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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갇힌 자, 학대받는 자(I) (히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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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속담에 '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혈육 관계이고 각별한 친분이 있는 사이라 할지라도, 직접 만나보는 일이 적어지면 절로 서로 잊고 살 수밖에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 까닭에, 비록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결코 마음마저 멀어지지 않아야 할 사람들은, 우리가 부지런히 전화도 하고 편지도 쓰고 또 그 사람이 사는 동네나 국가로 여행할 기회가 생기면 꼭 얼굴이라도 잠시 보려고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서로 나누는 우리 기독신자들의 교제에도 그처럼 공간적인 거리가 멀면 멀수록 마음도 멀어지기 쉬운 관계들이 있음을 바로 오늘 본문이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1절에 나오는 "형제"는 물론 같은 하나님의 자녀 된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이 새 계명은 누구보다도 먼저 주 안에서 한 성도, 한 교인 된 자들 간의 사랑을 명령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영적 형제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말씀은 그래도 기본이 되어 있는 기독신자라면 다 기억은 할 것이고 대부분이 다 노력도 하고 있을 것입니다.

  2절에 나오는 사랑의 대상은 그 1절의 "형제"보다는 우리가 간과하고 넘어가기 쉬운 대상입니다.
  "손님"이라는 단어는 원어로는 '초청한 사람'(guest)이 아니라 '나그네'(stranger) 즉 길가는 행인으로서 아무 안면도 없던 사람을 가리킵니다.
  물론 이 '손님'이라는 말에는 그 당시 초대교회를 순방하던 복음 전도자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기독신자의 형제사랑은 거기에 제한되지 아니하고 전혀 알지 못하는 이웃에게까지도 그 대상이 넓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를 들고 있는 아브라함이나 롯 같은 사람들도 "부지중에" 즉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던 지나가는 객을 환대하던 가운데 뜻밖에도 천사를 대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3절에 보면 우리 기독교인들의 형제사랑의 세 번째 대상이 나오는데, 바로 "갇힌 자"와 "학대 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복음 때문에 실제로 투옥되거나 핍박을 당하고 있는 성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사람들이야말로 위에서 나왔던 두 부류의 형제들, 즉 교회 안의 교우들이나 지나가는 손님들보다도 훨씬 더 마음을 쏟고 사랑을 베풀어야 할 대상입니다.
  하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바로 이런 형제들이 잊히기 쉬운 것입니다.
  처음에 투옥되었을 때, 처음에 박해를 당할 때에는 열심히 기도하고 도우려고 애를 쓰다가도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면 그만 잊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자들은 자기 곁에 가까이 있어서 자주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형제들은 주일마다 만나니까 자연히 사랑하게 되고, 손님들은 내 집으로 찾아왔으니까 당연히 대접할 마음이 생길 수 있지만, 감옥에 갇힌 성도나 내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환난을 당하는 성도의 형편은 내가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지 못하는 것인 까닭에 조금만 시간이 흐르고 방심에 빠지면 아주 간단하게 잊어버리고 말게 됩니다.
  가장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형제, 그 어떤 형편에 있는 형제들보다 최고의 사랑을 같은 성도로써 마땅히 베풀어 주어야 할 형제들을, 우리는 그런 식을 무심하게 잊어버리기가 십상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그처럼 '갇힌 자와 학대 받는 자들을 생각하라' 즉 '기억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금주 화요일에 '8.15 해방' 제61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비록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 해방의 결과로 자주독립을 지금까지 누리고 있지만, 북한의 동포들은 그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제보다 훨씬 더 무서운 독재와 압제에 사로잡히는 몸이 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런 북한 동포들을 생각하지 않고서 8.15 해방의 날을 보낸다는 것은 너무나 몰염치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주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이런 때에 더욱 깊이 상기해내고 또 남북통일의 그날이 올 때까지 항상 잊지 말고 생각해야 할 우리의 형제들에 대하여 오늘과 다음 주일에 걸쳐서 두 대지로 나누어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북한 공산 독재에 의하여 자유와 생존권을 박탈당하고 '갇혀 있는' 북한 동포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3상반절에 "자기도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히브리서는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인들에 대한 탄압이 이미 시작된 시대에 씌어졌습니다.
