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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빌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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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빌립보서 2:5-8

사람은 무엇을 묵상하고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의 행동이 달라집니다.  그가 더러운 생각을 하면 그에게서는 더러운 행동이 나옵니다.  반면에 그가 거룩한 생각을 하면 그에게서는 거룩한 행동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의 것을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의 열매를 항상 묵상하면 하늘의 계시를 깨닫고 항상 즐거워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달라지고 인생관이 달라져서 복을 받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서 구원함을 받았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하늘에 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 일을 염려하느라고 소중한 시간을 보내지 마십시오.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여러분의 생각을 채우십시오.  하늘에 있는 풍성한 보화와 기쁨에 눈을 돌리십시오.  믿음의 사람은 하늘의 뜻을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하늘의 뜻을 헤아리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기 내면의 깊은 곳에서 현실에 안주하라는 달콤한 유혹을 듣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은 사단의 유혹임을 기억하십시오.  신앙은 항상 새로움에 도전하는 기상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처음부터 애굽을 나올 수 있는 형편과 처지가 되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여리고 성을 점령할 수 있는 어떠한 힘과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새로움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움을 향해 나아갔더니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새로움에 도전하지 않았던 민족들은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새로움에 도전하지 않았던 심령들은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확고한 비전을 가지고 미래에 도전하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담대하게 도전하십시오.

믿음이란 내일을 준비하는 존재들의 작업입니다.  역사는 도전하는 자에게만 열립니다.  믿음의 환상은 환경을 바꾸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입니다.  모름지기 생명은 꿈이 있어야 소중한 것이고, 꿈이 있어야 싱싱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입술을 통하여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때가 올 것입니다.  그에게는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셨던 놀라운 복을 받아 누릴 때가 올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오늘 우리 모두가 이 복을 받아 누리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십니까?  복 있는 사람은 그 영혼에 기운이 충만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형통한 사람의 특징은 그 영혼이 기운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심겨진 상태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도 돌짝 밭에 심겨지면 그것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의 시냇가에 심겨져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서 진정한 행복이란 예수님 안에서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함이 우리에게 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의 삶에 기적을 창조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자에게는 절대적으로 상대하십니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신뢰하는 자에게는 상대적으로 상대합니다.

보십시오.  애굽을 떠난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을 들어갈 때까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으로 하나님의 비밀한 역사를 본 사람은 절대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신뢰하되 절대적으로 신뢰하십시오.  여기에서 절대적인 신뢰라는 뜻은 불평과 원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자에게는 결코 불평과 원망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절대로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알아 가십시오.  풍성하신 하나님을 알아 가십시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우리는 믿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생명이라도 믿음만 들어가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다 잃었다 할지라도 믿음만 붙들면 다시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환경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믿음을 붙잡으십시오.  믿음이 변하면 환경도 변합니다.  절망을 버리고 믿음을 붙드십시오.  확신하건대 우리에게 믿음의 변화만 오면 우리의 환경에는 엄청난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은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은 어떤 시련에도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육신의 안식을 위하여 밤을 주시는 하나님은 영혼의 정화를 위하여 시련의 밤도 주십니다.  그 영혼이 더 아름다운 정화가 필요하면 좀더 긴 시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결국은 밤이 지나가는 것처럼 시련의 날도 지나갑니다.

하늘을 보십시오.  하늘이 항상 맑은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일년 365일 매일 맑은 날만 계속된다고 한다면 지구는 모두가 사막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을 당할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모든 상급의 배후에는 인내의 삶이 있었습니다.  인내가 없이 일어난 상급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내는 성공을 얻는 열쇠입니다.  인내라는 열쇠만 가지고 있으면 모든 성공은 다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만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제일 철저하게 시키시는 훈련의 코스가 무엇일까요?  참는 훈련입니다.  보십시오.  모세는 40년을 기다렸습니다.  야곱은 20년을 참았습니다.  요셉도 20년 이상을 기다렸습니다.  들의 백합화가 철을 앞당겨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거대한 집이 하룻밤에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정한 때,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정한 기한을 인간의 마음대로 조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주와 함께 걸으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시간 시련과 고난의 때를 지나고 있는 모든 인생들에게 말씀합니다.  주님과 함께 걸으며 기다리십시오.  참으십시오.

