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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쉼으로의 초대 (마 11: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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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국의 한 상인이 리차드 샤프트경에게 당나귀에게도 안식일을 주어야 한다는 탄원서를 올렸다. 이것이 이슈가 되어서 영국 성공회에서 재판이 벌어졌는데, 이 상인은 당나귀에게 안식일을 주어야 할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당나귀는 보통 하루에 짐을 싣고 30마일 정도를 가는데 쉬는 날 없이 매일 일을 시키니까 한 달 후에는 하루에 15마일 밖에 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1주일에 하루씩 쉬면서 일을 시키니까 한 달 후에도 역시 30마일씩 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의 능률을 위해서도 당나귀에게 안식일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당나귀에게도 안식일이 필요하다면 인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당연히 휴식이 필요하다. 요즘 휴가철이 되어 더위를 피해 산으로 바다로 나가 보지만 신통치가 않다. 오히려 갔다 오면 피로와 스트레스만 더 쌓인다는 말을 듣는다.

오래 전에 우리 가족이 여름 휴가를 이용해서 사람이 없는 곳을 향하여 차를 몰고 찾아 들어 갔다. 강원도 영월을 거쳐, 정선으로 해서, 태백산맥 등줄기를 타고 차가 다니기에도 상당히 불편한 계곡을 찾아 들어 갔는데 거기에도 사람들이 텐트를 치고 있었다. 그래서 좀 더 깊은 곳은 찾아 들어 갔는데 그곳에도 역시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 없는 곳을 찾아 쉴려고 다니다가 결국 포기했다. 나 같은 사람들이 참 많구나. 마땅히 쉴만한 곳 찾기가 쉽지 않았다.

오늘은 여러분들을 지상 최고의 쉼터로 안내하고자 한다. 휴가를 다녀왔는데 스트레스를 받은 분들이나 아니면 아직 가지 못한 분들에게도 큰 유익이 될 것이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 말씀을 잘 듣고 은혜를 받으면 휴가를 갔든 안갔든 어느 곳에 머므르게 되든 여러분들은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충분한 쉼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익숙한 내용이다. 그러나 그 본문에 익숙한 만큼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쉼을 누리고 있는가? 만약 누리고 있지 못하다면 아직도 여러분의 영혼은 쉼터를 찾기 위하여 방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의 몸은 정신이 지배하고 있다. 몸이 피곤해서 쉬면 육체의 피로를 풀 수가 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육신은 편해도 온 몸에 피로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동해안의 최고급 호텔에서 휴가를 보낸다고 해서 걱정 근심이 떨어져 나가는 것은 아니다. 걱정 근심을 안고 살아가는 인생들에게는 참된 쉼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영혼이 만족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요삼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참된 만족과 쉼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순서가 뒤바껴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살기 때문이다. 영혼이 잘되야 범사도 잘되고 강건케 되는 줄로 믿는다.

오늘 본문은 3 단락으로 나뉘어져 있다. 오늘 말씀을 집중해서 잘 들어야 한다.

1)예수님의 기도(25-26)
2)예수님의 자기 선언(27)
3)예수님의 초청(28-30)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내용은 28-30절의 예수님의 초청에 관한 부분이다. 그 부분 만으로도 우리는 큰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을 잘 살펴보면 25-30절의 말씀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예수님의 초청에 관한 부분만 떼어서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신 위대한 초청의 진수를 많이 놓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위대한 초청 이전의 본문을 살펴보는 작업이 먼저 필요하다.

1.예수님의 기도(25-26)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11:25-26)

본문 25절에서 “이것”은 “복음의 진리, 예수님의 교훈”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구원을 얻게 하는 복음의 진리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감춰지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들려지게 된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계신 것이다.

그렇다면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누구이며, 어린 아이들은 누구를 가르키는가?

본문의 배경으로 볼 때 그들은 직접적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유대교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훈을 귀담아 듣지 않았고 거부했다.

거부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보내신 자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을 통해서 선포되는 구원의 메시지를 신뢰하기 보다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의 의를 더 우월하고 소중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고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아니 불가능한 것이다. 그들은 율법을 효과적을 잘 지키기 위해 계명을 613가지로 세분해 놓았다. 반드시 해야 만 하는 사항 248개, 해서는 안되는 사항 365개, 합이 613개의 율법 조항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짐을 더욱 무겁고 힘들게 하는 것이었다.

