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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노를 푸는 세 가지 말씀 (삿 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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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를 푸는 세 가지 말씀 (삿 8:1-3)

세상의 무수한 싸움과 분쟁과 전쟁은 대부분 노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번 독일월드컵에 프랑스의 지단선수가 화가 나서 세계인이 보는 앞에서 상대방 선수의 가슴을 해딩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단을 흥분시켜 퇴장시키기 위한 상대 전술에 넘어간 사건이기도 하지만 어머니와 누이를 창녀라고 욕하는 모욕적인 말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노하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요? 그런데 노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노에는 의로운 노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의 결과란 한결같이 두려운 것입니다. 사람의 노도 두렵지만 하나님의 노는 더욱 두렵습니다. 하나님이 노하시면 그 앞에 설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노아시대를 보세요.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물로 인종을 쓸어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소돔과 고모라를 보세요. 모두 유황불로 멸망시키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타락하여 세속에 빠지면 노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노든지 자신의 노든지 어떤 노든지 노를 푸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럼, 어떻게 노를 풀 수 있을까요?

그것을 기드온의 이야기 속에서 발견합니다. 이스라엘 옆에 미디안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미디안은 신기하게 쳐들어오면 군사 뿐 아니라 가족과 가축까지 끌고 와서 전쟁을 합니다. 그래서 그 나라의 보물과 양식과 의복은 물론 나무와 풀까지도 모두 먹어 치우는 그야말로 싹쓸이 전법을 구사하는 무서운 나라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300명의 용사를 주시면서 미디안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대부분 죽고 쫓겨 가던 미디안 군대는 에브라임 산지로 도망쳤습니다. 기드온은 남은 적을 진멸시키기 위하여 에브라임 산지까지 따라갔습니다. 미디안 패잔병들은 기력이 다해 그들을 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운 것이었습니다.

이 때 그 곳에 살고 있던 에브라임 족속들이 그때서야 전쟁에 동참하였습니다. 그 전에는 멀리서 강 건너 불구경만 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미디안 대장 오렙과 스엡을 잡아 죽인 후 기드온 에게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부르지 않았다고 불만을 크게 토했습니다(삿8:1). 그러나 기드온은 성격이 온유한 농사꾼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때 기드온은 에브라임을 달랬습니다. “나의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미디안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붙이셨으니 나의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삿 8;2-3) 그랬더니 그 교만한 에브라임의 노가 풀렸습니다. 이처럼 노를 푸는 방법이 있습니다.

1. 노를 풀려면 겸손의 말을 해야 합니다.

화가 잔뜩 난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기드온은 “나의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2절) 말했습니다. 이것이 노를 푸는 지혜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어 보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때리시려던 손을 멈추시고 쓰다듬어 주실 것입니다. 이 겸손이 들어가야 바른 회개입니다. 겸손 없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9-10)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빌2:5)라고 했습니다.

정치가 벤자민 프랭크린은 포용성 있고 겸손하기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존경하는 스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승의 집에 들어가려면 문이 낮아서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프랭크린은 스승 집을 방문하여 말씀을 듣다가 돌아가면서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머리를 문에 세게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스승이 “여보게, 머리를 숙이게. 자네가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부딪치는 일이 많을 걸세. 그러나 머리를 푹 숙이면 부딪치는 일이 없을 것일세.” 그 후 프랭크린은 이 스승의 말을 잊지 않고 그렇게 훌륭한 정치가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나를 낮추는 말은 하나님의 진노도 사람의 노도 다 풀리게 합니다.

2. 노를 풀기 위해서는 인정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기드온은 에브라임 사람들이 노하였을 때 그들을 인정하여 주는 말을 하였습니다.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삿8:2) 우리는 겨우 시작하였고 당신들이 잘 마무리하였으니 최고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기드온은 상대방의 잘한 점만을 부각시켜 높이는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은 인정받을 때 가장 기쁜 것이고 오해 받을 때 가장 괴로운 것입니다.

어떤 나라가 강대국의 침입을 받자 소국 왕은 사신을 보내어 어떻게 하든지 전쟁을 막아보라고 하였습니다. 사신이 강국 왕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내가 보니 우리 왕은 초생 달 같고 대왕은 보름 달 같은 왕이십니다. 보름 달 같은 왕이 초생 달 같은 왕을 쳐서 무엇하십니까? 보나 마나 우리가 집니다. 전쟁을 그만 두시지요” 이 말을 들은 대왕은 기분이 좋아서 전쟁을 포기하였습니다. 전쟁을 그치게 하고 돌아 온 신하에게 소국의 왕은 대노하여 “너는 전쟁을 막은 공로로 상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나를 무시한 죄로 사형이다.” 그 때 사신이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생각하여 보십시오. 보름달은 점점 작아지는 달이지만 초생 달은 점점 커지는 달이 아닙니까?” 이 말 한 마디에 왕의 노가 풀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친구가 되거나 원수가 되기는 아주 쉬워요. 아무리 좋은 말이어도 자꾸 잘못을 말하면 사이가 멀어집니다. 남녀의 의식적 차이가 그것이랍니다. 아내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꾸 지적하지만 남편의 귀에는 그 소리가 사랑의 말로 들리지 않는답니다. 그러므로 이런 가정과 교회와 사회는 평안한 곳이 없습니다. 주님처럼 꼭 칭찬하시고 해야 낙심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은 줄 내가 안다한 바울의 말대로 칭찬 없는 율법은 우리 안에 조금의 선한 것도 존재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잘하지 못해도 좋은 점을 발견하여 인정해 주고 늘 칭찬해 주면 장점도 많아지고 사이가 가까워집니다.

