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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6) (수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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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2월 마지막 주일은 23년을 정말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기셨던 임택진 목사님의 은퇴식이 있었던 날입니다.
당시 부목사였던 제가 사회를 하였던 은퇴식에서 가장 잊을 수 없었던 순서는 임 목사님의 인사였습니다.

목사님의 인사는 약 10초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명한대로 행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우리는 다 무익한 종이라 마땅히 할 일을 한 것 뿐이니이다 할찌니라.>는 누가복음 17장 9절 말씀을 암송하신 후 <무익한 종은 물러갑니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라고 하신 후 인사를 마치셨습니다.

당신의 23년의 목회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시는 것 같았습니다. 자신의 공적이 분명히 있는 목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에 대한 인식조차 없는 분 같아 보였습니다. 헌법이 정한 은퇴를 5년이나 앞당겨 정말 깨끗이, 아름답게, 근사하게 물러나셨습니다. 은퇴하신 후 교회가 후임 목사님에 의하여 자리가 잡히기 전까지는 교회에 오시지도 않으셨습니다. 교회에 대하여 그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으셨습니다.

임 목사님보다 더 크게 사역하신 분들은 참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임 목사님보다 그 뒤와 끝이 깨끗한 분은 이제껏 쉽게 보지 못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자신의 공과 성공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것을 대개 너무 자랑스러워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섬긴 사역의 성공이 자신 때문인지 하나님 때문이지를 착각하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만 생각은 그렇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와 같은 착각에 빠지면 뒤와 끝이 흐려집니다. 추해집니다. 어리석어 집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어리석음은 성공적인 목회와 사역을 일순간에 무너트리고 맙니다. 자신도 무너지고 교회도 무너집니다. 어느 조직에 있어서나 리더쉽의 이양은 그 조직의 사활이 걸려 있는 가장 중요하고도 위험한 순간입니다. 특히 탁월하고 훌륭한 리더에 의하여 성공하였던 조직에 있어서는 그 위험성이 훨씬 더 높아집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오늘 본문인 여호수아 1장에서의 모세와 여호수아의 리더쉽 이양은 정말로 완벽해 보입니다. 그렇게 완벽할 수가 없습니다.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들은 사사와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의 리더쉽은 그 리더쉽이 세습되지 않는다는 면에서 왕과 달랐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상 나라를 보고 자기들에게도 왕을 달라고 하도 하나님을 조름으로 허락을 해 주셨지만, 본래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리더쉽은 왕이 아니라 사사와 선지자와 같은 모양이었습니다. 사사와 선지자는 주어진 사명이 끝나면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사사와 선지자의 직은 세습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실 제사장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제사장은 레위 지파 사람들만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제사장직의 세습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대제사장이었다고 그 아들이 대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사 중에 기드온이라는 우리가 잘 아는 사사가 있습니다. 모든 사사들이 그러하였듯이 기드온도 자기 백성을 미디안이라고 하는 나라로부터 구원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드온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당신의 아들과 손자가 우리를 다스려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한 마디 말로 그와 같은 요청을 거절합니다. 사사기 8장 22절에서 23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는데 정말 너무 근사합니다.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사람들의 대부분은 백성들이 원치 않아도 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 왕이 되고 싶어 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백성들이 진심으로 자신이 왕이 되기를 원했는데도, 자신의 아들과 손자가 대를 이어 왕이 되어달라고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사양합니다. 백성들은 기드온이 자기를 미디안에 손해서 건져 냈다고 이야기하지만 기드온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건져내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와 내 자손이 저들을 다스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실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성경 속에서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들이 큰 공을 세운 위인들이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저들은 모두 다 큰 공을 세운 위인들이었지만 저들의 공통적인 근사함은 저들 자신은 자신의 공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공을 자신의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큰 공을 세웠다고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것을 자랑하거나, 자랑은 고사하고 인식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뒤와 끝이 너무나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면에서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뒤가 깨끗했던 하나님의 사람 중 하나가 모세입니다. 세상에 큰 일 큰 일해도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출애굽케 하여 가나안 땅까지 인도한 일보다 큰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가 세운 공만 생각하면 왕이 되어도 마땅합니다. 왕이 되어 자식에게 그 권력을 세습하고 이양하여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에게 자식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모세는 자신의 리더쉽을 자신의 시종을 들던 여호수아에게 이양합니다. 조금의 망설임이나 갈등 없이 여호수아에게 넘겨줍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선택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 번 설교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권력이 세습되는 것처럼 후진적인 것은 없습니다. 북한이 세상에서 가장 후진적인 나라가 된 이유 하나만 꼽으라고 하면 북한이 현대 사회에 있어서 권력이 세습되는 거의 유일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직도 왕이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국가에도 왕은 상징일 뿐 실제 정치적인 권력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왕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부흥을 일구어낸 교회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 부흥과 성장의 뒤 끝이 너무나 좋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이끌어 낸 이 시대의 모세와 기드온들의 대부분이 왕과 같아졌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이끌어 내는 동안 장인 이드로가 권면하여 모세는 백부장과 천부장과 같은 중간 리더들을 세웠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 할 때 12 정탐꾼들을 세웠는데 저들은 각 지파를 대표하는 리더들이었습니다. 백성들을 이끄는 리더들에게는 당연히 그에 합당한 권력들이 주어졌을 것입니다.

