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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침이 오고 밝은 빛이 다가와도 (롬 1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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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오고 밝은 빛이 다가와도 (롬13:11-14)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사랑은 원합니다. 생물은 동물이나 식물이나 막론하고 관심과 애정과 친절을 가지고 다가오면 모두가 생명적 반응을 합니다. 그 중에서도 개는 누구나 감동을 받게 됩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전혀 변함이 없고 주인에게 향하는 충성은 대단합니다. 영국에서는 주인을 무덤에서 13년 동안이나 지키다 세상을 떠나 교회묘지에 묻히게 된 이야기도 있습니다. 참으로 개는 우리 인간들에게 감동을 주는 동물입니다.

요즘은 길거리에서 개를 안고 다니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봅니다. 어느 매장 입구에서 애완견을 가슴에 안고 매장에 들어가려는 아주머니와 그걸 말리는 직원들이 실랑이를 합니다. "이 개는 내 딸이에요. 내 딸" "그래도 안 됩니다. 개를 싫어하는 다른 손님들도 생각하셔야 지요" 얼마나 개를 사랑하면 '내 딸'이라고 개를 인격화 시킬까요? 그래도 개는 개일 뿐, 개를 자기 딸이라고 하면서 인격화시키면 안 됩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개를 인격화시키면 개가 가지고 있는 기운들이 사람에게 전이가 됩니다. 그래서 개를‘내 딸' 이라고 하면 개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개의 특성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니 개를 딸이라고 하는 사람은‘개 어미’가 됩니다. 흔히 심한 욕 가운데 '개새끼' 라는 것이 있는데, 그보다 더 심한 욕은 '개 어미'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듣고 사람을 잘 따라도 개는 개입니다. 개 같은 사람이라고 남을 비하하는 표현처럼 이라면 사람이 개가  될 수는 있어도 개가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이들이 개를 좋아하는 것은 단순히 개가 예쁘고 귀여워서 이지만, 어른들이 개를 좋아하는 이유는 '마음 둘 곳이 없어서'라고 합니다.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고 그분에게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 자리를 개가 차지하면 안 됩니다.

희랍 신화에 레테호수의 이야기라는 재미있는 글이 있습니다. 한 여인이 스틱스 강에서 이제 영원한 나라로 강을 건너가려고 하는데 뱃사공이 그에게 "이 강을 건너기 전에 레테호수의 물을 마시고 갈 것인지 마시지 않고 갈 것인지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하니까 이 여인은 다시 물어봅니다. "그래 이 물을 마시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뱃사공은 이제 말해줍니다. "이 물을 마시게 되면 지난날의 괴로움을 말끔히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 여인은 눈을 반짝이면서 "아 그럼 빨리 마셔야지요. 고통스러운 일, 지난 과거들 말끔히 잊어버리고 싶은데요" 했더니 뱃사공이 다시 한 마디 덧붙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야 될 것이 있는데 이 물을 마시면 동시에 모든 기뻤던 일도 다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순간 여인은 고민에 빠집니다. 아프고 괴로웠던 일은 잊어버리고 싶지만 기뻤던 일까지도 다 잊어버려야 한다는 데는 문제가 있어서 한참 생각하고 나서 "마시지 않겠어요"하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 잊어버리고 몽롱한 가운데서 평안하기보다는 차라리 고민하며 고통을 느끼며 걱정하면서 행복한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다 잊어버린다고 해결이 되거나, 내 기억에서 없어진다고 해서 사건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한 네 가지 질문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무엇인가 고민할 것은 고민해야 되고, 아프고 괴롭더라도 생각할 것은 생각해야 그에게 밝은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 혹은 중간에든지 혹은 일을 마감하려고 할 때 우리는 당연히 네 가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첫째는 손익계산입니다.

무엇을 얻었으며 무엇을 잃었는가? 무엇을 얻을 것이며 무엇을 잃게 되겠는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뻔히 손해나는 일을 알면서 그 일을 지속하고 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유익하다면 무엇이 유익한가? 오늘 유익할 것인가 내일 유익할 것인가? 보다 더 먼 장래를 위해서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그 가치를 판단해야 합니다.

