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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은혜의 해: 빚 탕감 (신 15:1-6, 눅 4: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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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해방 제61주년 감사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1989년, 독일이 통일되었을 때, 독일 국민들은 ‘교회와 목회자’에게 감사했습니다. 이후 교회와 목회자는 두 개의 독일이 하나로 안정 정착해 나가도록 큰 힘을 썼습니다.

우리는 해방 이후 61년을 지내면서 여러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빨치산 활동 등으로 드러난 좌-우의 대립과, 동족상잔의 6.25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남한의 경제적 부흥을 성공적 케이스로 들기도 하지만, 이것은 한반도 전체로 놓고 볼 때 ‘기형’입니다. 통일이 되고나서 하나의 나라와 민족으로 통합되어가는 과정을 겪어보아야 제대로 평가가 가능한 ‘임시적이며 조건적 성공’에 불과합니다. “통일”을 말하지 않고 “남한만의 성공”을 말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빚 갚기”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빚을 지지 않는 방법을 설명했습니다. 수입을 늘리는 것이 중요하지만, 절약하여 지출을 줄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아울러, 베푸는 삶이 귀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투자’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보다 적극적인 차원이며, 보다 진보적인 단계의 말씀을 전합니다. “빚 갚아주기”입니다. 이것은 ‘개인적 차원’에서도 그렇고 ‘사회적 차원’에서도 반드시 짚어가야 할 중요한 사항입니다. 

부자가 되면 좋습니다. 그러나 혼자만 부자가 되면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남들도 같이 잘 살아야 합니다. 자기 집뿐 아니라 동네가 좋아야 합니다. 동네를 넘어서서 나라가 잘 살아야 합니다. 지구가 건강해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재미입니다.

돈 버는 목적이 빚 갚기 위한 것이면 좋겠습니다.

먼저 자기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 자매의 빚을 갚아 주어야 합니다.
성도는 서로의 빚을 갚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돈 버는 목적입니다.

빚에 시달려 본 사람은 빚의 무게를 압니다. 미국은 모르지만, 한국에서는 빚 독촉하는 “해결사”들이 폭력을 동원한다고 들었습니다.

내 어머니는 동네 구멍가게에도 빚을 졌습니다. 미국 오기 직전, 동네 골목마다 다니면서 모든 빚을 다 갚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울었습니다. 내가 그 울음을 기억합니다. 

오죽하면 “빚 갚아 주는 남자라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시집가겠다!”는 광고가 났을까요? 빚에 시달린 고통이 너무 커서 난 발상입니다.

빚을 갚아주는 일이야말로 진정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것보다 더 귀한 일이 또 있을까요?

“구제”는 귀한 덕목입니다. 마치 나무가 열매는 맺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사람이 자기의 것을 내어 구제하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쓰고 남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아니, 구제하기 위해 안 쓰고 안 입었습니다. 구제의 기쁨은 삶의 목적입니다. 

구제를 바로 이해하려면 “헌금”을 이해해야 합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구제는 형제-자매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1. 하나님 사랑과 2. 이웃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뗄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구제는 헌금과 같은 수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구제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주면 좋겠습니까?

그냥 어떤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고통을 겪고 있는 문제, 즉 빚을 갚아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할 의욕이 나게 해 줍니다. 빚에 시달리지 않으니까, ‘인간관계’도 원활합니다. 구제의 목표는 빚탕감입니다.

열왕기하 4:1-7의 말씀입니다.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 중에 어떤 여인이 엘리사를 찾아와 부르짖었습니다.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채주가 찾아와 나의 두 아이를 종으로 잡아가려고 합니다.” 엘리사가 말했습니다. “당신의 집에 무엇이 있습니까?” “기름이 한 병밖에 없습니다.” 엘리사가 말했습니다.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어 오십시오.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고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으시오.”

여인과 두 아들은 그릇을 있는 대로 빌어 왔습니다. 그리고 다 채웠습니다. 여인이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릇을 더 가져오너라.” “더 없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기름이 그쳤습니다.

엘리사가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으시오. 남은 것으로는 아들들과 함께 생활하시오.”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선지자가 ‘기적’을 베풀었다는 사실 외에, 하나님의 종으로서 선지자의 목회의 중요한 일부가 빚 갚아주는 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오신다면, 우리의 빚을 갚아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영적인 빚”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영-혼-육은 하나입니다. 이것은 서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가난한 형제에게 “가서 따숩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면서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면, 그 말이 바람과 같이 헛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      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      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      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3:14-16, 개역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 생각하면 “이걸 어떻게??” 하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계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한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우리를 세계 최고의 부자로 만들어 주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우리의 모든 부족한 장애물들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실 수 있습니다.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두 가지 원칙에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다.

      1.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2.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

이 두 가지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의 고통을 나누어 질 것입니다. 이웃이 당하는 가장 큰 고통 몇 가지 가운데 하나는 “빚으로부터의 고통”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 가운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란 누구입니까? 우리에게 빚 진 자입니다. “우리 죄”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빚입니다.