무엇보다도 좋을 때에 밤을 위해 준비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좋은 날, 아주 좋은 날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십시오.  모름지기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마지막 날을 위해서 심고 또 심고 심으십시오.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지난 주일 오후에 전인적 치유수양회를 가졌습니다.  고백하지만 전인적 치유수양회를 준비하면서 제 나름대로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준비를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간섭하시고 역사해 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준비를 했습니다.  보다 많은 성도들이 올라가서 성령의 역사하심과 은혜를 체험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날 첫 시간부터 우리들은 감당할 수 없는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새벽 2시 가까이 순서를 진행하면서도 모두가 간절히 사모하는 그 모습들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마지막 은혜의 시간에 방언이 터지고, 방언으로 찬양을 하는데 정말 엄청난 시간들이었습니다.  말로 감당할 수 없는 소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한 사람씩 나와서 간증하는데 그 모습들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그날 밤에 우리들에게 임하셨던 성령님의 역사를 오늘도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도 내 영혼 깊은 곳에서 맑은 샘물처럼 솟아나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맛보고 경험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에게는 세상을 변화시킬 삶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님 안에서 변화된 내 삶의 모습입니다.  삶의 모습이 없는 사람은 결국 자기 도취와 자기 만족에 빠져서 교만하게 됩니다.  이 교만함에 대해서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사람이 교만하게 되면 그저 교만함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호세아서를 보게 되면, 교만한 사람은 결국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구하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가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삶의 모습에서 거룩한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세상 속에서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훈련된 삶입니다.  믿음은 자기 자신 속에 모든 변화를 장려해야 됩니다.  귀한 믿음은 변화를 견딘다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변화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룩하려고 하시는 변화를 끝없이 주도할 수 있고 장려할 수 있는 그가 바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입니다.  목사인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만 붙들면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축복의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간마다 때마다 성령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순간 순간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은혜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경지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우리의 삶 속에서 뚜렷하게 나타나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날마다 은혜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절대적으로 겸손하셔야 합니다.

유명한 어거스틴은 예수를 잘 믿는 길이 무엇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신앙과 겸손은 같이 움직입니다.  겸손한 자가 은혜를 받고 겸손한 자가 믿음 생활을 잘합니다.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몰라서 은혜를 못 받았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몰라서 은혜를 받지 못한 겁니까?  그들의 생활이 어그러지고 형편없어서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더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자신했던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구별되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생활은 세상 일반 사람들과는 분명히 구별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은혜를 누리지 못했습니까?  왜 예수님으로부터 외식하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까?  한 마디로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있고, 스스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할지라도 겸손하지 않으면 회칠한 무덤과 같이 거짓된 바리새인일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려면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적어도 가정 생활과 신앙 생활에서는 겸손 하나만 있으면 가진 것이 부족해도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가 있습니다.  인생의 먼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에게 성경은 언제나 겸손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찾으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십니다.  반대로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십니다.  그래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인생이 잘못되는 가장 큰 이유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높은 산을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높은 산을 바라보듯이 인생을 높이 바라보고 한 걸음 한 걸음 겸손하게 올라가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신앙도 한 걸음 한 걸음 겸손하게 걸어가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산은 우리들에게 크게 두 가지를 가르쳐준다고 합니다.  하나는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겸손을 가르쳐줍니다.  등산은 올라갈 때는 물론이고 내려오는 것도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려올 때 희생을 당했습니다.  인생이나 신앙도 그렇습니다.  잘될 때, 정상에 섰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섰다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이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높은 데서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가장 미인이어야 하고, 좋은 대학을 나와야 하고, 좋은 직장, 좋은 집, 좋은 가구가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높은 곳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겸손한 곳, 낮은 곳에 있습니다.  낮은 곳에서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아래에 있는 삶은 쉽게 파괴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만이 왜 무섭습니까?  교만은 바로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교만하다고 하는 것은 마귀가 내 안에서 나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교만의 뜻은 자기를 과대 평가하고 자만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높여 자랑하는 것을 교만이라고 합니다.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이 6가지가 있는데 그 뿌리를 모두 교만에 두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과욕, 혈기, 남을 비판하는 것, 당짓는 것, 남을 정죄하는 것, 고집 등은 교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프랭클린은 사람의 성품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교만이라고 말했습니다.

교만하면 버림을 받습니다.  사울 왕은 처음에는 겸손했지만 나중에 교만하여 버림을 받았습니다.  교만하면 다 떠나갑니다.  축복도 떠나가고 하나님의 은혜도 떠나갑니다.  성령도 떠나가고 말씀도 떠나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잘 믿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은혜 받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교회 오래 나오고 기도 많이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겸손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는 것도 겸손해지기 위한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여 주십니다.  다윗이 겸손할 때 하나님께서 높여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낮추사 죽기까지 복종하셨을 때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사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 이름 앞에 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잠언 22장 4절에서 겸손한 자를 향한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그렇습니다.  겸손한 자에게는 영광이 있습니다.  겸손한 자에게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겸손은 같이 따라 다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겸손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교만하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할 때 재물도 주시고, 영광도 주시고, 생명도 주십니다.  겸손할수록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존귀하게 되고 더 높아집니다.  이제 우리는 옷을 입어도 겸손한 옷을 입고, 말을 해도 겸손한 말을 하고, 우리의 눈빛도 겸손한 눈빛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오랫동안 목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교인들을 바라보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자칭 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서 아주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사도 베드로도 똑같은 말씀을 합니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원하실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 앞에서 겸손하십시오.  더 겸손하십시오.  겸손은 은혜의 통로입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겸손한 삶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 영원한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겸손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시간마다 때마다 풍성한 은혜의 삶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날마다 은혜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두 번째로 섬김의 자리에로 내려가야 합니다.

