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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7) (출 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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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통하여 보여 지는 모세는 참 욕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 엄청난 일을 한 후에 가나안에도 들어가지 않고 혼자 느보산에서 죽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개인적인 야망이나 욕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평생 한 일은 그냥 욕심 없이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 베게하고 누워 살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 백성들을 출애굽하게하고 출애굽한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막중한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모세는 야망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명의 사람이었습니다. 대개 보면 개인적인 야망이 없는 사람들은 소명까지도 부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의 모세가 그랬습니다. 미디안에서 40년 동안 평범한 사람으로 양을 치고 자식 낳고 살던 모세에게 어느날 느닷없이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애굽의 왕자로서 정치적으로 복잡하고 골치 아픈 삶을 살던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평범한 범부로 사는 단순한 삶의 매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삶을 빼앗기기 싫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화나시게 하리만큼 끈질기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세보다 좀 더 끈질기셨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는 큰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소명이 야망으로 바뀔 때 사람은 추해집니다. 선거 때만 되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정치를 하겠다고 공약을 남발하고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악수하고 허리 굽혀 인사를 하다가도 막상 당선이 되어 정치인이 되면 그와 같은 소명을 다 잊어버리고 개인적인 정치적인 야망을 위해서 동분서주 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모습이 꼭 정치인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망 없음이 소명 없음과 혼돈되어 그저 청빈을 최고의 덕으로 알고 살 때도 사람은 역시 초라해집니다. 소명을 야망으로 바꾸어 사는 사람과 그와 같은 욕심을 다 버리고 청빈하게 사는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둘 다 다 모습은 다르지만 개인적이고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미디안에서 살고 싶어 했던 삶은 후자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그렇게 사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다.

초기의 우리 기독교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스케일이 크고 역사적인 의식이 있는 종교였습니다. 나라가 일본에 정치적으로 합병되기 이전 일본에 많은 빚을 지고 경제적인 속국이 먼저 되었습니다. 그것을 안타깝게 여긴 초기의 기독교인들이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 대표적인 운동이 바로 금 모으기 운동이었습니다. 저들이 나라를 위하여 반지와 비녀를 빼면서 했던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나라가 빚을 져서 망하게 되었는데 가락지는 끼어서 무엇 하며 비녀는 꼽고 다녀서 무엇 할까?’였습니다.

엄청난 금을 모아서 저들이 하려고 하였던 것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금을 모아 나라 빚을 갚자. 둘째 민족 자본을 형성하여 민족 기업을 일으키자. 셋째 학교를 세워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하자. 저는 당시의 우리 기독교가 너무 자랑스럽고, 요즘의 우리 기독교가 너무 부끄럽습니다.

1919년 3. 1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던 것도 우리 기독교였습니다. 당시 그 독립운동으로 감옥에서 옥고를 치룬 사람의 수가 가장 많은 종교가 우리 기독교였습니다. 감옥에 갇힌 천주교인, 불교인 , 도교인을 다 합해도 기독교인 수를 따라 갈 수 없었습니다. 백지도 둘을 가지고 한 백지도에는 당시 교회가 있었던 곳에 점을 찍고, 다른 한 백지도에는 당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곳에 점을 찍은 후 두 백지도를 겹쳐 보면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말만 들어도 당시 우리 기독교인들의 애국정신이 얼마나 강하였던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배당을 짓는 것 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학교와 병원을 먼저 세웠던 한국 교회였습니다. 반만년의 어두운 역사의 고리를 끊은 것이 우리 한국교회였습니다. 우리 한국의 개화는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당시 기독교인의 수는 지금과 비교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 몇 퍼센트도 되지 않는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나라와 민족을 축복하는 큰일을 담당하였던 것입니다. 당시의 우리 한국교회 교인들은 모두 모세와 같았습니다.

요즘 우리 한국교회와 교인들에게서 이와 같은 의식을 찾아보기는 참 어렵습니다. 신앙이 참 개인주의화 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참 이기적이 되었습니다. 부자 되고, 건강하고, 형통한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축복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커도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교회는 별로 없습니다. 개 교회의 부흥과 확장이 관심의 전부인 것 같아 보입니다.