수 십 만 명이나 되는 조직을 40년 동안이나 이끌려면 적지 않은 권력들이 있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세워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려 하셨을 때 정말 조금의 요동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갈등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특히 적지 않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모두 모세 같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두가 다 느보산에서 죽는 마음과 심정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소명을 주시자 여호수아는 즉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백성들의 유사들 즉 지도자들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삼일 안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터이니 양식을 준비하라 명령합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지파에게 전쟁의 선봉에 서라고 명령합니다.

그와 같은 여호수아의 명령에 대한 백성들의 대답이 여호수아서 1장 16절 이하에 나옵니다.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우리는 범사에 모세를 청조한 것 같이 당신을 청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무릇 당신의 시키시는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는 자 그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당신의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 하소서> (수 1:16- 18)

제가 볼 때 이 때가 이스라엘이 가장 강력했던 때입니다. 이와 같은 힘을 가진 나라와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가장 강력한 힘은 모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백부장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천부장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볼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가장 좋았던 때가 바로 이 때였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자신의 권리와 자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갈등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40년 동안 광야생활에서 세웠던 공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 공에 대한 지분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여호수아를 시샘하지 않았습니다.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자 그 자리에서 여호수아를 모세처럼 인정합니다. 생각 없이 읽으면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조금만 생각하고 그 말씀을 읽으면 그것이 얼마나 훌륭하고 대단하고 위대한 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아무리 훌륭해도 사람입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능력 있는 사람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승리케 하시고 성공케 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쓰임 받는 막대기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마른 막대기 같은 존재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합니다. 마치 삼손에 손에 붙잡힌 나귀 턱뼈가 엄청난 불레셋 사람을 제압하는 무기가 되었지만 그것은 나귀 턱뼈가 강하고 훌륭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삼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삼손이 사용하였던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들을 제압하였다고 하여도 우리가 불레셋 사람으로부터 지킴을 받고 구원을 받으려면 삼손을 붙잡아야지 나귀 턱뼈를 붙잡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삼손을 붙잡지 않고 나귀 턱뼈를 붙잡습니다. 삼손의 손을 떠난 나귀 턱뼈는 그냥 나귀 턱뼈입니다. 삼손을 붙잡지 않고 나귀 턱뼈를 붙잡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붙잡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사용하신 나귀 턱뼈 같은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붙잡았다면 이스라엘은 절대로 가나안을 정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어리석음은,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어리석음 중에 하나는 사람들이, 교인들이 삼손을 보지 못하고 나귀 턱뼈만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삼손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나귀 턱뼈를 의지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안타깝고 우스꽝스러운 것은 나귀 턱뼈가 자신이 마치 대단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참 복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축복이 저에게 어디를 통하여 왔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입니다. 건강한 교회입니다. 청량리 중앙교회입니다. 사실입니다.

청량리 중앙교회가 그와 같이 그 교회를 다닌 저에게 큰 축복이 되었던 까닭은 하나님께서 청량리 중앙교회를 통하여 역사하실 수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어떤 교회보다 마음껏 청량리 중앙교회에서 역사하실 수 있으셨던 것은 청량리 중앙교회를 목회하셨던 목사님이 모세 같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같이 뒤가 깨끗하였기 때문입니다.

청량리 중앙교회에 헌금을 꽤 많이 하시던 장로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500명 정도 출석하는 교회 예산의 1/3 정도를 혼자서 담당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제가 주일학교 전도사를 할 때 그 장로님이 부장님이셨습니다. 얼마나 든든한 후원자였는지 모릅니다. 그 장로님 덕분에 정말 원 없이 일을 해 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당회에 건의하고 싶은 일이 생겼습니다. 당연히 그 장로님에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나와 가깝고 또 중요한 것은 헌금을 많이 하시는 장로님이시니 그 장로님이 당회에서 말씀하시면 쉽게 그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로님의 저의 그와 같은 부탁을 아주 정중하게 사양하였습니다. 그것은 제 부탁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말씀을 들었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도사님, 제가 전도사님과 가깝고 허물이 없어서 말씀을 드리는데, 전도사님이 아시다시피 제가 교회에 헌금을 좀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당회에 가서 가급적 발언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연보를 많이 하던지 말을 많이 하던지 둘 중의 하나만 해야지 둘 다 다 하면 못씁니다. 저도 나빠지고, 교회도 시험 듭니다.>

죄송한 이야기가 될는지 모르겠으나 청량리 중앙교회는 그 때가 전성기였습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이스라엘은 모세와 여호수아 때가 전성기였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 할 수 있는 힘이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느보산에서 죽은 모세 너무 근사합니다. 엄청난 공을 세우고도 가나안에 들어가려 하지 않은 모세, 자신의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는 모세 너무 근사합니다. 모세의 뒤를 이를 수 있는 적지 않은 권력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갈등과 분쟁도 없이 칼로 무를 자르듯 단번에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승계할 수 있게 하였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너무 훌륭합니다.

어떻게 보면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에 불과하였는데 일단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모세의 뒤를 이은 당신의 종으로 세우시자마자 여호수아를 모세처럼 따르려고 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참 훌륭하고 근사합니다.

저는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껏 역사하시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모세와 같이 자기를 부인할 줄 아는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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