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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문화관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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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오늘 설교는 “거룩하게 부르심 받은 성도는, 이 시대의 문화를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전하겠습니다. 로마서 12:1-2의 메시지입니다.

성도의 삶은 예배가 중심입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 뿐 아니라, 가정예배와 직장예배를 포함한 모든 예배가 삶의 중심입니다. 아울러, 성도의 삶은 예배 때 뿐 아니라 일상생활을 통해서도 하나님 앞에 바쳐진 제물로 살아야 합니다. 또한, 일상생활 자체는 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이 점을 깊이 묵상하면서 오늘 말씀을 듣겠습니다.

시대를 따르지 않은 성경의 대표적 인물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그의 삶을 조명하여, 오늘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강조하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으로 받은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것을 지적합니다. 따라서 예수님 없는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영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사람이 성도입니다. 성도는 아브라함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하란”은 온갖 우상들이 들끓던 도시였습니다.

상업의 중심지 하란

하란은 원래 아카드어로는 ‘길’을 뜻이며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은 상업과 대상들의 중심지로 알려졌다(겔 27:23). 1959년에 실시된 지표조사와 간단한 발굴을 통해서 이곳에는 서기전 2000년경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1990년대 이후 터키의 고고학자들이 소규모로 발굴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조만간 이 도시의 역사가 밝혀질 수 있게 됐다. 하란은 신(Sin)이라 불리는 달신 숭배의 중심지였다. 서기전 1200년경 아람 민족이 하란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창세기에 나타난 하란 지역의 다른 표현으로 알려진 ‘나하라임’이나 ‘밧단’이라는 지명에 아람이라는 민족명이 첨가됐다. 하란은 서기전 612년 잠시나마 몰락하는 앗시리아 왕국의 수도가 됐으며 바빌로니아 시대에도 여전히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로 그 명맥을 이어갔다. 

아브라함은 삶의 터전이 거기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그곳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생겨났습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역사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통해 이루어 나가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전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약속과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던 아브라함을 기억함으로써,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어떤 결단이 있어야 할지 배우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아브라함에게 주신 메시지를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음성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지난 주 목요일(27일), The Wall Street Journal 제1면 톱뉴스는, 앤드루 히긴스(Andrew Higgins) 기자가 쓴 글입니다. 그는 존 하지(John Hagee) 라는 텍사스 출신 전도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존 하지는 중동의 이스라엘이 인근의 아랍 국가들을 공격하는 것을 잘 하고 있다고 믿고, 모든 크리스찬들은 이스라엘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워싱톤의 한 호텔에 약 3,500명의 복음주의 크리스찬이 참석했는데, 강단의 뒷면은 거대한 이스라엘 국기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하나인 창세기 12:3 전반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를 인용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2일에 이스라엘이 폭격함으로 발발된 이스라엘-레바논 간의 전쟁은 “악에 대항하는 선의 전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존 하지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행위를 “무조건” 지지하는 일부 크리스찬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제 잠간 지난 2주일 동안 중동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난 12일(7월 12일),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했습니다. 이때 침공 당한 레바논의 사진과 영상을 담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는 www.fromisraeltolebanon.com입니다. 폐허가 된 레바논 거리와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12일에는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외곽에 있는 베이루트 국제공항에 로켓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레바논 남부에 탱크와 헬리콥터를 동원한 지상군을 투입해 발전소와 교량 등 주요 시설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습니다.

지난 17일, 레바논 남부 주거지역에 공중폭격을 감행해 일가족 7명이 사망했습니다. 현재 수백여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중동의 파리”라고 불렸던 베이루트가 초토화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번 공격에 대해 레바논 내 무장저항정치조직인 “헤즈볼라”가 자국 병사 2명을 납치한 것에 대한 보복공격이라고 밝혔습니다. 지난 12일 헤즈볼라 무장요원들은 레바논 남부 이스라엘 접경지역에서 이스라엘 군을 공격해 병사 2명의 신병을 확보해 억류 중입니다.

