반기에 만회케 하실 것입니다. 아직 세우지 못했거나 구체적으로 정하지 못한 후반기의 새로운 계획과 더 나은 것들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자, 이렇게 하나님은 여러분의 소생을 위하여 준비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에게 나아가십시오. 그 얼굴을 구하십시오. 소생의 축복의 맛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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