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을 떠난 이들에게 (왕상 18:30-40)

  • 잡초 잡초
  • 270
  • 0

첨부 1


하나님을 떠난 이들에게
열왕기상18;30-40 

1.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

      결혼한 어느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남편에게 평소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합니다.

      “여보 이제부터는 일주일에 한 번만 집에 들어갈게요. 집에 들어가는 그 날도 밥 세끼 다 차려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아주 바쁘면 한 달 아니 그 이상도 못 들어갈 수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알다시피 정신이 깜빡 깜빡할 때가 많잖아요. 제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다른 남자와 같이 있을 때도 있을 거예요. 그 남자와 같이 다녀도 이해해 주세요. 그 남자가 돈이 많다면 나는 아마 집에 영원히 안 들어올지도 몰라요.”

      여러분이 만약 이 여인의 남편이었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결혼한 여인이 남편에게 충실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 하나님께 열심을 품는 사람,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을 갖고도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우리가 읽었던 이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유다에서는 아사왕이 통치하는 동안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다섯 번의 정권교체가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쿠데타가 일어나고 우상숭배가 전 나라를 휩쓸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아합이라는 왕이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일이 횡행하기 시작했습니다.

(1) 광야의 이스라엘

      그렇다면 왜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 바알이라는 신과 아세라라고 불리는 그 신을 숭배하고 섬겼을까요? 그 당시 바알과 아세라는 풍요와 농작물의 신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번영과 경제가, 즉 잘 살고 못사는 것이 바알과 아세라에게 달려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쾌락과 재물이 이 신에게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신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이 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할 때, 그리고 광야를 지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갈 때 어떤 경험을 합니까?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 땅을 쑥대밭으로 만드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스라엘을 쫓아오는 애굽 군대를 홍해에서 수장시켜 버리시고 이스라엘을 바다 가운데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광야를 지날 땐 어떠했습니까?

언젠가 이스라엘에서 유학하시던 목사님께서 교회에서 설교하던 중에 광야에 가서 기도해 본 적이 있노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가보니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이더라고 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독사와 전갈이 사는 땅 그 광야를 지나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뼈에 사무치도록 배우게 됩니다. 추위와 더위로 고통당할 때에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아침마다 메추라기와 만나로 먹이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입고 있던 옷과 신발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헤어지지 않고 있는 것도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는 것도 광야에서 경험합니다. 가나안에 들어올 때는 여리고성이 두부 조각처럼 무너져 내리는 것도 목격합니다.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소유한 백성이 이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것 같은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에 기록된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을 경험하였던 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게 되었다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2) 가나안의 이스라엘

      처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며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헤어지지 않는 옷과 신발을 신지 않아도 되는 좋은 옷과 좋은 신발을 신고 있었고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매일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으며 살더라는 것입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없어도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집에서 살더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섬기는 신전에 가보니까 부부 사이에서 허락된 성적인 욕망이 너무나도 자유롭게 분출될 수 있더라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편리하고 자유롭고 감정에 충실한 이 생활이 정말 이스라엘 사람들 눈에는 괜찮아 보이게 됩니다.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아주 조금씩 하나님이 없어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없이 사는 방식을 조금씩 알아 가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때에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거리면 우리는 “아이쿠야 잘못 했습니다.” 하겠지만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도 살아지는구나 하고 사람들은 배우게 됩니다.

또 보니까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또 그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불편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내 친구들도, 내 친척들도 다 슬쩍 슬쩍 즐기면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있으니 나도 그렇게 살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알과 아세라에게로 넘어갑니다. 오직 사람들의 관심은 눈에 보이는 것을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그것가지고 얼마나 재밌게 사는지 이지 하나님의 복을 기다리며 사는 것은 너무나도 지루하고 비현실적이고 목사님들이나 그냥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처음부터 하나님을 떠나는 이는 없습니다. 여러분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TV를 켜도 잡지를 봐도, 신문을 봐도 온통 돈 벌어서 이것 사라, 저것 사라,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 라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마치 그것 없으면 그것 사지 못하면 죄를 짓는 것처럼, 그것 없으면 사람 구실 못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리고 돈 좀 있으면 어떻게 더 자극적으로 즐길 수 있는지 이곳 저곳에서 가르쳐 줍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하는지,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진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기를 원하고 계시는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녀들이 어떻게 자라기를 원하시는지 어느 곳에서도 들을 수 없습니다. 오직 교회만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가 정말 아무 곳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는 곳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두다 하나님 없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납니다.

2. 지금 엘리야가 직면한 상황

      이런 이스라엘의 분위기에서 그 현실을 아파하고 하나님을 기대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아무도 하나님에 대해 묻지 않고 아무도 하나님을 기대하지 않는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말씀하고 계신다고 피를 토하듯이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예, 선지자 엘리야입니다.