  로마제국의 기독교에 대한 초기의 정책은 좀 이상한 것으로서, 그저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무조건 체포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에, 어떤 기독교인이 무슨 이유에서든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고발을 당해서 재판정에 서게 되면 그로 하여금 로마 황제 흉상 앞에 절하고 분향하게 한다든지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기독교인 피고가 그것을 거부하면 국가에 대한 반역자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기독교인들은 이웃으로부터 고발당하지만 않으면 괜찮았고, 만약 무슨 사소한 문제 때문이든지 간에 고발을 당하게 되면 그 법정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하든지 아니면 배교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할 처지였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었던 까닭에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 중에는 같은 동네에 살고 같은 교회를 다녀도 그 중에서 옥에 갇힌 자들도 있었고 화를 면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경우에 갇히지 않는 성도들은 "자기도 갇힌 것 같이" 즉 자기가 그런 처지가 된 것처럼 그 갇힌 성도들을 생각해주어야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갇힌 성도들에게 있어서 도움을 기대할 희망은 갇히지 않은 성도들뿐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당시의 감옥생활은 면회 오는 사람들이 식량과 의복을 위시하여 때로는 약까지 제공해주어야 했고, 그런 도움이 없으면 옥에서 굶어죽거나 병사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투옥의 기간이 길어지면 같은 성도들끼리도 점점 더 면회 오는 것이 뜸해지고 잊혀져갔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그런 일을 뼈저리게 경험했던 까닭에 디모데후서 4장 16상반절에서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라고 가슴 아픈 간증을 한 것입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라는 말은 바울이 제1차 투옥되었을 때를 가리킬 수도 있고 혹은 로마에서 두 번째 투옥된 직후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마는, 어느 쪽이든지 간에 요점은 바울의 투옥 초기에는 그를 기억해주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하나 그를 잊기 시작하더니 이제 그 디모데후서를 쓸 당시에는 그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떠나버렸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비록 신자라 하더라도, 자기를 찾아오는 손님은 대접할 줄 알아도, 갇혀 있는 형제들은 보지 못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잊어버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지금 북한의 동포들이 공산독재정권에 의하여 모든 자유를 박탈당하고 '갇힌 자'들이 된지 어언 반세기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56년의 세월은 이 대한민국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이천만 명의 동포들이 도대체 어떤 끔찍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를 까마득히 잊게 만들고 있습니다.
  북한 동포들의 실정을 몰라도 너무도 몰라주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큰 실망을 느끼면서 차라리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싶어 하는 탈북자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남한 사람들은 자유에 흠뻑 취해서 정신을 잃은 것 같다."고 합니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태어나서 마음껏 자유롭게 말하고 마음껏 자유롭게 행동하는 데에만 익숙하다보니, 그런 자유가 없는 북한이라는 곳이 도대체 어떤 사회인지를 아무리 말해주어도 알아듣지도, 믿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대한민국의 어느 교과 과정에서도 가르쳐주지 않고 있는 사실, 하지만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 게다가 북한에서 도저히 살 길이 없어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해온 수많은 탈북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증거하는 사실, 그리고 국제적인 조사기관들이 확인하는 엄연한 사실을 제가 다시 한 번 말씀해드립니다.
  8.15 해방 직후에 당시 공산제국주의를 꿈꾸던 소련은 김일성을 내세워서 북한에 공산주의 정부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북한은 김일성과 김정일로 이어지는 세습독재정권 하에서 모든 인민들로부터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비롯하여 종교 및 거주이전의 자유 등, 사람이 마땅히 누려할 모든 기본적인 자유들을 다 빼앗아버렸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북한 사람들과 편지 한 통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없고, 평양을 제외한 북한의 다른 지역에 대한 사진 한 장 제대로 뉴스 미디어에서 찾을 수 없고, 금강산 관광을 가도 북한 사람들이 혼자서나 친구끼리나 가족과 함께 여행 오는 경우는 한 사람도 발견할 수 없는 것만 보아도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처럼 육체적인 자유는 두말할 것도 없고 '김일성과 김정일의 우상화'를 통하여 사람의 생각하는 자유마저 완전히 박탈해버렸습니다.
  이것은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로서는 더욱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사람이 자기 머릿속으로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까지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라는 반문이 당연히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것이야말로 '자유에 너무 취해서 자유 없는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는' 생각입니다.
  우리 기독신자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주 '수령님의 은덕'을 수시로 찬양하고, 우리들이 성경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열심히 '정치학습'을 밤낮으로 받기를 50년 넘도록 하고나면, 그런 사람의 머릿속에는 '자유로운 생각'이라는 것이 남아 있을 여지가 전무하게 됩니다.