내게 빚 진 자를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의 빚을 탕감해 줍니다.
      주여, 나의 빚도 탕감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나뿐 아니라 내 아이들의 빚도 탕감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목사님. 내게 빚 진 자는 어떻게 해서든지 탕감해 주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빚 진 것은 내가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정답을 드립니다. 다른 사람에게 빚 진 것도 내게 진 빚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 중심으로 보면 다르지만, 빚지고 고생하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에게 빚을 졌든, 그는 빚을 지고 고생하는 사람입니다.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남의 빚 갚아주다가 망한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그런 사람을 본 일이 있다면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나는 어디든 가서 설교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케이스가 있는데도 “없다고” 하는 실수를 하면 안 됩니다.

남의 빚을 생각하고, 그것을 갚아주려고 애쓰는 사람은 크게 되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볼 줄 알고,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언젠가 7-11에서 물건을 살 때였습니다. 한 25센트쯤 모자랐습니다.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물건 하나를 밀어두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어떤 백인 할머니가 나섰습니다. 그리고 대신 갚아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얼굴을 보니 노인이었지만 얼굴이 빛났습니다. 어깨를 탁 폈고, 당당했습니다. 무엇보다 대단히 행복해 보였습니다.

여러분 중에 오늘 말씀에 은혜 받고, “목사님. 제가 앞으로 구제하며, 빚 갚아 주는 일에 모든 일을 다 하겠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하는 성도가 있다면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 이 성도가 준비가 되었습니다. 마음껏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누가복음 본문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함이라. 누가복음 4:18-19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가난한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의 해.” 이것은 “희년”입니다. 7*7=49년. 그래서 50년째 되는 해입니다. 아시아에서는 12*5=60이 중요한 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50입니다. 이 때는 모든 빚을 탕감해 주는 해입니다. 모든 노예들이 해방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50년만에 해방을 맞았습니다. 주전 587년부터 주전 538년까지 모두 49년 동안 바벨론의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587-538=49

이스라엘은 ‘죄’로 인하여 망했고, 포수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제 그 “복역”이 끝났습니다. 이제는 해방의 때입니다. 이제는 자유입니다.

자유할 조건을 다 채웠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수 생활 중에 충분히 회개했다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신 언약을 “기억”해 주심으로써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이것은 출애굽 때에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 주신 약속을 “기억”하신 것과 같습니다.

빚 탕감은 달리 표현하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함”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1. 포로 된 자를 자유케,
      2.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3.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7년째마다 빚을 면해 주었습니다. 7년째 되는 해는 “안식년”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말하면 모든 해가 안식년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읽으신 본문입니다. 이사야 61장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1. 세례요한

세례요한이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는데, 주님께서 주신 대답은 이랬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전해라!”

2. 가난한 자의 복음

누가복음 6:20-26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찐저, 이제 너희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장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했지만, 누가복음 6장에서는 “가난한 자”입니다. 누가복음은 물질적 가난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하나’가 아닙니다. 그러나 ‘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영-혼-육은 셋으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마태복음의 말씀은,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가난함을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에 복음입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누가복음의 말씀은,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물질적인 가난함을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에 복음입니다.

3. 부자 청년

마태 19:16-30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들이니라.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온전함. 영 뿐 아니라 육신도 돌보아야(care) 합니다.

이러므로, 영적으로 가난하여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적인 가난으로 괴로워하는 심령들을 도와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심하시는 것은 영뿐이 아닙니다. 혼과 육신의 고통까지도 헤아려 보시고 아십니다. 모두 치유하십니다. 전인적인 강건함을 허락하십니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 이것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가난한 사람들,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은, 정말 귀한 일입니다.

4. 구제의 방법

현재 직업에 충실함

거짓을 사용하지 않고, 정직하게.
값 싸고 좋은 음식을 제공.
저렴한 가격에 좋은 물건을 제공.
봉사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마음으로 비즈니스 경영.

이렇게 돈을 벌기는 참 어렵습니다.
이렇게 돈 번 사람은, 그 돈을 가지고 ‘이기적인 방법’으로 쓸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지를 않습니다.

돈에도 ‘가치’가 있는 법입니다. 정직하게 번 돈을 가지고 ‘술’ 먹거나 못된 짓 하는 데 쓸 수가 없습니다. 귀한 일에 쓸 수밖에 없습니다. 1. 하나님과, 2. 이웃을 위해 쓸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물을지 모릅니다. 빚을 진다는 것은 나쁜 일인데, 그걸 ‘왜’ 도와줘야 합니까? 나는 안 먹고 안 입어서 돈을 모았습니다.

이제 묻습니다. 어떻게 빚을 졌습니까?

1. 스스로의 문제 때문에 빚을 집니다.
게으르거나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확실히 이런 때 ‘가난’은 ‘부끄러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도와야 할 대상에서 뺄 수 없습니다.
왜냐구요?
우리 모두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직한 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떳떳한 죄인’이 아닙니다.
세상에 그런 죄인은 아무데고 없습니다.

2. 사회-정치적인 구조의 희생자들입니다.
농촌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돈을 벌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소규모로 어업활동 하는 사람들도 배 한 척 장만하기 어렵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중류 이상으로 올라가는 것은 여러 “제약”을 받습니다.
은행 대출이나 여러 ‘특혜’ 등에 있어서 차별이 존재합니다.