지금 엘리야는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들과 대결을 벌이고 있습니다. 누가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신지 한 번 보자는 것입니다. 각자 제단을 쌓고 제물에 응답하는 분이 누구인가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솔직히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850명의 제사장들이 제단 위에 송아지를 잡아 놓고 자신들의 의식을 하면서 불을 기다렸지만 바알과 아세라에게서 어떤 응답도 없었습니다. 이제 엘리야가 하나님의 불을 기다려야 할 순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엘리야가 하나님의 불,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며 하였던 것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1) 엘리야는 제일 먼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였음(30절)

      30절에 엘리야는 제일 먼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였습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을 향한 제단은 무너져 있었고 낡아 있었으며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많이 가지는 것과 즐기는 것에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지 않을 때, 내 마음에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다른 것을 들이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단이 가장 먼저 무너지고 퇴락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 같은 것은 기대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무너지고 예배가 예배 같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교회 다니는 사람의 예의로 1시간 앉아 있어 주겠다는 생각으로 참고 있다가 축도가 끝나기 무섭게 나가버리는 것이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예배에 늦거나 빠지게 되는 것은 예배가 무너지고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엘리야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바알을 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기대할 수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이 무너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고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단을 수축하는 일을 제일 먼저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가 기다릴 때에 가장 먼저 일어나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를 회복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2) 여호와의 단을 수축할 때 열두 돌을 취해서 단을 쌓음(31-32절)

      두 번째로 엘리야가 한 것은 야곱의 아들들의 수효를 따라 열 두 개의 돌을 가지고 단을 쌓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돌을 가지고 단을 쌓은 이유는 뭘까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이스라엘의 원형이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을 이룬 것은 백성들의 수도 아니요,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엘리야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돌을 가지고 단을 쌓는 이유는 그 때 그 조상들이 섬기는 그 하나님께 예배하겠다는 것이고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고 나라를 세우셨듯이 지금 이 영적 간음의 현장을 물리쳐 달라는 엘리야의 간절한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떠나는 이 시대에, 몸은 와 있어도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 있는 이 시대에 엘리야는 그 옛날 조상들의 하나님, 먼지 뿌옇게 내려앉은 그 성경의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 나아와 누구를 떠올려야 합니까? 우리의 사업장에 찾아 올 사람들을 떠올려야 합니까? 미처 마무리 못한 사업계획을 구상해야 합니까?

엘리야는 우리에게 성경의 하나님, 우리를 이 자리로 모이게 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분에게로 돌아가라고 촉구합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3) 엘리야가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37-38절)

      이제 엘리야는 번제물과 나무에 도무지 불이 붙지 못하게 해 놓고 물을 뿌리고 있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물을 뿌려 단에는 물이 흐르고 도랑으로 물이 가득하였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어떻게 기도합니까?(37절 외움)

수만의 사람들이 수 만 가지 기도의 제목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엘리야 시대에 하나님께서 듣기를 원하셨던 기도 제목은 단 한가지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엘리야가 올렸던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이 듣고 싶어 하는 기도는 우리의 사업장에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듣고 싶어 하는 기도는 겨울이 되기 전에 우리 집 차를 더 좋은 차로 바꿔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내 자녀들이 괜찮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엘리야는 어떤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까?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영적 간음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보여 달라는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서 이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켜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듣고 싶어 하는 기도, 우리가 해주기를 기대하는 그 기도가 우리의 입술을 통해 나올 때 그 때 응답이 있고 그 때 하나님의 임재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여야겠습니까?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회복되기를 기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여 지기를 기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정신이 이 물질 중심인 세상의 가치관에 혼미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처음 미국으로 유학 간다고 하였을 때에 한 권사님께서 저에게 “이제 목사님도 큰물에서 노시려고 외국으로 나가신다.” 라고 하셨습니다. 나가 보니 큰물은 큰물인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큰물에서 있으니 제가 한국에서 마시던 물을 더 이상 안 마시며 살아도 될 듯이 살았습니다. 아무리 큰물에서 놀아도 나를 살리는 물,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수를 마시며 살아야 하는데 그냥 없이 살았습니다.

교회를 더 잘 섬기기 위해, 더 공부를 하기 위해 유학의 길을 택하였고 아주 훌륭한 교수님들 밑에서 수많은 신학 서적에 파묻혀서 5년을 보내었습니다. 교수님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는 페이퍼를 쓰기 위해 밤을 새운 적도 있었고 석사 과정을 거쳐서 박사 과정에 들어가기 위해 애를 쓰고 박사 과정에서 탈락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 긴장 가운데 시간을 보낸 적도 많았습니다.

좋은 도서관 환경에서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가 되어서 다시 한국교회에 나타나리라 기대하며 공부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교회에 돌아갈 수 없는 목사, 하나님을 말할 수 없는 설교자가 되어가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교회에 관한 많은 책을 읽지만 하나님과 교회에서 점점 멀어지는 이런 기막힌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어느 날 문득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엘리야처럼 나타나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저의 영혼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가끔씩 동네에서 밤 새 술에 취해 흐릿한 정신으로 대낮까지 어느 집 담벼락에 기대어 쓰러져 자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발견한 제 영혼의 모습은 마치 흐린 정신으로 벽에 기대어 쓰러져 있던 그 사람들처럼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 “살려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라고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구하는 기도, 하나님을 기대하는 기도,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고백하는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사업은 번창일로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들은 여러분의 권위를 인정해주는 착한 자녀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직장에서 여러분은 존경받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영혼은 건강하십니까?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을 구하는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아니시면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아직도 그렇게 기도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좇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 것을 알고 계십니까?

