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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스스로 종이 된 사람들 (출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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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종이 된 사람들(출21:1~6)

  오는 8월 15일은 광복 61주년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일제의 압제와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은 감격의 날입니다. 해방 후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축복하셔서 세계 경제 10위권에 근접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가 피선교국에서 선교국으로, 그것도 세계에서 선교사를 두 번째 많이 파송한 선교대국(1만2천명 선교사를 파송한 국가)이 되었습니다. 최근 나라 안팎으로 심란하고 복잡한 일들이 많지만, 그래도 이 작은 나라가 이마만큼 발전되고 지탱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신기합니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애국가 가사 그대로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각 개인이 광복의 기쁨을 십분 누리려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광복을 넘어서 ‘영적인 광복’을 이뤄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광복의 핵심은 자유입니다.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아무리 정치 경제적으로 자유를 얻어도 만일 ‘영적인 자유’를 얻지 못하면 각 개인의 인생은 참으로 행복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우리에게 있어야 할 ‘영적인 광복’에 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출애굽 한 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구약성경을 읽을 때 참고가 되도록 율법에 관해 잠시 정리해 드립니다. 율법은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정한 법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대로 따라야 할 규정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율법을 읽다 보면 내용도 어렵고, 오늘 우리의 실정과 부합되지 않는 게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이 나오면 애를 먹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율법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요 우리의 신앙과 삶에 큰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냥 지나쳐버리면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것을 잘 정리해 두시면 구약의 율법을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도덕법, 제사법, 사회법 등입니다.

(1) 도덕법(Moral Law) : 십계명(출애굽기 20장)으로 대표되는 율법인데 시대와 상황을 초월해서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법도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은 우리가 철저히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율법을 지킴으로 우리가 바른 길을 걸어가고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제사법(Ceremonial Law) : 구약 시대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규정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레위기 등) 그런데 이런 것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되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속죄를 완성한 것입니다. 더 이상 구약의 제사가 필요 없습니다. 다만 그 의미를 깨달음으로 구원의 은총을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3) 사회법(Social Law) : 이스라엘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그 시대 상황에 맞게 법률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 역시 그대로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회법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우리 삶의 현장에서 그 정신을 살려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사회가, 우리 개인이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출애굽기 21:~23:) 오늘 본문 말씀이 곧 사회법(or 시민법) 규정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 어떤 내용입니까?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 존재하던 노예제도에 관한 규정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노예제도도 없고, 당연히 이 규정대로 실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안에 담긴 원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인권 존중’입니다. 혹자는 하나님이 노예제도를 허용하신 데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노예제도는 하나님의 성품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노예제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게 아닙니다. 당시 고대 이방 나라에서는 노예가 하나의 물건 취급을 받았고, 평생 주인에게 속박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 노예의 경우는 충분히 인격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 시대로서는 사회의 경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고, 일종의 고용제도였습니다. 이방 나라의 노예제도와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이 사랑과 공의의 정신으로 규정해 놓으신 훌륭한 법률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내용을 보십시오. 2절 보면, 히브리 종이 6년 일하면 제7년째는 해방됩니다. 이방 나라에서는 평생 소유물로 취급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노예, 종이 되는 케이스는 큰 빚을 졌거나 경제적으로 망해서 남의집살이를 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인격적인 대우를 받도록 규정하셨습니다.(레25:39~40 종, 노예로 부리지 말고 형제나 품꾼으로 대우) 그리고 6년 일한 후에는 아예 해방을 시킵니다. 또 해방시킬 때는 많은 선물을 줘서 그 이후의 생활 대책을 세워 줍니다.(신15:13~14 참조) 요즘으로 말하면 퇴직금을 충분히 주는 겁니다. 

  한편 주인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경제적 손실을 보면 안 되니까 3절~4절에 뭐라고 규정합니까? 혼자 들어왔으면 혼자 나가고, 그 주인집에 있는 동안 아내나 자식을 얻었어도 주인에게 남겨 두고 나가도록 규정합니다. 이것은 주인의 재산권을 보장하는 의미입니다.
형평성을 유지하려는 조치입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5절~6절입니다. 만일 종이 제7년에 해방되는데, 주인이 너무 좋고 가족과 함께 살고 싶으면 특별한 계약을 맺을 수 있습니다. 나가서 사는 것보다 주인집에 눌러앉아 계속 살면 좋겠다고 판단이 되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때 서약의 표시로 귀를 문설주에 대고 송곳으로 뚫습니다. (종의 표시로 이방 나라는 조금씩 달랐습니다. 고대 카르타고는 귀고리를 걸어두었고, 고대 바벨론에서는 이마에 불로 지져서 문신을 새겨 넣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은 장식의 의미지만 당시에는 평생의 노예 표시를 하는 잔인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그 주인의 종으로 영원히 있는 겁니다. 그러나 대우가 훨씬 좋아지고 가족의 일원으로 대우해 줍니다.