  그래서 탈북자 교육을 하는 공무원들은 '탈북자들의 생각이 너무 굳어져 있는 바람에' 자유민주사회에서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무척 어렵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처럼 개인의 자유가 완전히 박탈당한 사회인 까닭에 북한은 개인의 생존권마저 철저하게 유린당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북한 인민에게는 자기가 노력해서 사유재산을 늘인다는 것은 곧 국가에 대한 반역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 같이 일하고 꼭 같이 나누어먹자'는 것이 공산주의의 철칙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그런 공산주의 사회를 표현하기를 "(1) 아무도 일하지 않는다. (2) 아무도 일하지 않지만 모두가 월급을 받는다. (3) 모두가 월급을 받지만 아무 것도 그 돈으로 살 수 없다. (4) 아무 것도 살 수 없지만 인민들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5) 인민들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지만 아무도 만족하는 사람이 없다. (6) 아무도 만족하는 사람이 없지만, 선거만 하면 모두가 공산당에게 100퍼센트의 찬성표를 던진다."라고 했습니다.
  구구절절 공산주의 사회의 허구성을 예리하고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말입니다.

  아무리 농부가 열심히 일해도 쌀 한 톨도 자기에게 직접 돌아오지 아니하고, 아무리 어부가 많은 고기를 잡아도 단 한 마리도 자기 집에 가져올 수 없으니, 누가 열심히 일할 마음이 들겠습니까?
  자연히 생산성은 최악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고, 그런 까닭에 북한에서는 정치범 수용소에서 죄수들이 경작하는 밭의 수확량이 일반 인민들의 협동농장에서의 수확량보다 몇 배나 더 높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북한 전체의 총생산량(GNP)은 우리나라 제주도의 총생산량보다도 못합니다.
  하지만 그나마 김정일의 호의호식과 김일성 시체 유지비에 엄청난 액수를 다 쏟아 붓고 있으니 인민들에게 돌아올 것이 무엇이 남겠습니까?

  각종 조사단체들이 최근 북한에서는 아무리 최소한으로 잡아도 300만 명 이상이 굶주림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세계식량농업기구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2년에 북한 인구의 절반이 넘는 1,300만 명이 영양실조 상태에 있었으며, 특히 그 중에서 수백만 명의 어린이들이 만성적인 영양실조로 인하여 심신의 성장에 심각한 장애를 입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북한 정부는 대한민국을 위시하여 세계 각국에서 지원하는 식량을 군수품으로 빼돌리기에 바쁘고, 그 식량분배가 제대로 인민에게 돌아가는지를 직접 감독하려는 구호기관의 요원들은 아예 추방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미사일을 발사해 놓고서는 "김정일 위원장의 선군정책으로 남한이 득을 보았으니 쌀 50만 톤을 내놓아라."라고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생떼를 쓰는가 하면, 얼마 전 한나라당에서 북한 수해 피해 발표한 것에 대해서는 악질적인 거짓선전이라고 욕을 해대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서 '이번 수해로 인하여 4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고 북한 언론 사상 처음으로 피해를 공식 발표함으로써 구호금을 받아먹으려는 속셈을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북한 공산독재정권은 자국의 이천 만의 생명을 인질로 삼고 국제사회를 협박하는 깡패 짓을 하고 있는, 실로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집단인 것입니다.

  아직도 이런 말이 과장이고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왜 탈북자가 줄을 잇고 북한의 '식량난민'이 떼거리로 두만강을 넘나드는지 제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중국에 있는 탈북자는 최소한 5만 명, 많으면 30만까지 될 것이라고 추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탈남자'라는 말이 있습니까?
  아니 이 대한민국에서 그토록 친북활동에 열을 내는 사람들 중에서 제발 북한에 가서 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 단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왜 그렇겠습니까?
  북한이 못 살아도 너무너무 못 사는 것, 아니 못 산다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 비참하게 사는 것은 친공분자들까지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탈북자가 자기가 남한이 잘 산다는 것을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는지를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그 사람도 물론 북한정부가 선전하는 대로 남한이 자기네보다 훨씬 더 못 산다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바닷가에서 남한 쪽에서 떠내려 온 라면 봉지를 하나 줍게 되었습니다.
  그 봉지도 예뻤지만, 그 봉지에 씌어있는 글귀 하나가 그 사람을 놀라게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기호에 따라 계란이나 파 등을 곁들여 드셔도 좋습니다.'라는 문구였습니다.