(4) 불이 내리는 단(38절-40절)

      엘리야가 잘 사는 것, 즐기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그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도하였을 때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38절 같이 읽음.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제단에 있는 것들을 다 태워버리고 도랑의 물까지 다 말려 버렸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위해 쌓은 단과 바알과 아세라의 단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똑같이 송아지를 잡아 올려놓고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두 단 사이엔 도저히 같아질 수 없는 것 하나가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흉내 낼 수 있지만 도무지 만들어 낼 수도 없고 같아질 수도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불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수많은 믿음들과 종교들과 가치관들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과 다른 것은 여호와의 불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가운데 여호와의 불이 없다면 우리가 믿는 것이 다른 사상, 다른 가치관,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뭐가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의 예배에 여호와 하나님의 불이 없다면 여러분들이 가보았던 친목회, 향우회, 동기회와 뭐가 다르겠습니까?

교회가 교회를 아주 예쁘게 꾸며 놓았습니다.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이 와 교회 건물도 이렇게 편하고 아늑한 장소가 될 수 있구나 하고 놀라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이 여기에서 하나님의 불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리모델링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교회에서 제 아무리 열심히 리모델링을 한다 하여도 호텔이 주는 안락함과 만족감을 줄 수 없고, 예배를 아무리 새가족 중심으로 만들어도 영화와 TV 드라마 같은 재미를 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구역 모임을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도 끈끈한 친목 도모는 여러분의 동기 모임을 어떻게 따라 가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불이 우리 가운데 있지 않다면 우리의 예배, 우리의 모임은 교회 바깥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보다 더 못할 수도 있습니다. 비록 조금 덜 안락해도, 영화나 TV에서 보여주는 잔재미는 없어도 하나님의 불이 우리 가운데 있다면 사람들의 어떤 모임에서도 받을 수 없었던 위로와 평강, 그리고 치유, 능력 주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있는 교회 공동체엔 하나님의 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불이 있는 공동체는 사람들이 변하고 또 그 변하는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변하도록 영향을 줍니다. 많이 가진 사람처럼 되기 위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없는 사람, 약한 사람, 아픈 사람을 돌아보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새로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이 있는 공동체, 살아있는 공동체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읽었던 본문의 39절이 그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39절에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라고 고백합니다. 사람들이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예배 중에 임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체험할 때 우리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성경의 그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하심을 경험할 때에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을 예배하게 됩니다. 저절로 우리의 얼굴을 가리우고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도대체 설교하는 저 목사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전혀 이해가 안 된다 할지라도 예배 중에 일어나는 심상찮은 분위기를 발견하게 되고 그 하나님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이 모시고 나오신 그 분이 오늘 설교를 이해하는지, 예배에 적응을 하는지 너무 고민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나타나시길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렇게 일하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제 여기서 마지막으로 아주 중요한 질문에 답해 보아야 합니다. 왜 엘리야의 단에 하나님께서 불을 내리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바알, 아세라 보다 더 강력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나타나시는지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 없으면 곧 죽을 것처럼 하나님을 따르는 헌신된 백성에게 나타나고 계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떠나 살 던 사람들에게 나타나십니까? 예, 맞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바알과 아세라를 좇던 사람들, 하나님 없어도 살 만 하다고 생각하던 사람들,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하나님보다는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바알신을 굴복시키고 내가 진짜 하나님이지 하고 힘자랑하시기 보다는 하나님을 떠나 있던 자신의 백성들에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떠나 있어 하나님을 보지 못한 자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고 싶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십니까? 하나님을 떠난 그 사람들 용서하고 싶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그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고 싶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던 사람들의 불신앙과 하나님 없는 생활을 불로 태워 버리고 싶으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을 찾아 주기를 다시 하나님을 예배해 주기를,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주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자신을 얼마나 나타내고 싶으셨을까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으셔서 우리 중 누군가 하나님 당신을 찾는 기도해주기를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고 계십니까? 우리의 예배 현장에서 자신의 백성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예배를 귀하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사람을 변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동시에 여러 사람에게 나타날 때 우리는 그것을 부흥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그것을 기대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기를 기대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무관심, 불신앙, 그리고 재물과 성공을 위해 달려가는 우리의 모습을 태워버릴 하나님의 불이 우리 가운데 떨어지길 기도하는 분이 계십니까? 엘리야의 기도에 불로써 응답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여기에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진심으로 불러 주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하나님의 일하시는 것을 경험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에서 살아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시길 기대하고 예배의 자리를 회복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빈 마음으로 돌려보내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각성이 일어나기를,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일이 일어나기를, 우리의 예배에 하나님의 불이 내리기를 기대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