이스라엘 병사 1명을 억류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인민저항위원회(PRC)와 마찬가지로 헤즈볼라 역시 현재 이스라엘 감옥에 수감 중인 팔레스타인 양심수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맞교환’ 협상안을 제시했습니다. 헤즈볼라 지도자 셰이크 하산 나스랄라는 “이스라엘 감옥의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을 석방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 병사를 풀어줄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는 헤즈볼라 측의 자국 병사 억류를 ‘전쟁행위’로 규정하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인질구출과 보복공격을 벌이겠다고 밝혔습니다. 헤즈볼라도 이스라엘의 공격에 맞서 레바논 국경에서 30km 떨어진 하이파에 로켓 공격을 단행했습니다.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는 17일 의회 연설을 통해 억류 병사 석방과 함께 “이스라엘에 대한 헤즈볼라의 로켓공격 중단, 그리고 헤즈볼라가 장악하고 있는 레바논 남부의 군 통제권을 레바논 정부군에 넘기지 않는 한 레바논에 대한 공격은 중단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 같은 올메르트 총리의 발언은 레바논에 대한 이번 공격이 당초 이스라엘이 명분을 삼은 ‘병사 구출 작전’이 아니라 ‘헤즈볼라 무력화 작전’임을 확인하는 발언이었습니다.

유엔은 레바논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습니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고 있습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유엔과 함께 평화유지군 파견을 추진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시리아를 압박해 헤즈볼라를 설득하는 것 뿐”이라고 말하면서.

앞서 14일, 유엔의 안전보장이사회가 이스라엘의 군사공격 중단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려 하자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져 무산시켰습니다.

이스라엘은 1978, 1982, 1993, 1996, 그리고 2006년 등에 레바논을 반복적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1848년의 아랍-이스라엘 전쟁은 이스라엘이 “독립전쟁”이라고 부르지만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알 나크바, 즉 ‘대재앙’이다. 1948년 전쟁 동안만 70만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전쟁을 피해 난민이 되었습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상대로 전쟁을 감행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깊은 정신적 상처를 가진 민족입니다. 그들의 나라가 현재 벌이고 있는 행동들은 홀로코스트를 겪으면 자라난, “다시는 결코 학살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리라!”는 강한 다짐에서 비롯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짐이 이스라엘을 ‘보복정치’로 나아가게 하고 있다면, 보복 그 자체가 균형을 잃은 채 도발 행위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계 3대 유일신 종교는 기독교, 이슬람교, 그리고 유대교입니다. 이 3대 종교는 모두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묻습니다: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한 아브라함의 후손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여기지만 아닙니다.

그러면, 이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들도 폭력을 유일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중동에서 맞붙은 것은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입니다. 아랍 국가들은 대체로 “아랍 연맹”Arab League에 속한 22개 나라들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이슬람국가입니다. 따라서 지금 중동에서 싸우고 있는 나라를 종교로 보면, 유대교와 이슬람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는 약속을 품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아브라함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셨습니다. 원수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도 아랍 연맹도 예수님의 정신과는 거리가 멉니다.

백 걸음 양보해서 예수님까지 연결하지 않더라도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파괴적 행태’는 아브라함의 신앙과 전혀 같지를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물질과 폭력이 난무하는 나라와 그 도시를 벗어나 약속의 땅, 예배드리는 땅,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에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기초”라는 뜻입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래, 20회 이상 무력으로 주인이 바뀌었고, 10 차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 것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복’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평화를 전하는 사람” 혹은 peacemaker였습니다. 살육을 일삼는 나라들과 ‘공통점’이 전혀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은 “기독교인”입니다.
예루살렘의 영적인 계승은 “교회”가 합니다. 교회가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평화의 공동체입니다.

“한국인 기독교인”은 무슨 뜻이 있을까요?
한국은 이스라엘 못지않게 많은 전쟁을 겪었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전쟁을 침략당한 전쟁이었습니다. 600회 이상 침략 당했습니다.

나는 이번 휴가 중에 이병주의 <지리산> 7권을 거의 다 읽었습니다. 해방 전후의 빨치산 활동을 배경으로 삼는 소설이었습니다. 아직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민족이 세계 평화를 위해 할 일이 많다는 특별한 느낌을 가졌습니다.