  '라면에 달걀을 넣어서 먹고 싶으면 넣어서 먹고 먹기 싫으면 안 넣으면 된다.'라는 말은 우리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그 북한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북한에서는 달걀이 있어도 먹기 싫어서 먹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라면 봉지의 글귀 하나 때문에 그 탈북자는 '남한에서는 달걀을 구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잘 사는구나.'하고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인민들을 압제하면서도 또 제대로 먹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는데 도대체 그런 나라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북한 인민들이 너무 순진해서 조금도 불평할 줄을 몰라서, 혹은 그들이 아침저녁으로 앵무새처럼 외는 대로 정말 '수령님의 은덕에 감사'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겠습니까?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그런 북한이 한 국가로 유지되고 그런 정권이 50년 넘도록 장기독재집권할 수 있는 길은 단 한 가지, 극단적인 공포정치, 이것밖에 없습니다.
  인민 하나하나를 감시하는 자, 그렇게 감시하는 자를 또 감시하는 자, 바로 그 감시자를 또 한 단계 위에서 감시하는 자 - 이것이 북한의 정치체계의 전부입니다.
  그러니 북한에서는 무슨 반동분자다 싶으면 자기 부모라 할지라도 서슴지 않고 고발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정말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김정일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감시 체계와 조직을 통하여 체포된 사람은 아무 제대로 된 재판조차 받지 못하고 그저 구금, 고문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요 공개처형이나 비밀살해되기 일쑤입니다.
  특히 요덕정치범 수용소에는 약 3만 5천 명에서 최대 5만 명까지의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는데, 그 끔찍한 실상은 정말이지 어떻게 말로 옮겨놓을 길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북한의 비참한 실상을 말하면, '그것은 미국이 북한을 제재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좀 말이 되는 말을 가지고 말을 해야지요.
  아니 그런 사람들의 주장에 따른다면 '미국의 노예가 되었다'는 대한민국도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어떻게 '미국의 제재 좀 받았다'는 북한은 그 때문에 그렇게 지지리도 못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북한의 경제 실패는 바로 '자기가 일한 만큼 먹게 된다.'는 자본주의의 원칙을 반대한 데서부터 필연적인 기정사실로 되어졌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지금 북한을 돕고자 하는 세계의 모든 경제전문가들이 '아무리 온 세계가 북한을 원조해주어도 북한 자체 내의 경제 개혁과 개방 없이는 이 비극을 끝낼 길이 없다.'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주 간단히 말해서 지금 협동농장으로 되어 있는 모든 땅들을 북한의 각 인민들에게 사유경작지로 나누어주기만 하면 적어도 식량자급의 문제는 당장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반공을 주제로 하는 이런 설교를 하면 "한물 간 반공주의가 서울의 모 교회에서 되살아났다."라고 비난하는 글이 인터넷 언론에 뜹니다.
  정말이지 공산주의야말로 한물가도 한참 간 것 아닙니까?
  전 세계의 모든 공산국가들이 소련을 비롯하여 다 실패했고, 중국만 정치는 공산주의지만 경제는 자본주의를 도입함으로써 명맥을 유지했으며, 북한은 지금 최악의 공산주의 국가로 그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기 일보직전입니다.
  도대체 어느 쪽이 진짜로 한물간 사상이라는 말입니까?
  저의 그런 설교가 방송으로 나가게 되는 밤이면 교회 전화기에 불이 나고 숙직하는 교역자들이 잠을 못 자게 됩니다.
  시원한 설교를 들었다고 감사하는 분들이 다수이지만 온갖 항의와 욕설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이 대한민국 안에 진짜 공산주의자들이 정말 많이 득실거리고 있구나.'하는 생각에 더욱 목소리를 높여 외치게 됩니다.

  하지만 소위 기독교인이라 하면서도 '반공은 목사가 할 수 없는 소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제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 논리와 사상을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반공하면 안 된다는 것은 바로 친공하자는 이야기인데, 도대체 그 저의가 무엇입니까?
  지금 북한 공산정권의 노예가 되어 있는 2천만 동포들을 그대로 버려두고 그저 김정일하고만 친구로 지내자는 뜻입니까?
  아니면 우리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까지도 다 포기하고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우리 식으로 살자'고, 남북이 같이 김정일을 통일 대통령으로 받들고 '주체적 민족'을 만들자는 것입니까?

