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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받은 사람 (눅 18: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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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많은 성경의 이야기 중에서 어린아이들도 잘 알고 또 좋아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만화로 만들기에 이보다 더 좋은 소재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나무에 올라간 난쟁이 삭개오]라고 재미있게 제목을 붙일만한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던 중 여리고를 통해 지나가실 때에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에 살던 사람입니다. 그는 세리장이었고 또한 부자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여리고는 팔레스타인에서 동서물물교역의 요충지였고 그래서 유명한 세관이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거기서 보통 세리가 아니라 세리장이었다고 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국세청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지방 관세청장 쯤 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세리들은 대개 과세, 탈세, 부당징수, 뇌물수수, 착복, 고리대금 등에 연루되어 악명 높은 사람들이었으니만큼 세리장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면 의례히 돈을 많이 긁어모았을 것입니다. 삭개오도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 싶어 했다고 오늘 본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곳에는 늘 많은 무리가 붐볐고 게다가 삭개오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꼭 보기 위해서는 비상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길가의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것으로 확실시되는 길가에 미리 가서 거기에 있던 한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예수님을 보고자 한 것이 단순한 호기심이나 무슨 이적기사 행하는 것을 구경하고 싶은 동기 때문은 아니었던 것으로 짐작하게 됩니다. 그는 꼭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을 통해서 해결을 얻어야 할 어떤 문제를 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신분에 안 맞게 체통을 잃은 행동을 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수많은 군중 앞에서 길거리 나무에 기어 올라간다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세리장 쯤 되는 사람이 할 일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비록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많이 만든 사람이었다 해도 마음 한 쪽 구석에 양심의 가책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내가 천당에 갈 수 있겠는가?" 하는 내면의 질책과 고뇌를 안고 살았을 수 있습니다. 젊어서는 별 생각 없이 그저 돈을 긁어모으는 일에만 눈이 팔려있었으나 출세할 만큼 출세했고 가질 만큼 가지고 나자 인생의 문제를, 또 내세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는 내놓고 누구와 의논은 하지 못해도 누군가로부터 위로와 희망의 말을 듣고 싶어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입니다. 그가 가르치는 천국복음의 이야기들도 전해 들었을 것이고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와 회개를 촉구하는 그의 외침도 들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자기 같은 세리들을 멸시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는 늘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 오히려 죄인으로 여겨지고 소외와 멸시를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치유와 구원을 선언하곤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만이 자기의 고민을 이해하고 해결해주며 위로와 구원의 희망을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꼭 만나봐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고 보면 그가 나무에까지 올라간 것은 단지 자기 혼자 예수님의 얼굴을 감상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예수님의 눈에 띄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생각하게 됩니다. 그냥 예수님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를 만나는 것이 그가 원한 바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엉뚱해 보이고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그의 행동을 이해하게 해주는 열쇠로 여겨집니다.

  삭개오는 그가 마음먹고 실천한 대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가 미리 가서 나무 위에 올라가 예수님의 눈에 띄기를 기다리고 있던 바로 그곳에 예수님께서 오셔서는 그를 쳐다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것은 삭개오도 깜짝 놀랐을 대성공인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유하셔야겠다고 먼저 말씀하실 줄은 기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급히 내려와서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본문은 전합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일들이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게 된 삭개오가 예수님 앞에 서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자기의 모든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남은 절반의 소유 중에서도 만일 남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그 네 배를 갚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시기를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 하되 곧 이웃이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의 잃은 물건을 줍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의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 하면 이는 죄를 범하였고 죄가 있는 자니 그 훔친 것이나 착취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잃은 물건을 주운 것이나 그 거짓 맹세한 모든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라"(레6:1-5) 한 바 있습니다. 이 율법에 따라 부당하게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을 때에는 그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되 잘못과 피해에 대한 보상으로 20퍼센트를 더하여 120퍼센트를 갚으면 되는 것이지만 삭개오는 아예 400퍼센트를 갚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 놀라운 결심과 그 공개적 선언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에게 자신의 죄에 대한 확실한 인식과 회개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감격과 기쁨이 너무나 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얻은 것이 이제 그를 물질적 탐욕에 사로잡혀 있고 죄의 노예였던 상태에서 해방시키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그에게서 재물을 움켜쥐는 일은 더 이상 아무런 중요성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물질을 어떻게 써야 할지를 바로 깨달았다는 사실입니다. 