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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답도다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롬 1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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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우리에게 새힘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8월을 시작하는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1부 부터 4부까지 제가 설교와 성찬을 모두 집례하느라 제일 분주한 주일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는 2달에 한번 성찬을 하는데 참으로 성찬을 할 때마다 기대가 되고 마음이 설레이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참여한다고 하는 감격이 있기 때문인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시시때때로 성찬이 필요한 이유는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매일 느끼고 확인한다는 면에서 중요합니다. 자동차의 앞 유리가 때가 끼어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 물로 닦아주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적 삶도 이런 저런 세상적인 것으로 인하여 영적인 시야가 흐려져 있을 때 순결함을 회복하는 시간이 성찬의 시간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선포하신 15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그렇습니다. 첫째는 보내심입니다. 보냄을 받아야 전파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보낸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파송입니다. 우리는 파송이라고 말하면 선교사를 먼저 생각하지만 여기서는 모든 주의 종들을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저는 자랑스러운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고, 연회 감독으로 부터 평안의교회 담임목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설교하는 것이 당연히 여겨지지만 이것은 파송받은 자의 특권입니다. 또한 평안의교회 모든 부서에서 설교하는 이들은 담임목사의 위임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젊은이교회는 나길석목사님을 위임했습니다. 어린이교회는 정제설목사님을 위임했습니다. 꿈지기교회는 김성식전도사님을 위임했습니다. 그들이 사역지에서 설교하는 것이 당연한 것 같아도 사실은 담임목사의 위임을 받았기 때문에 설교할 권리와 자격을 얻은 것입니다.

이 위임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께서 열두제자를 양육하셔서 땅끝까지 파송하셨고, 제자들을 통하여 온 땅에 복음이 전파되면서 1885년 아펜셀러 선교사를 통하여 어둠의 땅 미지의 나라 한국에 까지 복음이 전파된 줄로 믿습니다.

2부 예배 시간에 우리 꿈지기에게 제가 말씀하면서 그랬습니다. 꿈지기들은 10대 초반부터 후반까지 곧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6년 동안의 시기를 살아가는 그야말로 꿈지기들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시계로 보면 오전 9시쯤 와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을 생각하면 지금 오후 4시쯤 와 있는 것 같습니다. 벌써 그렇게 된 것에 대하여 제 마음이 서글펐지만 어쩔 수 없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세계 각지에 파송을 받은 감리교 선교사만 해도 700명이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계방방곡곡에 파송을 받아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만 그분들도 가장 중요한 것이 어느기관에서 어느교회에서 파송을 받고 후원을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평안의교회에서 파송받은 신창규선교사입니다.’ 하면 대분분의 선교사님들은 "평안의교회요? 너무나 좋은 교회에서 파송을 받고 후원을 받고 있네요"하면서 부러워한다고 전해왔습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 시절 중등부 회장을 할 때입니다. 제가 섬기던 교회가 약대교회였는데 30여명의 작은 교회였으나 불행하게도 교인의 절반이 나뉘어져 목사님을 따르는 이들과 그렇지 않는 이들로 나뉘어 11시와 2시에 예배를 따로 드리고 있었습니다. 부끄럽고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소속한 중부연회에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약대교회하면 조그만 미자립 교회, 그리고 싸움질 잘하는 교회로 인식이 되어 있었어요.

그런 교회에 아버님께서 68년도에 부임하셔서 1년 동안을 화해의 목회를 하시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감사하게도 중보기도하면서 화해를 구한 결과 결국 그들을 하나로 통합시킨줄로 믿습니다. 하나가 되고 나니까 교회에 두가지 새로운 현상이 생겼습니다. 첫째는 전도의 문이 열렸고 둘째는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을 했어요. 한 20평이 되는 작은 교회에 예배때면 성도들의 자리가 듬성듬성 앉았는데, 점점 성도들이 차기 시작을 해서 목사님이 설교 직전에는 "자, 내 주를 가까이 한절하면서 앞으로 당깁시다...."하면서 자리를 앞당겨 앉다가 나중에는 강대상 위에까지 앉아야 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부흥의 불길이 이어져 1970년대 중반에 교회를 크게 건축하고 하나님께 봉헌하자, 그 때부터 소문이 나기를 약대교회하면 부흥하는 교회, 성장하는 교회, 젊은이가 많은 교회, 교회학교가 부흥하는 교회로 좋은 이미지가 부각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부정적 이이지를 가지고 있었을 때는 제가 중학교 어린 나이이지만, 행사 때마다 누가 "어느 교회에서 오셨어요?"라고 물으면 절대로 교회 이름을 말하지 않고 그냥 "부천에서 왔어요" 라고 대답하기 일수 였는데, 교회가 성장하는 교회의 대명사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누가 어느 교회 다니느냐고 물어보면 신이나서 ‘약대교회 다녀요’ 라고 하면 ‘네, 약대교회요? 어휴 요즘 엄청나게 부흥한다면서요?’하며 반기는 인사를 받으면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몰라요.

