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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 (마 7: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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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어찌나 무더운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이마에 땀이 흘러내립니다. 고속도로는 휴가를 떠나는 차량으로 만원입니다. 어떻게 보면, 여름휴가는 그 자체가 고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여러 가지 여건 상 쾌적한 휴가를 보내기에는 아직 미흡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휴가 때문에 몸이 지쳐서 병이 나기도 하고 무력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휴가의 의미를 살리려면 가급적이면 멀리 가지 말고 가까운 곳을 찾고,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으로 가지 않는 것이 고생을 더는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이제 내일모래가 절기상으로 가을의 문턱인 입추(立秋)여서  더위가 오래 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대낮에는 덥지만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나서 훨씬 지내기가 수월해 질 것입니다. 여름철에는 무엇보다도 건강관리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을 해도 좀 쉬어가면서 하고, 삼계탕과 같은 보신을 위한 음식을 즐겨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 건강을 잘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사실, 더위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방해를 받으면 안 됩니다. 주일을 범하면서까지 휴가를 갈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나서도 얼마든지 시간적인 여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신본주의로 사는 것입니다.

요즘은 예배당에 에어컨이 있어서 시원한 환경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과거에는 기껏해야 선풍기가 고작이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선풍기도 없이 창문을 열고 예배를 드렸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좋은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줄 압니다.

이 지구상에는 기독교 신앙을 핍박하는 국가가 많습니다. 이슬람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이나 인도와 같은 나라도 노골적으로 핍박합니다. 북한은 이슬람 국가들보다 더 억압합니다. 그런 나라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을 얼마나 부러워할까요?

우리는 지금 누리고 있는 신앙의 자유를 당연한 권리로 여길 것이 아니라 대단한 감사의 조건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고 하셨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낮인 반면에 북한이나 이슬람 국가들은 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은혜의 시기를 세상일에 낭비하지 말고 하나님을 섬기는 데 선용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이를 위해 이 시간 저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가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어떻게 믿는 것이 잘 믿는 것일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 볼 때가 있습니다. 저는 이 질문에 대한 최상의 답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만 있다면 그 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고 들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곧 하나님께 관심을 갖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흔히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흘려버리는 것을 마이동풍(馬耳東風)이라고 합니다. 우리 속담에 “쇠귀에 경 읽기”라는 말도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이동풍이 되거나 쇠귀에 경 읽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들으라”는 권면이 자주 나옵니다.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3)

예수님께서는 무리에게 복음을 전하시면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라는 구절이 여러 번 나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무슨 유익이 있는 것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됩니다.

학교 공부를 아무리 많이 해도 하나님에 관해서 알 수 없습니다. 세계 최초의 우주비행사였던 쏘련인 유리 가가린은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우주공간에 나가서 지구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무신론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그는 그 아름다운 지구와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귀환해서 한 말은 우주공간에서 하나님을 찾아보았으나 없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8년 뒤인 1969년에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착륙한 미국인 우주비행사였던 닐 암스트롱은 아름다운 지구와 천체를 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귀환한 후에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면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간증했습니다. 똑 같이 우주를 보고서도 유리 가가린과 닐 암스트롱의 반응이 이처럼 상반되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른 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고, 유리 가가린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였으나 닐 암스트롱은 성경에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오직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된 사람은 그 다음 단계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들으려면 반드시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

먼저 믿은 우리가 불신 가족과 이웃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저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해 줄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므로 우리가 전도에 힘쓸 때 기뻐하십니다(딤전 2:4).