초대교회는 그 수가 적었어도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었습니다. 그것이 결국 부흥과 성장의 엔진이 되어 오늘 날 이와 같은 기적 같이 큰 교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수가 많아진 요즘 우리들의 교회는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존경은 고사하고 인정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정체와 퇴보의 엔진이 되어 우리 한국 교회를 급격하게 사양의 비탈로 내리 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세상을 위하여 이 땅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의 목적은 세상입니다. 세상을 축복함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소명입니다. 그 소명을 위하여 하나님은 교회와 교인들을 축복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대부분은 그 축복의 목적인 소명을 잊고 축복 자체를 목적으로 삼습니다. 목적을 잊은 교회와 교인을 하나님은 더 이상 축복하지 않으십니다. 그와 같은 일이 이미 우리 한국교회와 교인들에게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잘 눈치 채지 못합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높은 숭의교회와 높은 뜻 숭의교회의 교인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목적과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사는 교회와 교인들이 되실 수 있기 바랍니다. 개인적인 야망에 빠져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교회와 교인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욕심과 야망에서 벗어나 미디안 광야에서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 벼게 하고 누워 사는 또 다른 모습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도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팔복 중에서 서로 상충되는 것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신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욕심 없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리고 목마름은 ‘욕심 많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팔복 중에서 ‘욕심 없음’과 ‘욕심 많음’을 동시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서로 상충되고 모순 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익에는 욕심 없는 사람이 되어라, 그러나 의에는 욕심 많은 사람이 되어라.’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작년 말부터 설교해 오던 희년재단 발기인 회의가 있었습니다. 희년재단이라는 이름이 너무 기독교적이어서 범국가적과 범사회적인 활동에 제약이 될 것 같아 그 이름을 ‘열매 나눔 재단’이라고 하였습니다. 재단의 영어 이름은 Merry Year Foundation 이라고 하였습니다. 禧年을 merry year로 푼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희년의 가장 중요한 실천을 평생 일구어 맺은 열매를 혼자 독식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과, 특히 가난하고 어려운 사회적인 약자들과 함께 나누는 것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잠언에 보면 마른 떡 한 조각만 가지고도 서로 화목 하는 것이 육선이 가득하고도 서로 다투는 것보다 낫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가지고 살아야만 하는 가난이 절대로 만만한 것이 아니지만, 서로 다투고 불화하며 사는 것 보다는 낫다는 말씀입니다.

사회적 불화의 가장 큰 요인은 강자와 약자, 부한 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갈등입니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강자와 약자, 부자와 가난한 자는 없어질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운명적이고 구조적인 갈등을 없이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참으로 많이 연구하고 노력하여 왔습니다.

그와 같은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사회주의적인 혁명을 통하여 세상을 뒤 엎어 버리는 것입니다. 꽤 통쾌한 발상인 것 같아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70년의 피비린내 나는 실험을 통하여 결국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사람의 머리와 마음에서 나오는 어떤 운동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저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운동 보다 좀 더 나은 운동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와 같은 갈등을 해결하는데 보다 좋은 운동이 ‘노블리스 오블리제’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주의 혁명도 사실 성공하기가 참 어려운 운동이었는데 혁명에는 어느 정도 성공하였습니다. 그런데 사회주의 혁명은 성공하였는데 결국 실패하였습니다. 설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운동은 설계로만 보면 사회주의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운동의 문제는 설계는 참 환상적인데 시공이 만만치 않다는 것입니다. 사회주의 혁명은 사회적 강자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약자에 의하여 이루어진 운동입니다. 사회적인 약자에게서 나오는 절망이 무서운 힘으로 역사하여 그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노블리스 오블리제’ 운동은 그 주체가 사회적인 약자가 아니라 사회적인 강자입니다. 있는 사람과 강한 사람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개혁과 혁명을 싫어합니다. 저들이 제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혁명입니다. 변화입니다. 개혁입니다. 때문에 이 운동은 참 설계가 거의 환상적이라고 할 만큼 완벽하고 근사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이상에만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열매 나눔 재단 (Merry Year Foundation)은 이 희박한 가능성에 도전하려고 합니다. 변화와 개혁을 싫어하는 계층에게도 복음이 제대로 들어가면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거듭남이 바로 변화와 개혁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약의 희년 운동은 사회적인 약자의 운동이 아니라 사회적 강자의 운동이었습니다. 저들이 스스로 저들의 평생이라고 할 수 있는 50년의 성공적인 열매를 사회에 환원한 것이었습니다. 얼마든지 편하게 부려먹을 수 있는 종들을 풀어 준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평등을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오순절날 성령으로 거듭난 체험을 한 초대교회에서 바로 이 희년의 삶이 다시 재현되었습니다. 누구도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필요에 따라 나누어 줄 줄 알았습니다. 저들의 공동체는 당장 천국이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희년의 삶을 실천할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희년은 부자들이 가장 겁내는 말입니다. 강자들이 가장 부담을 느끼는 말입니다. 그래서 가진 자들과 강한 자들은 희년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대개 레프트로 봅니다. 사회주의 혁명을 이야기하는 사람과 동일시 합니다.

