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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뜻은? (신 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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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행복약 유감>
누에나방이 번데기에서 고치를 뚫고 나와 나비로 변하는 과정은 참 어렵습니다.
고치에 아주 작은, 바늘구멍 만한 틈이 있는데 그 틈으로 나방이
나오기 위해서는 꼬박 한 나절 동안이나 발버둥을 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좁은 구멍을 아주 힘들게 고생해서 나온 나방은 아주 멋진 나비가 되어서
날 수 있지만, 쉽게 구멍을 빠져 나온 나방은 얼마 날지 못하고 떨어져 죽습니다.
비좁은 구멍을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치다보니 날개 근육이 강해져서 산다는 것이지요.
사람이 아닌 동물의 세계에서도 고난이 생존에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요즈음 세상은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게
더 오래 살 수 있을 지에 대한 관심이 대단합니다.
그리하여 삼불(三不), 즉 불안, 불쾌, 불만을 제거할 수 있는 행복약이 있다고 선전합니다.
프로작(Prozac)이니 리탈린(Ritalin)이니 하는 항우울제를 만들어 내는가 하면, 
우리의 기억을 완전히 재편집해서 행복한 기억만 남기고 불쾌한 기억은 깨끗이
사라지게 할 수 있는 행복약을 개발하는 제약회사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고통과 슬픔이 없는 사회가 진짜
사람다운 세상일까 하는 문제를 깊이 성찰해봐야 할 것입니다.
물론 병적인 우울증은 반드시 치료되어야 하겠지만 사람인 이상 누구나 다
어느 정도의 우울증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감사한 일이 아닐까요?
우울한 느낌이 있기에 즐겁고 유쾌한 기분이 뭔지 알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슬픔과 두려움과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슬픔은 오히려 진정한 기쁨으로 나아가는 길목이 되며,
두려움은 진정한 평안으로 나아가는 대문이 될 수 있으며,
고통은 우리의 인격을 더욱 정금과같이 연단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반드시 광야의 길을 통과해야만 한다>
저는 오늘 고난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일까요?
왜 재미있고 즐겁고 행복한 일만 일어나게 하지 않으시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도 주실까요?
오늘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본문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본문은 모세가 요단 강 앞에서 가나안 땅 진입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치신 말씀이지요.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 있지 않으면 그토록 고대했던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그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으로서 지금의 광야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본문 7-9절 말씀을 보세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정말 대단한 땅이요, 축복의 땅, 낙원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좋은 땅에 들어가게 될 때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 생활 한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아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을
거치지 않고서도 곧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에 걸어 들어가는 거리가 직선 거리면 한 주 정도가
걸리고 이리저리 우회해서 들어간다고 해고 한 달 정도면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광야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닙니다!

우리도 무슨 일을 할 때 광야의 고생 없이 곧바로 만사형통 하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참 위험한 일이요,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달가워하시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뜻이 있어서 우리에게 광야 생활을 일부러 경험하게 만드십니다!

여러분, 광야가 어떤 곳입니까?
저는 아직까지 성지순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광야가 어떤 곳인지
직접 보지 못했지만, 사진으로는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습니다.
사진으로 본 광야는 한 마디로 사람 살 곳이 전혀 못되는 황무지요 사막이요 암반 지역입니다.
누런 색깔로 된 바윗돌과 모래,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키 작은 관목들만
간간이 보이는 참 척박하고 기가 탁 막히는 지역이 광야입니다.

광야가 어떤 곳인지 성경에 있는 말씀을 직접 보겠습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보세요.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여기 이 짧은 말씀을 보면, 광야가 어떤 곳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광야는 광대한 땅입니다.
넓고 황량해서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땅이 바로 광야입니다.
그 다음에 광야는 위험한 땅입니다.
사람이 살지 못하니 야생 동물들,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위험지역입니다!
게다가 광야는 물이 없는 사막지역입니다!
사람이 생활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것이 식수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와 같은 식수를 구할 수 없는 사막 황무지가 바로 광야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광야는 막막하고 황량하고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위험지역이며 물을 구하기
어려운 사막 지대였을 뿐 아니라 낮과 밤의 기온 차가 극심해서 사람 살기가 힘든 곳입니다.
낮에는 지독하게 뜨겁고 밤에는 엄청나게 추운 곳이 광야란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는
말씀은 낮에는 구름이 뜨거운 태양을 가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뜨겁지 않도록 도와주셨으며,
밤에는 뜨거운 불기둥으로 추위를 느끼지 않도록 지켜주셨다는 뜻이지요.
 