고대의 유대교 교리 중에는 이런 것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죄와 선행을 세고 계시는데, 죄의 숫자가 선행의 숫자보다 많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대교인들은 죄보다 선행의 숫자를 더 늘리기 위해 끊임없이 죄를 안지으려고 노력했고 선을 행하려고 애를 써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규정은 그들을 더욱 더 피곤하고 고통스럽게 하였고 외식하는 자, 위선자로 만들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체, 의로운 체, 평안한 체 했으나 사실은 행복하지 않았다.

예)김세배선교사의 부친상 - 밤 12시가 훨씬 넘어서 충주에 도착. 충청도 전통 장례 방식.

그것을 허례허식이라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자칭 슬기로운 자, 지혜로운 자로 표현하셨다. 그들은 자신들이 고수하고 있는 율법의 전통과 준수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고집을 부렸기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고, 그분이 선포한 복음의 진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면 어린아이는 누구인가?

어원적 의미는 “말을 할 줄 모르는”이다. 이것은 어려서 스스로는 이해할 수 없어서 다른 사람의 도움과 교훈에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깨달을 수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순진해서 무엇이든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는 상태를 가르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마18: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천국과 어린이는 대단히 가까운 관계이다. 오늘 본문에서 “어린 아이에게 나타내셨다”라는 말은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하고 열린 마음으로 진리의 말씀을 받아 들이려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셨다는 것이다.

반면에 지옥과 교만은 사촌관계와 같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옳다고 고집부리는 사람,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리는 숨겨지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교만한 자에게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도리어 겸손히 자신을 부인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빛이 비쳐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시지만 교만한 자는 물리치신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는 참된 쉼을 얻을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인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이다.

2.예수님의 자기 선언(27)

우리가 두 번째 살펴보아야 할 부분은 27절의 말씀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에 대하여 선포하셨다.

마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7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관계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는데,

1)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

어떤 관계임을 선포하셨는가? 물론 부자의 관계임과 더불어 아버지의 모든 것을 위임하신 것과 아버지 만이 아들에 대하여 아심에 대한 선포였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한 성품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인간의 지혜나 능력으로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의 이성은 이미 죄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알 수가 없다.

예)렌즈에 때가 묻어 있는 상태에서 사물은 명확하게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2)아들과 계시를 받은 자와의 관계
“계시를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받은 자, 곧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을 가르킨다.

요14장에서,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예수께 요청했다. “선생님, 내게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

그 때 예수께서 이렇게 답변하셨다. “어찌하여 내게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가 신비한 관계임을 알 수 있는데 이 비밀은 오직 어린 아이와 같이 진리의 말씀을 받아 들이는 자에게만 허락되어진다는 뜻이다. 자신을 지혜롭다 슬기롭다 생각하는 인간은 자신의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거절함으로 성부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관계성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중요한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 메시지는 구원의 유일성에 관한 선포라 할 수 있다. 모든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고,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결코 주시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이나 철학, 과학적 분석을 통해 알아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방법이다. 오직 겸손한 자 어린아이와 같은 자에게 이 은혜는 열려 있다는 것이다.

3.예수님의 초청(28-30)

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초청은 막연한 것이 아니다. 27절에서 예수님의 자기 선언은 인류의 유일한 소망에 대한 답변으로서 인류를 구원하실 힘과 능력이 있기에 자신감 있게 초청하고 계신 것이다.

우리가 손님을 청할 때 집안 환경이나 시설이 최고급으로 갖춰져 있고, 음식도 풍성하고 맛있게 준비 됐다면 자신감 있게 초청할 수 있을 것이다.

예)입주자 전도 - 완공된 상태라면 자신 있게 초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이 여의치 못하니까 목소리가 줄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초청은 자신과 확신에 넘쳐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어느 누구든지 예수님의 초청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께로 나오게 되면 확실한 쉼을 보장받게 되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과연 이 세상 어느 누가 이런 확실한 보장을 제시할 수 있는가?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장하시는 이 쉼을 얻기 위해서는 3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그 조건에 대한 응답이 있어야 한다.

1.초청에 대한 응답

“오라!” 누구의 음성인가? 예수님의 음성이다. 예수님께서 직접 초청하시는 것이다. 27절의 말씀에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천지의 주재가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으신 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분. 곧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의 초청이다.