희년은 가난한 자의 의한 혁명이 아닙니다. 희년은 참 혁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혁명의 주체는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혁명의 동력은 가난한 자들의 분노가 아닙니다. 희년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혁명의 동력은 성령님이십니다. 그것이 다릅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강하고 부한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이 되라. 너로 인하여 나라와 민족이 복을 받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정신을 가르치는 교회가 되고 싶습니다. 그와 같은 실천을 통하여 부와 권력을 가짐으로 누리는 만족과 비교할 수 없는 보람과 만족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드리는 그런 교회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회적인 갈등은 가진 자의 책임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가진 자가 자기의 것을 포기하고 내어 놓는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사회적인 약자가 되는 데는 보편적으로 볼 때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둘째는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사회적인 문제는 가진 자들이 책임을 다함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문제는 사회적인 약자 자신이 교육받고 훈련 받음으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약자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된 이유가 부자와 세상에만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상당부분 자신에게도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잘못된 자신을 교육하고 훈련하여 바꾸지 않는다면 아무리 가진 자들이 자신의 책임을 인식하고 자신의 부와 권력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하여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열매 나눔 재단은 가진 자들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과 병행하여 사회적인 약자들을 강한 사람으로 교육하고 훈련하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조금만 도와주면 스스로 일어나 얼마든지 생존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고 싶습니다.

그 첫 번 째 대상으로 우리 남한에 내려와 있는 탈북자들을 삼고 싶습니다. 저들을 위한 훈련 코스를 개발하고 연수원을 세우고 훈련하려고 합니다. 저들이 평생 살아온 북한과 전혀 다른 이 세상에서, 저들이 보기에는 아주 살벌한 이 세상에서 능히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프로그램을 아무리 많은 돈이 들어도 투자하여 개발하고 싶습니다.

남한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전문학교를 세워서 저들이 더 이상 이 사회에서 폐인처럼 살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습니다. 이 일은 물론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만 하면 자동적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인간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이 일은 성공률이 그렇게 높은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실패할 확률이 많은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일을 할 때 그런 면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저는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생각하기 이전에 해야 하는 일인가 아닌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이는 일이라고 하여도 그것이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이라고 판단이 되면 도전합니다. 시도합니다. 어차피 그 일을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우리 하나님은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열매 나눔 재단이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이 사역의 성공에 미리 흥분하고 있습니다. 들떠 있습니다. 그 성공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면 아무리 많은 대가를 지불한다고 하여도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힘들어도 좋습니다. 속 썩어도 좋습니다. 이 일을 하다가 죽어도 좋습니다. 생각처럼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속도 아마 썩을 만큼 썩어야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고난은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냥 편하게 양이나 치면서 자식이나 돌보면서 세상 걱정 없이 편하게 인생을 마치려고 하는 모세를 하나님은 떨기나무 아래에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모세처럼 부르고 계십니다. 너 혼자만 잘 먹고 편히 사는 삶 에서 나와 나라와 민족을 갈등과 불화에서 건져내고 통일을 준비하는 일에 헌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매 나눔 재단을 통하여 하려고 하는 일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가장 기가 막힌 일 중에 하나입니다. 나라를 살리는 일이고 민족을 살리는 일입니다. 특히 통일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성공되지 않으면 우리나라와 북한은 통일이 되어도 망하고 통일이 되지 않아도 망할 것입니다.

한번 왔다 가는 인생 밥이나 먹다가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마터면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그냥 편히 밥이나 먹다가 죽을 뻔 하였습니다. 그런 모세를 이끌어 내어 우리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와 민족을 구원케 하는 사역자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모세처럼 그냥 밥이나 먹다가 죽으려고 하는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그래도 한번 사람으로 태어나 예수까지 믿고 구원까지 얻었는데 그렇게 살다 죽지 말라고 부담스러워하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응답한 후에도 평생을 그 부르심에 순종하며 살았던 모세와 같은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순종에 축복하시어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케 하였던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순종에 축복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나라와 민족을 축복하고 통일을 준비케 하는 기가 막힌 삶을 축복으로 살게 하실 줄을 믿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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