둘째는 목적을 물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했던지 간에 무엇을 위하여 한 것인가, 궁극적 목적이 무엇이었나? 이제 다 지나고 나서 결산하면서 물어보아야 합니다. 정말로 목적이 무엇이었나? 간혹 교회 봉사하는 분들 가운데도 봉사는 열심히 한 것 같은데 마지막에 보면 원망 불평인 분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한 일이고 일하는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정말로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이 일을 해야 했던가? 목적을 재진단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잘 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일이 잘될 때는 잘된 이유를 확실히 알아야 그것을 지속할 수가 있고, 잘 된 이유에 대해서 깊은 연구가 있다면 한 번에 끝나지 않습니다. 또한 잘못 되었다고 할 때는 아무리 괴롭고 아파도 무엇이 잘못 된 것인지 알아야 됩니다. 잘못의 이유에 대해서 냉철한 판단이 없으면 악순환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어디까지 왔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즉 시점을 이해해야 됩니다. 과거는 현재로, 현재는 미래로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습니다. 내가 어느 시점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일을 마감해야 될 사람이 시작하겠다고 한다면 지혜롭지 못한 생각입니다. 내가 이 시점에서 해야 할 일이 뭔가? 이 시간은 내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무엇을 요구하는가?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이 시기를 알라! 주어 진 시간, 이 시점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처한 시점에 대해서 확실해야 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으니." 지금 이 시점이 깊은 밤으로 치닫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밤이 점점 깊어지면 낮이 가까이 왔다는 걸 의미합니다. 밤은 아침을 예고하고 낮은 저녁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기에 밤이 깊었다는 이 현실 속에서 밤에서 밤을 생각해선 안 됩니다. 밤에 젖어 들어서 밤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은 이 밤은 지나가서 점 점 깊어지고 아침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험하고야 깨닫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경험하기 전에 알기 위해서 우리가 공부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미리 경험한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전수해주어서 내가 경험하기 전에 아는 것입니다. 시집가기 전에 시집살이를 알고 결혼하기 전에 결혼을 알고 죽기 전에 죽음을 아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꼭 죽어야만 죽음을 알거나 죽을 때 가서야 죽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 미리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밤이 깊었다고 할 때에 우리의 의식도 밤에 묶여서는 안 되고, 캄캄한 밤에 살고 있어도 우리의 생각만은 벌써 저 앞에, 저 아침에 가 있어야 하며 그래서 아침이 오고 있음을 의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밤은 깊었다는 이 사실은 아침이 다가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의 삶에 오늘만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현실에 살면서 현실만 생각해선 안 되고, 젊었다고 젊음만 생각해선 안 됩니다. 우리는 다음 단계를 계속 생각하고 의식해야 합니다. 의식은 벌써 저 아침에 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심판을 보는 동시에 구원의 날이 전에 보다 가까워 왔음을 보고 구원을 의식하는 것을 복음적 역사의식이라고 합니다. 심판 뒤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심판과 함께 구원의 아침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서,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섭리, 오묘한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귀한 말씀을 주십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라" 이런 밝은 아침이 오고 있기 때문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라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밤이지만 이제 낮이 오고 아침이 다가오니까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어두운 가운데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빛이 보이질 않을지라도 빛을 보듯이 밝은 햇빛 앞에 선 것처럼 그렇게 행하라는 말입니다.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는 다섯 가지를 결심하고 한평생 지켜 살아온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첫 째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전력을 다 해서 주님의 뜻을 이룰 것이고, 둘째는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거나 욕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며. 셋째는 앙갚음을 하거나 혹 분하다고 해서 복수하려는 마음에서 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며 넷째는 걱정거리나 부끄러움으로 남을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 되는대로 살아놓고 나이 많아서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끄러움으로 남을 일은 하지 않으며 모든 시간을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시간으로 보낸다. 절대로 부정적이거나 절대로 소극적인 일은 하지 않는다. 이렇게 살았다고 합니다.

구원의 커트라인

우리의 생각보다 구원의 커트라인은, 훨씬 높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을 얻기 위함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으면, 병도 낫고, 부자도 되고, 성공도 할 수 있고,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도 있고 고상한 인격수양도 되고, 선하게 살 수도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자체가 믿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병은 병원에 가도 나을 수 있고, 예수 안 믿어도 부자 될 수 있고 믿음 없어도 성공할 수 있고, 기도 안 해도 복권에 당첨될 수 있으며 예수 안 믿는 사람 중에, 착하고 선한 사람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은 '구원'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과 '교회를 다니는 것(교인)'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수를 믿지 않아도 교회 다닐 수는 있지만 교회는 다니면서도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지 아니하고 그분과 인격적인 만남이 없다면, 천국 커트라인에 못 미칠 수 있습니다. 천국은 돈으로도 못가고, 지식으로도 못가고, 선행으로도 못 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는데, 그분을 통하는 길은 오직하나 '믿음'뿐입니다. 내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분이 내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믿음' 말입니다. 무서운 사실은, 믿음이 전혀 없어도 교회생활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죽을 생명을 살리는 낙하산