어디 한국인 기독교인뿐이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화평케 하는 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문화는 삶의 방식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남의 것을 모방만 하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있기는 있지만, 자기의 삶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성령님에 감화 감동하심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화는 자연스럽게 성령님의 문화여야 합니다. 이 세상을 따라 가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문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스라엘 문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살리는 문화”가 됩니다. 교회는 영적 이스라엘이요, 성도는 영적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성도의 삶이 세상과 같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죽음의 문화요, 죽음을 찬양하는 길입니다. 이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또, “살리는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때 unique해 질 수 있습니다. 자기 고유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을 보고 나를 보면 세상을 본받고 싶어집니다. 세상에서 “낙오”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고 나를 보면 나는 unique한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하나님의 뜻대로 지으셨습니다. 이 세상 누구와도 똑같지 않게 만드셨습니다. 남과 다르다고 ‘컴플렉스’를 느낄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나입니다. 이런 거룩한 자부심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고대근동은 초승달 지역이 비옥했습니다. 비옥하다고 하지만, 비가 많지 않아 건조했습니다. 유목생활을 주로 하던 사람들은 물과 초목을 따라 “이동”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의미의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이었습니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가 만나는 지점에서 유프라테스 강 상류까지 이동한 사람들 중에 아브라함의 가족이 들어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아브라함은 본래 이름이 “아브람”이었습니다.

첫 번째 이동은 우르(Ur)에서 하란(Haran)까지였습니다.
우르는 유프라테스 강이 티그리스강을 만나기 얼마 전 유프라테스강 남쪽 강변에 건설된 도시입니다. 오늘날 Tell al-Muqayyar입니다. Ubaid 시대 때 건설되었습니다. 우르 제3왕조(2112-2004 BC)는 Ur-Nammu Shulgi 그리고 Amar-sin 등이 새롭게 건설했습니다. 우르는 18세기 BC까지 메소포타미아 무역의 중심도시였습니다. 우르가 망하고 나서도 바벨론 같이 그 지역을 통치하는 나라들은 우르를 계속해서 재건해 왔습니다. 그러나 4세기부터 사람들에게 잊혀진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학자들은 유프라데스 강물의 흐름이 변경된 데서 그 원인을 찾는 것 같습니다.

우르는 달의 신인 난나(Nanna) 혹은 신(Sin)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해 낸 우르의 신전은 상상을 초월할만한 규모입니다. 우르 지구라트 (스크린)

아브라함 가족이 이주한 하란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입니다.

하란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죽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란을 출발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음성을 듣습니까?

날마다 새로운 떠남이 있어야 합니다.
허물을 벗어 던지고, 새 피부를 입어야 합니다.
옛것을 던져 버리고, 새 것을 입어야 합니다.

각 가정은 ‘문화’가 있습니다.
이것저것 비싼 가구를 들여놓은 집이 아니라, 그 가정의 고유한 문화를 가진 집이어야 합니다.

개인도 ‘문화’가 있습니다. 명품으로 치장한 것이 아니라 고유한 문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과 그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는 ‘적용’해야 할 목표입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은,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중에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는 것은 중요합니다.

1. 폭력주의. 무력행사로 일을 처리합니다.
2. 물질주의. 돈으로 매수해서 자기 원하는 대로 합니다. 
3. 유행주의. 세상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우리는 “예배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천국에 가면 우리는 영원토록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가만 생각해 보면 예배가 얼마나 엄청나게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본받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에 이르자마자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육신의 계보가 아니라 “믿음의 계보”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상숭배의 도시를 떠나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영적 가나안으로 “이동”해야 하겠습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오늘 설교에서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때때로 듣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내게 말씀하시지 않는가? 그러나 영적으로 도전 드립니다.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않습니까? 왜 그걸 여러분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아브라함 때처럼 하나님께서는 “직접”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나 스스로도 하나님께서 직접 전해주신 말씀을 듣고 여러분에게 전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마음을 열기만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살아계신 주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음성을 저희에게 들려주셔서, 저희가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야할지 분명하게 깨닫게 하옵소서!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것이 저희들의 ‘문화’가 되게 하옵소서. 저희들 가정의 분위기가 되게 하옵소서. 교회의 냄새가 되게 하옵소서. 저희들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모든 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오는 일에 귀하게 사용되고 싶습니다.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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