누가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첫 번째 경우는 빚 갚아주기가 억울합니다. 나는 안 먹고 안 입고 절약해서 이렇게 돈을 모았습니다. 그걸 펑펑 놀고 먹은 사람에게 주어야 하겠습니까? 미안하지만 안 되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원칙’을 말씀드립니다. 성도들의 원칙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났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빚을 갚아 주실 때 “어떻게 빚을 졌느냐?” 물으실까요?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때, “제대로 지은 죄 같으면 용서하겠다. 만일 터무니 없는 죄 같으면 절대로 안 된다.” 그러실까요? 그렇다면 누가 주님 앞에서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빚을 갚아줄 때는 이상의 모든 경우를 다 헤아리지 않습니다. “무조건” 갚아줍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보시고 갚아주실 것입니다.

안식년은 제7년입니다. 이 때 “모든 빚을 탕감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소망입니다.

희년은 제50년입니다. 이때 모든 빚을 다 탕감받습니다.
주님의 은혜의 해. 이것은 빚 탕감의 때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선포해야 합니다.

여기 참석한 홍성혁 목사님은 GTU 석사 논문으로 오늘 신명기 본문을 주석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된 것은, 서로 빚 갚아 주는 은혜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 아니고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금문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교회 성도들은 ‘빚 갚아주기’를 목적 삼고 경제활동 하기를 바랍니다. 좋은 소문이 나기를 바랍니다.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사람들 빚 갚아주는 운동이 일어난다면, 아 이 세상은 정말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가 되겠습니까?

“집사님. 지갑 한 번 봅시다. 카드 하나 주세요.” 이거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생각만 해도 온 몸이 짜릿한 전율이 생겨나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생각이나마 하면서 살아가는 금문인들이 여기저기서 존재한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일이 아닙니까?

나는 금문교회 모든 성도들이 언제라도 가난한 성도들의 카드 하나쯤은 갚아줄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1. 그런 마음이 생겨나기를 바랍니다. 2. 그런 재력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경제활동을 위해 기도할 때 이렇게 해 보십시오.

1. 하나님. 저를 마음껏 축복해 주십시오.
2. 저는 형제들의 빚을 갚아주는 목적이 있습니다. 저들을 그 빚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우려고 합니다. 주여, 저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3. 빚을 갚아줄 때 내 이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높이게 하옵소서.

분명히 선언합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는 성도는 크게 부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성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담임목사로서 나는 성도가 이런 기도를 하고 있다면, 날마다 이렇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이 성도는 남들 빚 갚아주는 목적을 세웠습니다. 주여, 이 성도의 사업을 번창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세상을 떠날 때, 유언을 합니다. 여러분이 재산을 주님을 위해 다 쓰고도 남는 것이 있다면, 그걸 자식에게 ‘무조건’ 넘기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식에게는 “공부”를 시켜 주고, “세상 살아가는 방법”을 전수하면 그뿐입니다. 자식이 ‘재물을 모아가는’ 재미와 그런 과정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십시오. 재물을 하나하나 모아가는 중에 주님께 기도드리는 기쁨, 땀흘려 일하는 보람, 그 땀흘린 돈으로 형제의 빚을 갚아주는 감격, 이런 것을 누릴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한 재산을 모으게 되거든, 그 재산으로 마음껏 형제들의 빚을 갚아주십시오. 그러고도 남아 이 세상을 떠나게 되거든, ‘유언’을 통해 ‘이 남은 재산을 효과적으로 남들의 빚 갚아 주는 일에 쓰라!’고 말씀하십시오.

자식들이 부모가 남긴 재산상속 때문에 서로 물고 싸워, 회복할 수 없는 ‘원수지간’이 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유일한 길은, 유산을 상속하지 말고 빚 갚는 일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금문교회는 ‘빚 갚은 사역’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이 올해 2006년도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올해로 마칠 사역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한, 또한 우리 자녀세대들이 계속 이 세상에 살아가는 한, 우리는 대를 이어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할 것입니다.

해방 61주년입니다.
해방을 주신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회개하면서, 우리는 이제 통일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통일이 되었을 때 독일 국민들처럼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게 해야 하겠습니다.

통일에 가장 큰 걸림돌은 “북한의 빚” 문제입니다. 북한은 가난한 나라입니다. 빚 덩어리입니다. 북한의 인구를 2,300만으로 봅니다. 그 중에 1,000만은 완전히 대책이 없는 국민입니다. 북한을 정기적으로 드나들며 구호품을 전달하는 목사님께 들었습니다. 1,000만명은 극도의 기아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통일이 되면 그들을 먹여 살려야 합니다. 지금부터 ‘빚 갚기’ 훈련을 하지 않고는 통일을 대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는 쉽지만, 통일을 실현하는 것은 엄청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냥 정치적인 구호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기도하면서 ‘빚’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통일이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준비가 없다면 통일은 ‘재앙’일 것입니다. 이제 기도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다 마련해 주신 하나님. 귀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이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드립니다. (김문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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