여러분 지금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파송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내가 너를 이방인을 위해서 보내노라" 바울이 어디에 갈 때마다, 누가 너를 보냈느냐라고 물을 때 마다 나를 보낸 자는 하나님이시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자랑스럽고 담대하게 증거한 줄로 믿습니다. 사도는 헬라어로 '아포스텔로'인데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보냄이 있어야 말씀의 선포가 시작이 됩니다. 바울사도는 이방을 위해서 파송을 받았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회당에서, 광장에서 말씀을 전파합니다.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들을 것이 아니겠냐는 말이겠지요.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그 말씀을 듣는 자가 있지요. 바울 사도는 그렇기 때문에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 좋은 장소이던지, 그렇지 않은 장소이던지 그는 말씀을 전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18세기에 부흥의 주역이었던 조지 휫필드목사님 그분이 정말 열정을 가지고 말씀을 전파하시는데,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 그렇게 열심히 하다가 쓰러지면 어떻게 합니까? 쉬면서 하십시오라고 이야기 할 때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녹이 슬어서 없어지기 보다고 닳아서 없어지기를 원합니다. 똑같은 쇳덩어리도 가만히 놔두면 녹이 슬어서 없어져 버립니다. 녹이 슬어져서 쓰임받지 못하고, 썩어져서 없어지기 보다는 끊임없이 쓰임 받아서 닳아서 없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을 갖습니까? 그냥 주일날 와서 예배나 참석하고, 왔다갔다 운동만 하면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봉사의 자리가 있으십니까? 정열을 다해서, 여러분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혼신의 힘을 쏟을 봉사의 자리를 가지고 계십니까?

녹이 슬어서 없어지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닳아서 없어지기를 원하십니까? 닳아서 없어진다는 말은 쓰임받는다는 말입니다. 불꽃같이 살다가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 더위에도 하나님의 귀한 일들을 위해서 수고하며 수고의 땀을 아끼지 않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사랑하는 평안의 모든 성도들 말씀을 증거하는 열정을 조지 휫필드목사님의 열정처럼 내 생명 다하는 그 날까지 쓰임받기를 원하는 그런 열정을 가지기시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듣는 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반대하고, 아무리 유대인들이 훼방을 놓았어도 그 중에 귀부인들이, 그 중에 헬라인들이, 그 중에 유대인들이 말씀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씀을 들어야 비로소 믿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마귀는 우리에게 두가지 가장 큰 방해공작을 하게 합니다. 첫째는 우리를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 시간에도 여러분, 눈동자가 풀려 있는 분이 한 두분 있어요.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조금 피곤한 시간이 아니예요. 생리적인 현상으로 졸릴 때가 아닙니다. 지금 조는 사람은 영성이 어두운 사람이예요.

우리가 아침부터 종일 성경공부하고, 무슨 훈련하고 그러는 시간은요, 학생들이 아침부터 8시부터 공부하는 건요, 점심먹고 나면 그 다음 2시에는 식곤증 때문에 깜박깜박 졸립니다. 만약 선생님이 식곤증 때문에 존다고 때리면 그 선생님이 잘 못하는 거지요. 그 때는 조는게 정상입니다. 그 땐 좀 더 재미있는 이야기하고, 움직이게 해서 식곤증이 달아나도록 배려를 해야지요.

그런데 지금 이 시간 아침 9시- 11시, 졸릴 시간이 아니예요. 지금 졸고 있다고 하는 것은 심각하게 영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늘 습관적으로 졸아요. 병적으로 졸아요. 그런 분들은 스스로 각성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영적으로 병들었구나. 여러분 병든 닭은요 시도 때도 없이 졸잖아요. 그럼 주인이 벌써 저거 병들었구나. 잡아 먹던지, 병을 낳기 위해서 주사를 놓던지, 약을 먹이던지 그래야겠다.

사탄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내시고, 보낸 자들을 통해서 말씀을 선포하게 하는데, 들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탄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원천적으로 듣지 못하게 귀를 막습니다.