신앙과 겸손이 같이 움직인다면, 겸손과 섬김도 같이 움직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섬김도 잘합니다.  낮은 자리에 내려가서 섬기는 사람이 바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이 겸손하지 않는다면 그의 신앙은 거짓된 신앙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좋고, 훌륭한 신앙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이 낮은 자리에로 내려가서 섬길 줄을 모른다면 그의 신앙은 바리새인적인 거짓 신앙입니다.

고린도전서를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다루면서 고린도전서를 기록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4장에 고린도 교회가 심각하게 부딪히고 있었던 문제인 신령한 영적 은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12장에서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14장에서도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뜨겁게 일어났던 예언과 방언의 은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13장을 샌드위치처럼 끼워 넣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성령의 여러 가지 신령한 은사에 대하여 12장과 14장에서 이야기하면서 그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13장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이 모든 은사는 사랑으로 연결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은사들을 어떻게 제대로 활용할 수가 있느냐?  은사란 것은 궁극적으로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다른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모든 은사는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은사가 은사답게 활용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은사는 사랑으로 활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장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유창한 방언을 하고, 병들을 고치고, 기사와 이적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사랑으로 낮은 자리에로 내려가서 섬기지 않는다면 요란한 깡통 신앙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풍성한 은혜를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낮은 자리에로 내려가십시오.  내려가서 기쁨으로 이웃과 성도들을 섬기십시오.  기쁨으로 찬물에 손을 담그십시오.  사람들이 가장 하기 싫어하는 그 일을 내가 감당하려고 하십시오.

목사인 저는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을 세밀하게 바라봅니다.  이것은 저만 그렇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의 모습을 아주 세밀하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섬김의 모습은 없고, 대접을 받으려고만 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실까요?

찬물에 손 담그기를 싫어하고 밥을 먹자마자 본당에 와서 에어콘을 틀어놓고 편안하게 앉아있는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가만히 바라보시면서 뭐라고 하실까요?

기억하십시오.  목사인 저는 최소한 섬김의 모습이 없는 사람을 일꾼으로 세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태어나는 순서는 있지만 일꾼으로 세움을 받는 순서는 없습니다.  군에서는 짠밥 순서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짠밥 순서대로 일꾼을 세우지 않습니다.  먼저 왔다고 먼저 일꾼으로 세우지도 않습니다.  섬김과 헌신이 없는 사람을 일꾼으로 세워놓으면 고린도 교회 짝이 나고 맙니다.

영적 성장에도 지름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일꾼으로 세움을 받는 길에도 지름길이 있습니다.  바로 섬김과 헌신으로 낮은 자리에로 내려가는 사람이 일꾼으로 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타가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스타가 달리 스타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여 성도들에게서 섬김을 받으려고 스스로 타락한 사람이 스타입니다.  사단은 예수님에게 세상에서 스타의 길을 걸으라고 유혹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는 약함을 숭상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강함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에는 모든 인간의 약함을 강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약한 것들이 다 강하여 집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강함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를 위하고 섬기는 종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은 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강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참으로 강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강해집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함은 우리의 최종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강함은 보다 중요한 목적을 위한 수단과 도구입니다.  강함의 목적은 섬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약한 자들을 돕고 섬기라고 강한 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에게 정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악인의 꾀가 우리를 강하게 한다"  "강함은 우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며, 강한 자가 되면 우리는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게 될 것이며, 약한 자들의 섬김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강하게 하며, 강함의 목적은 섬김을 받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섬김에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섬김이 우리의 삶과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으로 강한 자가 되십시오.  그러나 강함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강한 자가 되어 모든 약한 자들을 예수님처럼 섬겨야 합니다.  삶의 목적을 자기를 기쁘게 하는데 두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들을 기쁘게 하는데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와 같은 삶을 통하여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 되어 자신과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은혜가 풍성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겸손하셔야 합니다.  낮은 자리에로 내려가 기쁨으로 이웃과 성도들을 섬기셔야합니다.  결국 신앙은 그의 삶이 증거합니다.  아십니까?  성령님께서는 바로 그곳에 임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성령의 역사도 낮은 자리에서 더 크고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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