이것이 율법과 복음의 차이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흠을 발견하여 자꾸만 옳은 소리를 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고 힘을 빼고 좌절하게 하고 심판 아래 놓이게 만듭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죄인일지라도 우리를 예수 안에 의롭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추한 우리지만 아름답다고 말해요. “그런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아무 공로 없어도 예수 공로로 모든 복과 약속과 영광과 천국을 줍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복음 안에서 새로운 자화상 정립이 가장 시급합니다.

그런데 사람만 그럴까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자녀들이 인정하고 높여드리면 기뻐하십니다. 저는 자녀들이 인정해주고 높여줄 때 가장 기쁘데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다름 아니라 예배입니다. 예배를 영어로 워싶(Worship)이라고 하는데 이 용어는 가치와 신분이라는 의미가 합해진 것으로 존경과 존귀를 받을 가치가 있는 분에게 그 신분에 합당한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시29:2, 계5:12).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귀에 합당하게 높이는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만나주시고 말씀하시고 해결해 주십니다. 말하자면 예배를 통해 노를 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높이는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세요. 삶 속에서 날마다 찬송하세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모든 지혜와 지식의 근본입니다. 이 때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3. 노를 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여야 합니다.

기드온은 에브라임이 노하였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미디안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붙이셨으니 나의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삿8:2-3) 했습니다. 그러자 그 교만하고 악한 에브라임 지파도 노를 그쳤습니다.

사실은 에브라임은 그런 근성이 있는 지파였습니다. 기드온 당시에도 전쟁할 때에는 가만히 있다가 끝에 가서 참여하고 자기들이 다 한 것처럼 떠들어댔습니다. 그런데 그 버릇 누구 주겠습니까? 이런 일이 입다 시절에도 일어났습니다. 암몬 족속이 쳐들어 왔습니다. 입다가 생명을 걸고 나가서 싸웠습니다. 그 때에도 에브라임 사람들은 입다를 기생의 소생이라고 무시하다가 입다가 이기니까 그 때야 참여하여 싸웠습니다. 그러고도 자기들을 부르지 않았다고 입다를 불에 살라 죽이려고 했습니다(삿12:1). 그러자 입다는 이런 에브라임 사람들을 가만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과 전쟁하여 죽이고 도망가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에브라임 방언으로 색출하여 모조리 죽였습니다. 이런 죽여야 마땅한 인생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노를 그치게 합니다.

시라소니로 잘 알려진 이성순씨는 김두환과 이정재 등과 같이 주먹으로 세상을 움직이려한 주먹잡이입니다. 김두환도 이정재도 그의 주먹 앞에 꼼짝 못하던 주먹잡이, 일본 깡패 40명을 혼자서 때려눕힌 사람, 이북민을 위해 권리를 요구하다 이정재에 의해 린치를 당해 이정재에 한을 품었던 사람, 그러나 그는 최근에 작고하신 신앙 좋은 아내(김태련씨)를 두어 예수 믿고 품고 다니던 권총을 교회에 내놓고 자기의 원수 이정재를 용서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노를 풀게 했습니다. 그를 취재한 당시 신문 기사를 보니까 그가 전에는 이기는 것만이 살아남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이기고 지고는 헛된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만이 진실된 것이라고 했다 했습니다. 그리고 배운 것이 주먹 밖에는 없었지만 선행하며 남은여생을 진실하게 살았다고 했습니다. 누가 그 노도와 같은 노를 풀리게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진정한 화해를 줍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노가 아무리 극렬한 지옥불 같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그 노하심을 풀리게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보혈 흘리시고 십자가를 지신 용서의 복음을 믿으면 하나님은 그 어떤 죄라도 다 용서하시고 노를 거두십니다.

저를 위해 항상 기도해 주시는 분이 쪽지를 보냈어요.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무척이나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목사님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느낌이 제 영혼 속에 넘실거립니다. 정말 부럽네요. 날마다 다윗처럼 춤추시고 사셔야 되겠어요.” 이런 내용의 쪽지 싫어할 사람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저는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님 공로 의지한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정답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노를 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 복음 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말씀에 의지할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보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공로 다 버리고 예수 공로 들고 하나님 사랑 받고 천국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자신을 화목 제물로 주심으로 우리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노를 풀어주셨습니다. 우리도 노를 푸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의 노를 풀어드립시다. 그러기 위해서 겸손히 낮추십시다. 인정하여 높이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고 화평의 복음을 믿으십시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의 노를 풀어 온전한 사랑과 화평을 누리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성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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