심방을 가면 이런 현상들이 심각합니다. 새가족 심방을 가면 그 날 말씀을 들어야 하는 사람은 새가족이잖아요. 그러면 그 분을 위해서 교구장도 가고, 선교회장도 가고, 속장도 가고, 임원도 가고, 속회원도 가고 그렇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은 그 날 새가족을 위해서 다 영적인 도우미들의 역할을 해야지요. 심방을 가지전에 우리는 미리미리 교육합니다. 전화기 미리 끊어놓고, 휴대폰 전원 다 꺼놓고, 그리고 집안의 분위기를 은혜로운 분위기로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옷차림도 좀 경건까지는 못해도 좀 차분하게 옷차림도 하고, 그리고서 예배의 자리에서 아이들이 있으면 그 아이들이 예배에 방해되지 않도록 사탕이나 과자 같은 것을 통해서 아이들을 잘 케어할 수 있는 그런 준비들을 해 오면 사탕하나 꺼내어서 주고, 모든 분위기를 그렇게 만들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어요. 한참 말씀을 전하려고 그러는데 전화벨 소리가 따르릉 울립니다. 그러면 아이고, 내가 전화를 못 껐구나. 얼른 가서 코드를 탁 뽑던지, 아니면 전화기를 꺼 놓던지, 배터리를 빼던지 하면 되는데, 나가서 또 받아요.

아, 지금 내가 예배 중인데 한 시간 후에 걸어. 그럼 한 50점은 되는 사람이예요. 가서 한 5분을 전화하고 있어. 그럼 설교자는 어떻게 하란 얘기예요? 애가 우는데, 애를 안고 밖으로 나가 버려요. 그럼 거기 와 있는 사람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예요? 뭐예요? 거기 왜 와 있는 거예요? 애가 울면 얼른 먼저 들고 나가서 이 사람이 말씀을 듣는데, 애 때문에 방해가 안 되도록 얼른 주변사람들이 도와서 본인의 말씀을 듣는 일에 어떤 다른 환경적인 방해도 받지 아니하도록 돕기위해서 그 날 간 거거든요.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는데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못 드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미리미리 준비하자는 거예요. 환경도 준비하고, 사람도 준비하고, 다 준비해서 아무리 사탄마귀가 방해를 하려고 해도 방해가 되지 않아요.

지혜로운 교구장님들은 그 아이의 상황을 봐 가지고 사탕을 준비했다 울려고 하면 딱 꺼내서 주니까 소리도 안 나요. 얼마나 지혜로운지 몰라요. 그런가 하면 맹탕도 있어요. 오히려 자기 핸드폰이 울려요. 기가 찰 노릇이지요.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믿음이 생기는 줄 믿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듣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맨날 듣는 거 오늘은 딴 데로 빠져라. 8월달은 휴가철 아니냐? 교회는, 예배는 방학도 없다더냐? 속회는 방학을 안하느냐? 이러면서 우리로 하여금 듣는 자리에서 자꾸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무슨 방학이 있어요? 휴가 가려면 조용히 다녀 오세요.

왜 그렇습니까? 오늘 이 예배가 내 생애에 마지막이 될 수도 있고, 오늘 이 예배가 유일한 예배가 될 수도 있어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어제 예배까지는 내가 은혜가 되지 않았는데, 오늘 말씀에 그의 영혼이 거꾸러져서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할 수 있는 시간을 사탄마귀는 멀리멀리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었을 때 비로소 믿음이 생기는 줄로 믿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제가 평생 목회하면서 좌우명으로 삼은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인데 가끔식 내 자신을 보면 볼 품도 없고 뭐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 연약함을 느낄 때, 기도하면서 이 말씀을 보면 새힘이 솟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거 종이라고 생각을 해 봐요. 이 종이를 손가락을 딱 찍으면 그냥 순간적으로 뚫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종이를 저 벽에다 붙여놓고서 손가락으로 찔러 보세요. 손가락이 부러지지 종이는 찢어지지 않습니다. 주먹으로 쳐 보세요. 주먹이 부서지지 종이는 찢어지지 않습니다.

종이가 강한 것입니까? 종이는 여전히 종이지만, 그 뒤에 벽면이 강하기 때문에 종이가 강해 진거예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는 약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 사탄 마귀도 우리를 손대지 못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방패로, 우리의 산성으로, 우리의 피난처로 삼는 것입니다.

제가 작지만 당당할 수 있는 이유, 사람들이 저를 보면 그래요. 저를 보면 눈동자가 살아 있대요. 제가 눈이 커요? 작아요? 작다고 그러면 좀 섭섭하고 작은 편이지요. 그래도 볼 건 다 보거든요. 제가 연약한 부분이 많지만 제가 당당할 수 있는 것은 내게 능력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이 믿음이 생기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여러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평상시에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듣고 들음으로 인해서 믿음이 생기는 거잖아요. 그런데 평상시에는 믿음이 생겼다고 해도 표가 나지를 않아요.