그리고 초청의 대상은,  25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지지 않은 자가 하나도 없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나는 행복하다. 나는 짐이 없다”라고 말한다면, 정상적인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예수님의 초청은 율법에 노예가 되어 있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유대교인들 뿐 아니라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과 이방 모든 종교인들, 불신자들을 다 포함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초청장을 보내시는가? 그들의 수고가 많고 짐이 무겁기 때문이다. 그대로 나누면 결국 그 수고로 인해 쓰러지고, 짐의 무게로 인해 눌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초청에 응답하지 않는다. 각자 사무에 바쁘다. 어떤 사람은 소를 샀고, 어떤 사람은 밭을 샀고, 어떤 사람은 장가들었다고 이렇게 저렇게 핑계를 댄다.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거절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훗날 지불해야 할 댓가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난 것이다. 그날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면, “넵”하고 달려 오면 된다.
-“나는 아직 술을 못 끊어서...,”
-“나는 아직 담배를 못 끊어서...”
-“나는 아직 죄가 많아서...”


2.예수님의 멍에를 메는 것이다.

초청에 응답을 하고 예수로 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의 지고 있는 멍에를 벗어라. 그리고 나의 멍에를 메라.”

초청을 받아 온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다가 가셔서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멍에를 벗겨 주신다. “너의 지고 있는 멍에를 벗자!” 그 사람의 멍에를 벗겨 보니 온통 상처 투성이 멍 투성이..,  네 몸에 맞지 않는 멍에를 메고 지금까지 고생 많이 했구나.

그러면 그들이 지금까지 지고 있었던 멍에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직접적으로는 율법의 짐, 광의적으로는 죄의 짐이요, 현실적으로는 인생의 짐이다. 이런 것들로 인해 인생은 참으로 힘겹고 고달프기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이젠 나의 멍에를 메라.” 이유는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기 때문이다.

옥한흠목사, 예수님의 멍에가 쉽고 가벼운 이유에 대하여 3가지로 언급했다.

1)우리 몸에 꼭 맞기 때문이다 - 내 형편, 내 사정, 내 고민을 예수께서 다 아시기 때문이다.

2)주인이 좋기 때문이다 - 힘든 일도 주인이 좋으면 기쁨으로 충성하지만, 주인이 악하면 쉬운 일도 힘이 들게 된다.

3)사랑하시기 때문이다 - 주님이 메어주신 멍에는 사랑의 천으로 폭신하게 감겨져 있기 때문에 편하고 좋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우리를 힘들고 고통스럽게 하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메어 주시는 멍에를 멜 때 우리는 진정한 쉼을 누리게 될 것이다.


3. 내게 배우라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배운다는 것은 예수님을 본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초청에 응답하고, 주님의 멍에를 메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참된 평강과 기쁨이 없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 가지 않고 자기 길로 가기 때문이다.

29절의 말씀을 보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어떤 사람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한다. “주일이 안식일이 아니라 안쉴일이라고...”

나는 이 말에 대하여 한편으론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 수긍하지 않는다. 여러분, 예수님의 생활을 살펴 보자.

막1:34-35,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격무에 시달리시면서도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셨고, 그리고 아침에 다른 마을을 향하여 전도하기 위해 떠나셨다. 오늘 본문에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너희가 쉼을 얻으리니...”라는 말의 의미는 일을 하지 않고 쉬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소에게 멍에를 씌우는 것은 소로 하여금 힘을 덜 들이고 일을 하기 위함이다. 일하지 않는 소는 존재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노는 것도 한 달 정도 놀면 노는 것처럼 힘든 것이 없다.

우리가 예수를 나의 구주로 주님으로 믿고 있으며서도 날마다 피곤하다 힘들다 어렵다고 호소하는 것은 주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 힘이 들고 지치는 이유는 자기 욕심에 끌려 일을 벌이거나 주님의 뜻에 맞지 않는 일에 열심을 내다가 지쳐 쓰러지는 것이다. 주님의 방법대로 하면 골고다까지 말 없이 따라 갈 수 있다. 

찬송가 495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주 예수와 동행할 때, 우리는 어느 곳에 있든지 하늘나라의 쉼을 느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육신의 쉼을 얻고자 애쓰기 전에 먼저 내 영혼이 쉼을 얻을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그곳은 바로 나의 죄를 위해 친히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유일한 안식처요 피난처가 된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의 초청에 응답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쉼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삶의 분주함으로 인해, 육신적 피곤함으로 인해 예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육신이 지치고 심신이 피곤할 때 바닷가로 가도 좋고, 산으로 가도 좋다. 그러나 우리의 쉼이 육체적 피로만 가시는 쉼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도 함께 쉼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오직 예수께로 갈 때, 예수와 함께 있을 때 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 편견은 버리라. 그리고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그분께 맡기라. 그리하면 여러분의 영혼이 쉼을 얻게 될 것이며,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생명력으로 충만해지며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능력 있는 삶이 될 것으로 믿는다. (원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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