  우리, 제발 "자기도 갇힌 것 같이" 이 북한 동포들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지금 이천만 명의 우리 형제들이 24시간 내내 자기 손발 하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마음대로 말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일자리 구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이사나 여행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데, 그 기분이 과연 어떠할지 한번 좀 상상해보십시오.
  그처럼 몸과 마음까지 묶여 있는 판에 강냉이 죽 한 그릇도 제대로 못 먹고 문자 그대로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으면서 연명하는 그들의 뱃속이 어떤 느낌일지 한번 좀 상상해보십시오.
  아니 어린 자식들이 굶어 죽어가는 꼴을 자기 눈앞에서 보아야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심정이란 것이 과연 자기만이라도 조금 더 오래 살아남고 싶을지 한번 여러분의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북한 인권법안 제정을 주도한 수잔 솔티 여사가 대한민국을 향하여 "왜 한국인들은 이 악독한 인간(김정일)과의 거짓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 침묵을 지키겠다는 것입니까?"라고, 북한 인권문제에 대하여 외면하고 대북 인권 결의안에 기권이나 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정책을 각성하라는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제가 그 편지의 일부만 소개해드립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한국인들에게 드립니다.(중략) 요즈음 우리는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너무 걱정되어 이 편지를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신들과 우리는 오랜 세월 한 배를 타고 운명을 같이 해왔는데, 요즈음 여러분들이 택한 항로의 앞날을 보면서 우리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중략) 이 세상에는, 여러분들이나 우리가 믿고 있는 모든 것을 어떻게든 파괴하려는 악의 세력이 도처에 준동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믿는 자유와 관용, 진실과 정직을 앗아가려는 것입니다. 이들은, 여러분들을 지금까지 이처럼 튼튼하고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게 한, 바로 그 자유를 파괴하려는 세력들입니다.(중략) 우리는 당신들이 당신들의 새 친구라고 사귀는 자 때문에 얼마나 여러분들이 걱정되는지, 당신들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그토록 비위를 맞추려고 공을 들이는 이 자(김정일)는 참으로 끔찍한 악몽입니다. 한 마디로, 그 자는 악마입니다. 당신들에게 이런 끔찍한 표현을 해서 안됐지만, 이것은 사실이고 여러분들은 이 사실을 직시해야만 합니다.(중략) 당신들은 이 악독한 인간과의 우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침묵을 지키겠다고 했습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을 파괴하려는 이 인간, 우리들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이 인간과의 우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는 당신들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 자는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전부 빼앗고, 당신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무릎을 꿇도록 강요할 것입니다. 눈을 좀 뜨고 보세요. 당신들이 우리들의 말을 듣지 않겠다면, 이곳 형제자매들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최소한 그 자에게 이것만은 따져야 할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의 (북쪽)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여러분들이 살던 마을의 이웃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가를 따져 물어야 할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을 살리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세요.(중략) 최소한 8만 6천 명이란 사람들의 생사를 모릅니다. 그 자는 이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자에게 행방불명된 이 사람들에 관하여 물어보세요. 그 자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들을 어떻게 했는지 물어보세요. 여러분들에게는, 최소한 그 자로 인하여 고난을 겪은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질러 따져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중략)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미국의 형제자매들로부터. 2004년 7월 6일, 디펜스 포럼 파운데이션 대표, 수잔 숄티 드림."

  저는 이 편지를 보고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사실상 이런 편지는 우리들이 써서 온 세계를 향하여 보내어야 할 것인데, 어쩌다가 이것이 거꾸로 되었습니까?
  온 세계의 양식 있는, 아니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김정일 공산독재의 악함을 어떻게 대한민국이 모른 채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어떻게 2천만 명의 형제를 한 피로 나누고 있는 대한민국 사람이 이 불쌍한 진짜 내 민족은 조금도 안중에 두지 않고, 오히려 민족공조라는 미명으로 독재자와 친구가 되면서 그와 함께 세계적인 왕따가 되려 하고 있는 것입니까?
  더욱이 같은 동족 중에서 '간힘을 면한 자'가 '갇힌 자'를 '생각해주지' 않는다면 이것이말로 진짜 매국노이며 반민족적인 범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제의 압제로부터 자유하는 8.15해방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또 하나의 해방일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공산 독재에 의하여 자유와 생존권을 박탈당하고 갇혀 있는 북한 동포들을 생각하면서, 이 이천만의 내 형제들이 해방되는 그 날을 하루라도 빨리 이 조국이 맞이할 수 있도록 늘 기억하며 기도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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