둘째로, 구원의 길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주신 목적에 대하여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알려주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생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려주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 뿐인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3장 16절로 17절에는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언젠가 어떤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제가 기독교인인 것을 알고는 자기의 성경 지식을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그 사람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러자 그 사람은 “아니요. 믿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은 성경을 교양을 위해 읽어야 할 고전(古典) 가운데 하나로 알고 읽어본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교양서적이 아닙니다. 세속적인 성공을 위한 지침서도 아닙니다. 성경에는 시가도 있고, 역사적인 기록도 있고, 도덕적인 가르침도 있지만, 시가나 역사나 윤리를 가르칠 목적으로 기록한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은 죄인들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시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알게 됩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두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11장 4절에 이르기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벨은 하나님을 섬기는 올바른 법도를 알고 제사를 드렸으나 가인은 제 좋은 대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10장에 보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우상 숭배자들처럼 무조건 정성을 다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법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워서 실천해야 합니다.

요즘 기독교인 가운데는 나답과 아비후처럼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아니한 방법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방법에 따라서 섬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을에 사는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그 때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는데 그 동생 마리아는 주의 발아래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데 동생이 도와주지 않자 직접 예수님께 나아가 말하기를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화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께서 그의 말씀을 듣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가 되려면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은 그 말씀대로 순종할 것을 전제로 할 때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그대로 순종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듣지 아니한 것만도 못할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 곧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시내산 아래 머물러 있으면서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일 세대 가운데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다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히브리서 3장 15절 이하에 보니 이 같이 말씀합니다. “15)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17)또 하나님이 사십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18)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19)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거역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고만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한 것일까요?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되 온전히 믿어야 하는데, 이스라엘 자손은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사가 형통하면 하나님을 믿노라 했지만 상황이 악화되고 곤란한 일이 중첩되면 곧바로 돌변해서 모세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입버릇처럼 내뱉은 원망이 무엇입니까?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민 21:5)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려면 크신 권능으로 바로와 애굽을 심판하시고 선민을 구해 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에서 굶어 죽거나 목말라 죽게 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광야에서 한 끼인들 굶은 적이 있었습니까? 목말라 죽은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습니까?

이따금 광야 길을 행진하면서 목마른 적은 있었지만 목말라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작은 어려움 앞에서도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광야에서 멸망한 이스라엘 자손의 예를 들어서 우리에게 이 같이 권면합니다. “1)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히 4:)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믿음으로 순종하지 아니하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브라함처럼 큰 복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선민의 조상이요,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메시야께서 그의 후손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가 이처럼 위대한 인물이 된 것은 일차적으로는 그를 택하여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해야 하겠지만, 이차적으로는 그의 믿음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은 그가 믿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75세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명하시기를 “1)…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가산을 정리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그뿐 아니라, 가나안으로 이주한 아브라함은 기다려도 기다려도 아들을 낳지 못해서 낙심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을 때 그 말씀대로 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이를 그의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시려고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에도 일언반구 없이 묵묵히 그 명하신 대로 순종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철두철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브라함과 같이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러시다면 아브라함처럼 순종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3장 9절에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기를 블레셋과 전쟁하기 전에 자기가 사울의 진을 방문해서 번제를 드릴 것이니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기한으로 정한 이레가 다 지나가는데도 사무엘이 오지 않자 자기가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당도했습니다. 그 때 사무엘은 사울에게 말하기를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고 했습니다.

그 후에도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아말렉 왕 아각을 사로잡고 살지고 기름진 소와 양들을 살렸습니다. 사무엘이 오자 사울은 자기가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다 이행하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들려오는 우양의 소리는 어찌 된 것이냐고 하자, 그것은 백성들이 당신의 하나님께 번제하기 위해 우양의 좋은 것들을 남겨둔 것이라고 변명했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말하기를 “22)…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이 사람들은 명목상의 신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누가 보아도 주님을 믿는 자로 보입니다.

또 그들은 교회 안에서 상당한 인정을 받고 대단한 일을 했노라고 내세웁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배척을 당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기만 했지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심판 날에 그들의 행위는 태풍과 홍수 앞에 무너져 내리는 집과 같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자명해 졌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생각과 내 경험에 맞지 않더라도, 주님께서 명하신 것이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아서 어떠한 시련의 바람이 불어올지라도 끄떡없이 견딤으로 주님의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이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 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사모하여 들을 뿐 아니라 그 들은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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