제가 어렸을 때 렌턴을 가지고 장난을 많이 쳤는데, 참 그게 신기했어요. 그 렌턴을 큼지막한 배터리를 넣고 밤에 그 렌턴을 켜면 밤하늘에 쫙 빛이 나갑니다. 별까지 비치는거 같아요. 너무 좋아요. 그런데 낮에 렌턴을 켜면 켜긴 켰는데 표가 안 나요. 그렇다고 렌턴이 꺼진 것은 아니예요. 켜긴 켰는데 표가 전혀 없어요. 그런데 밤이 되면 밤하늘을 뚫고서 별까지 비치는 것 같아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의 미음이라고 하는 것은 낮에는 표가 나지 않아요. 낮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의 삶에 형통함을 의미합니다. 아무 문제가 없을 때, 우리에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언제 빛이 나요? 밤에, 밤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의 삶에 위기가 다가왔을 때, 시련과 고통의 때가 왔을 때 그 때에 믿음을 가진 사람은 별처럼 빛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러 가지 공격에 처할 때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믿음을 쓰세요. 그 때 믿음을 써야 합니다. 평소에는 그럴 듯 하고, 비슷비슷해서 믿음 준비하는 것 게을리 하다가 환란이 오고, 역경이 오고, 고난이 왔을 때 믿음을 써 보려고 하니까 그 때에는 다 날라가 버렸어요.

그 때는 아무리 애를 써도 믿음이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형통함을 주실 때 오늘 여러분에게 낮과 같은 삶의 은혜를 주실 때 믿음을 준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부르심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영어로 다섯 가지의 단계를 말합니다. 보내심(Sending)입니다. 전파하심(Preaching)입니다. 들으심(Hearing)입니다. 믿음(Believing)입니다. 부르심(Calling)입니다. 다섯가지 단계를 통해서 결국 우리가 소명을 받습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시옵소서. 이사야가 소명에 몸부림 쳤던 것처럼 그 때에 주님께서 내가 너를 이스라엘을 위해서 보내노라. 주님께서 사울바도를 부르십니다. 내가 너를 이방인들을 위해서 보내노라. 그리고 부름 받은 그를 파송하실 때 다시 파송받은 그가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통해 듣고, 듣는 이에게 믿음이 생기고, 믿음을 통해서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다시금 주님 앞에서 파송을 받아서 이것이 계속해서 싸이클링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내가 처음에 부름을 받아서 내가 말씀을 듣고, 내가 믿음을 가지고 신앙을 고백해서 부름을 받으면 또 다른 사람을 전도해서 그 사람이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고 부르심을 받으면 또 다른 사람이 부르심을 받고 그래서 끊임없이 양육이 이루어 지는 거예요.

건강한 교회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이 삶의 과정을 계속해서 체험해서 다른 사람들을 계속해서 양육해 나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전하시는 기쁜 소식, 지금 사형을 면한다고 하는 소식을 전한다는 사명을 받았다면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지금 사형장에서 집행하려고 하는데, 지금 사형을 면한다는 소식을 전하게 되었다면 어찌 걸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어찌 흥분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전도하는 사람은 흥분해 있어요. 늘 열정으로 흥분해 있습니다. 죽어가는 우리 부모님들, 죽어가는 우리 남편, 죽어가는 우리 자식들, 죽어가는 우리 이웃들 보면 불쌍하잖아요.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살았습니다. 살았어요! 그 생명의 소식을 전하러 가는데 걸어갈 수 있어요? 뛰어가야지요. 그 목소리의 톤이 평상시의 톤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한 옥타브는 올라가야 되지 않아요?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주님의 부르심,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우리가 귀한 일을 전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애굽에서 영혼을 구원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가는 모세의 음성이 평상시의 음성이었겠습니까?

출발해서 출애굽에서 이제 가나안 땅으로 가자고 선포하는 그의 음성은 떨렸을 것이고,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와 자기 민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겠다고 하는 기대에 그는 감격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걸음, 감격의 발걸음입니다. 이것은 기쁨의 발걸음입니다. 말할 수 없는 환희의 발걸음인 줄 믿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주님께서 또다른 영혼들을 향해서 전하기를 원하셔서 여러분들이 그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신을 신고, 복음을 전하는 자의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한 기대처럼 여러분들도 그 영혼을 향한 기대를 가지시고 오늘도 세상을 향해서 복음을 향해 나아가는 복음증거자의 아름다운 발걸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다시 한 번 우리들 체험하며,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거하기를 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그 거룩하고 복된 자의 발걸음 오늘 나의 발걸음 되게 하시고, 나의 삶의 모습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들의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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