여러분, 이렇게 살기 어려운 광야를 농사지을 수 있는 가나안 땅과
비교 해 보면 이것은 그야말로 지옥과 천당의 차이입니다!
사람이 집을 짓고, 농작물을 기르고, 꽃이 피며, 물을 길어 먹을 수 있는 가나안 땅,
이 땅은 확실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생했던 광야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광야 생활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장장 40년 동안을 허락하셨습니다.
40이라는 숫자가 히브리인들에게는 완전 숫자요 충족 숫자이니 인간이
고생할 수 있는 최고치 까지 고생을 시켰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왜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허락하셨을까요?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은 얼마든지 광야 없이 가나한 땅에
직통하도록 하실 수 있었을 텐데 굳이 광야를 허락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요즈음 교인들 가정을 심방해 보면 꼭 광야생활 같이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언제 이 고통이 끝날지 기약도 없이 막막하게,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과 두려움 속에, 먹을 것 입을 것 생계 때문에 염려하시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이 광야생활 한 가운데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이 말씀을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 다함께 본문 2절 말씀을 읽어볼까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광야를 허락하신 큰 뜻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를 겸손케 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거치지 않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면 굉장히 교만해졌을 것입니다.
사실, 광야생활이라는 것이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한 준비와 훈련의 과정이 아닙니까?
광야라고 하는 것이 사방팔방 갑갑하고 막막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곳이 아닙니까?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면 엄청나게 교만해졌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다 자기 힘으로 된 것인 줄로 착각하고 엄청나게 마음이 높아졌겠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기 위하여 일부러 광야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오늘 고통스럽고 막막한 광야의 길을 걷고 계신 분들은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더욱 더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낮추기 위하여 광야를 허락하십니다!
고난이나 실패 없이 모든 일이 승승장구 잘 되는 사람들은 교만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자기 잘 나서 자기 능력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런 까닭에 본문 17-18절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여기에 보면, 사람들은 재물을 많이 얻을 때 이것이 다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된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재물도 사람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재물 얻을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됩니다! 

우리는 광야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더 귀하게 쓰시기 위하여 더욱 더 낮아지도록 하려는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우리를 시험하시려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자기 원하는 대로 척척 이루어질 때 하나님을 인정하고 잘 믿습니다.
그러나 기도한 것마다 좌절되고 또 원치 않은 고난이 찾아올 때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기 쉽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갖가지 기적을 체험하고서도
조금만 불편해지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았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생활은 모든 인간적인 기대와 소망이 끊어진 자리에서도
하나님만 신뢰하고 따를 수 있는지를 시험한 자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방의 희망이 다 끊어진 막막한 그 자리에서도 변함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주신 계명을 다 지키는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광야의 시련 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은 결국 가나안의 축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광야생활은 모든 인간적인 희망이 끊어진 그 자리에서도
끝까지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는 자리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광야의 시련이 찾아올 때마다, "아!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믿음을
테스트해보려고 하시는 과정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광야생활 한 가운데에도 믿음의 줄을 놓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청종하고 실천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마십시오!
광야의 시험을 잘 통과할 때 여러분의 믿음은 더욱 더 정금과같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본문 6절 말씀처럼 광야의 길을 걸어갈 때마다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키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며,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뜻이 하나 더 있습니다.

셋째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으로 살게 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본문 3절 말씀을 보세요.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돌이 변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유혹을 받으셨을 때 물리치신 아주 유명한 말씀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할 때 늘 먹을 것 입을 것 때문에
걱정했지만 하나님께서 다 책임져주셨습니다. 
너무나 신비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은 물론이고
그 조상들도 알지 못했던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4절을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엄청난 고생을 했지만 신기하게도
지난 40년 동안 몸에 걸친 옷이 해어진 일도 없고 발이 부르튼 일도 없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먹여주시고 입혀주셨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옷으로만 집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만 붙들고 살면 광야 한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우리의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것 정확하게 아시고 다 허락해주십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마 7장에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의를
붙들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은 저절로 해결된다는 말씀이지요!

여러분, "산 입에 거미줄 치랴?" 라는 속담도 있듯이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참 암담했던 시절이 다 있을 것입니다.
혹독한 광야생활 한 가운데 먹을 것 때문에 끼니를 걱정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참 신비하지 않습니까?
그 때는 곧 죽을 것 같았는데 지나놓고 보면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삽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것 명석한 두뇌 아름다운 외모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요.
아일랜드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Shaw)에게 한 아리따운 여배우가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당신의 명석한 두뇌와 저의 미모가 만나면 아주 뛰어난 아이가 나올 거예요."
그러자 쇼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못생긴 얼굴과 당신의 둔하고 빈 머리가 만나면 괴물이 나오겠네요."

그렇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어떤 일로 치달릴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혹독한 광야의 시련 한 가운데에서도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믿음의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강>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존 버년(John Bunyan)이 쓴 『천로역정』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두 순례자가 온갖 고생을 다한 끝에 천성 가까이까지 왔는데 앞에 큰 강이 놓여있었습니다.
다리도 없고 배도 없을 뿐 아니라 너무 깊고 길어서 헤엄을 처 건너기도 어려웠습니다.

이 때 두 천사가 나타나 강을 건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이 강은 그냥 걸어가면 되는데 강을 건너는 사람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깊어지기도 하고 또 얕아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드디어 두 사람이 그 강을 건너는데 한 사람은 처음부터 강물이 얕아서
강을 잘 건너갔는데 두 번째 사람은 강물 깊이 빠져 들어가 제대로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 순례자의 귀에
이사야 43: 2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그 순례자는 이 말씀을 기억하고 용기를 내어 다시 발을 내디뎠더니
이내 강물이 얕아져서 목적지인 천성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혹독한 광야의 길을 걷고 계신 분들은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좋으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언젠가
광야생활은 끝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지명하여 부르셨으며 여러분을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시기에 여러분이 어떤 시련을 만나도 함께 하시고 지켜주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다 뜻이 있어서 여러분에게 광야의 시련을 허락하고 계십니다.
광야의 길을 걸을 때마다 마음을 낮추어 더욱 겸손해지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을 테스트하는 이 시련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 함으로써 잘 통과하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삽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 광야의 길에서 다 승리하시고 영광스러운
가나안 땅에 들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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