이토록 놀라운 삶의 변화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그에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잃어졌던 한 영혼인 삭개오를 주님께서 다시 찾으신 것입니다. 삭개오의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 삭개오에게 예수님께서 선언하셨습니다. 본문 9-10절을 봅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눅18:24-25) 말씀하신 적이 있지만 그토록 어려운 일이 삭개오에게는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삭개오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 언제나 모든 일에 있어서 진정한 주인공은 주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을 다시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그토록 보고자 하는 삭개오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그 필요의 자리에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삭개오는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주님을 영접했다고 합니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내면의 수치감과 불안과 고뇌에 사로잡힌 자에게 참 기쁨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감히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는 것까지는 생각도 못했을 삭개오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가 자기의 집으로 주님을 영접했다 했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받아주신 것입니다. 세상이 죄인이라 비난하며 멸시하며 버리는 사람을 영접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 앞에 서서 한 삭개오의 말을 통해 우리는 물질적 탐욕의 상징 같은 세리장에게서 일어난 변화가 어떤 것인지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던 일입니다. 죄인을 불러 변화시키시는 주님이십니다. 세상이 다 버린 자를 찾으시고 구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의 비유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며 기도하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을 사람이라고 가르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눅18:11-14).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삭개오와 같이 이런 저런 죄를 지으며 영혼의 내면 깊은 곳에서 늘 죄의식과 수치심과 불안과 고뇌를 안고 사는 모든 이들은 오늘의 이야기를 통해 평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물질적으로는 여유가 있지만 늘 정신적으로 빈곤함과 영적으로 초라함을 느끼며 내면의 참 기쁨이 없이 살아온 이들도 오늘의 말씀을 통해 기쁨과 소망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남들로부터 비난과 멸시와 소외를 당하며 살아온 이들은 삭개오를 찾으시고 그의 집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에게서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 누구에게서도 인생의 참 의미를 배우지 못하며 낙심 가운데 있는 이들은 우리 주님과 삭개오의 이야기로부터 삶의 진정한 의미와 방식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눅18:24-25) 하신 주님의 말씀 때문에 구원에 대한 확신에 의구심이 일곤 하는 부자들도 삭개오처럼 온 집안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참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리며 말하기를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던 그 삭개오의 집에서 선언하시기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하셨으며 잃어버렸던 자를 찾아 구원하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원이란 바로 자기의 죄를 깨닫는 것,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영접하는 것, 주님으로 인해 변화되는 것, 자기가 가진 모든 것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 그리고 그 가운데서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의 집에도 여러 차례 식사에 청함을 받아 들어가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잡수시기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못마땅하게 여기는가 하면, 예수님을 시험하는 질문을 던지며 그의 말씀을 책잡으려고 노리곤 했고,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우리를 모욕한다" 항변하기도 하고 그 집에서 나오시는 예수님에게 거세게 달려들며 이것저것 따져 묻기도 했습니다(눅11:37-54, 14:1-3). 그런데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화 있을진저"였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하는 우리는 과연 바리새인들과 같은 부류인지 세리와 같은 사람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각자의 개인적 삶의 자리에서나 교회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 의롭다 하는 바리새인과 같이 행하며 남에게 돌을 던지기를 일삼고 있는지, 아니면 스스로를 죄인으로 아는 세리처럼 자신의 가슴을 치며 살고 있는지를 돌이켜봐야 할 것입니다. 두 부류 중 어디에 속하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자세입니다. 둘째는 자기 자신을 보는 입장입니다. 셋째는 남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넷째는 물질을 대하는 관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머리를 빳빳이 듭니다. 세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의인이라 봅니다. 세리들은 자기들을 죄인이라 여깁니다. 바리새인들은 남을 죄인이라 정죄하며 멸시합니다. 세리들은 아예 남을 평가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입니다. 세리들은 돈을 좋아했지만 주님을 만나고서는 나눌 줄 알게 됩니다. 이런 세리들을 주님께서는 의롭다 인정하시고 구원을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 같이 스스로를 의인으로 여기며 주님으로부터 정죄를 당하는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세리 같은 자임을 깨닫고 회개하며 오직 주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기를 간구하는 사람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삭개오가 보여준 놀라운 변화가 우리 모두에게서도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삭개오처럼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심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의 기쁨과 감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으로 주의 뜻을 따르는 결단과 실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표지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찾으시며 기뻐하십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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