구원의 확신 없이 교회에 다니는 것은 아마도 낙하하는 군인이 낙하산을 비행기에 놓은 채로 낙하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낙하하는 기술도, 낙하하는 지식도, 경험도 갖추고 있지만 결정적인 한 가지가 부족하다면 낙하산이 없다는 문제입니다. 이미 숨이 끊어진 사람에게 좋은 집을 사주고, 좋은 자동차를 사주고, 좋은 음식을 제공하면 무엇 하나요? 이미 죽었는데, 구원받지 못한 교인들에게 교육을 시키고, 훈련을 시키고, 선행을 강요하고 구제를 함으로 위안 삼게 하는 일이 그와 같은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 안에는 낙하산을 안 메고 뛰어내리는 성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과는 뻔합니다. 죽음입니다. 죽을 생명 살리는 낙하산은, 보혈을 지나 믿음이라고 하는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모태신앙의 교인일 때 선민사상에 빠져, 구원의 착각 속에 헤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인지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구원의 확신을 받은 후에 나에게 구원의 긴박성과 중요성을 야단쳐서라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를 위해 일한 것이 없다고 주야로 죄를 먹고 마신다고 속상해 하지만 주님의 관심은, 우리의 건강에 있으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많은 일을 성취했는가? 얼마나 의롭게 살고 있는가? 얼마나 유명한가? 를 살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제대로 신앙생활은 잘 하고 있는지? 영의 양식은 잘 먹으면서 교회를 다니는 것인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이 더위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는 우리 자신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원하십니다. 지금의 모습, 그대로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너의 마음을 나에게 달라' 하십니다. 일을 잘해달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고,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며 유명해지라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무명하고, 무능해서, 속상해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기갈하고 곤곤한 것 때문에 못 견뎌 하십니다. 누가 뭐라 해도 우리는 주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걸작들입니다.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선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얼굴을 보기 원하시듯, 부모님은 자녀들의 출세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의 전화 한 통화를 원하시듯이 주님은, 우리의 목소리를 듣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얼굴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냥 우리만 보시면 잠잠히 좋아 하시며 어쩔 줄을 몰라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는 바쁨이 아니라 기쁨이 자랑이다

여러분! 주님의 엄숙한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현재 충만한가요? 영적으로 건강한가요? 말씀으로 배부른가요? 그렇지 못하다면 모든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부모에게 자식의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듯이, 하늘 아버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것도 병든 영혼이 아니라, 잠든 영혼이 아니라, 충만하고 깨어있는 영혼입니다. 시들은 영혼이 아니라, 싱싱한 영혼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다른 것들을 내려놓아도 되고, 가능하다면 좀 중단해도 되고, 주의 일을 하다가 좀 실수해도 되고, 더디게 이루어도 되고, 좀 유명하지 못해도 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간절한 소망은 아프지 않고 힘들지 않게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바쁨이 자랑이 아니라, 기쁨이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결단의 시간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시기는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시기는 헬라어 원문을 보면 카이로스(kairos)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말하는 두 단어가 있는데 크로노스라는 단순히 지나가는 시간을 뜻하는 단어가 있는 반면 시간의 의미를 강조하는 카이로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의미 있는 시간,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시간,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 자신의 전 인격을 걸고 결단하는 시간을 가리켜 부를 때 사용하는 특수한 말입니다. 아무리 오래 살고, 열심히 일하고, 공부를 하고 그래서 출세하고 성공한다 하더라도 이 카이로스 시기를 모르고 살아가는 삶은 영적으로 볼 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루를 살고 한 시간을 살고 일분을 살고 일초를 살아도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삶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사건을 경험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복되고 위대한 삶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얼마나 의미 있게 보내고 있습니까? 흘러가는 시간 시간을 얼마나 사건화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래 산다고 하는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시간을 오래 산다고 할지라도 의미 없는 인생을 오래 살았다면 그만큼 불행한 것입니다. 짧은 인생을 살았어도 의미 있는 삶, 사건 있는 삶을 살았다면 그 삶은 행복한 삶이라 단정 지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말씀과 영혼의 만남

우리가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가려면 말씀과 우리의 영혼이 만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만나지 못한 신앙생활이란 의미 없고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만나서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변화된 삶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늘 우리의 삶 속에서 말씀과 내 영혼이 만나기를 위하여 힘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만날 때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는 결코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이 그러하듯이 계속 앞으로만 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어두움 속에서 빛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 미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어두움의 일을 벗으라고 합니다. 마치 옷을 벗듯이 어두움의 일, 어두움에 관계된 것 다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환 한 밝은 빛,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리할 때 아침이 와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고 밝은 빛이 내게 다가와도 그는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구원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웠습니다. 구원을 바라보며 새로운 역사의식을 가지고 다시 출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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