  하나님은 이런 율법 규정을 통해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경제 질서를 유지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스스로 종이 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 설명해 주시는 겁니다.

  이방인 주인은 나쁜 주인입니다. 그 속박에 있으면 고통입니다. 저주입니다. 멸망입니다. 반면 이스라엘 주인은 좋은 주인입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계속 종이 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주종 관계는 속박의 관계가 아닌 사랑의 관계가 됩니다. 그 사람으로서는 오히려 참 자유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자유 하면 무조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완전한 자유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완전한 자유, 절대 자유는 오직 하나님에게 고유한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는 제한적인 자유요, ‘하나님 품 안의 자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 자유의 중요한 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영적인 광복’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종인데,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 대신 마귀에게, 죄에게, 세상의 헛된 것들에 종노릇을 하게 된 겁니다. 한 마디로 영적인 속박 상태로 전락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영적 속박 : 마귀의 종, 죄와 사망의 종

  인간은 의존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의존하는 존재입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 속에서 생존하도록 창조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물고기의 자유는 ‘물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만일 그것을 벗어나면 해방은 해방인데 ‘멸망하는 해방’입니다. 자유는 자유인데 ‘죽는 자유’입니다. 그러니까 물고기의 참 자유는 물 안에 제한된 자유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유인인데,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자유를 가져대 주는 대신 오히려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마귀와 죄에 속박을 당하는 ‘종’의 상태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 저리 끌려 다니며 멸망 길로 가게 됩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원죄를 이어받은 인간은 마귀에게 종노릇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는 욕망을 자극하며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래서 일단 죄를 지으면 더욱 깊은 속박에 빠지게 됩니다. 종내는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이와 같은 죄의 권세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8:34 “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우리가 흔히 보는 장면입니다만, 범죄자들이 실컷 죄를 짓고 나중에 붙잡히면 얼굴을 가리고 부끄러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했지만 종처럼 끌려가서 했다는 증거입니다. 붙잡히고 보니 후회막심한 겁니다. 

  인간은 일단 욕망에 사로잡히면 헤어나지 못합니다. 죄의 유혹으로 인해 결국은 범죄하고 마지막 멸망하게 됩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보았습니다. 천하장사 출신 씨름선수가 강원도에 놀러갔다가 술을 마시고 다방 여종업원을 강제로 끌고 가서 성폭행하려다 체포당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기사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천하장사도 욕망 앞에는 별 수 없구나!”

  성경에도 이런 예들은 얼마든지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삼손은 천하장사 중의 천하장사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여인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무릎을 베고 희희낙락하다가 머리 깎이고 눈 뽑힌 채 맷돌을 돌립니다. 얼마나 비참한지! 아합왕은 왕이니까 재산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물질의 욕망에 노예가 되어서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고자 살해합니다.(왕상21:) 그 결과는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였고, 전쟁터에서 죽은 후 그 흘린 피를 개가 핥는 비극적인 모습으로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압살롬은 왕자니까 그 권력으로도 충분히 누리고 살 텐데 권력욕에 눈이 멀어 아버지를 왕좌에서 몰아냈지만 비참하게 죽고 맙니다.

  이처럼 인간은 죄성으로 인해 욕망의 종이요 그것으로 인해 범죄하고, 마침내 영원히 죽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됩니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러므로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합니다. 그 속박으로부터 풀어줄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속박의 원인이 된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신 십자가 그것이 죄와 사망의 사슬을 끊어줄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에게 돌아온 인간의 영적 자유 :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

  예수님은 인간은 죄와 사망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 구원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거부하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을 오히려 속박으로 오해합니다. 옹색하고 불편한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참 자유가 무엇인지 몰라서 그런 겁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끈 달린 연이 하늘 위로 날아다닙니다. 그런데 늘 불만입니다. 더 높이, 더 멀리 가고 싶은데 ‘끈’ 때문에 더 이상 못 갑니다. 하루는 바람이 몹시 부는데 얼마나 신나는지! 그런데 더 이상 날지 못합니다. 그래서 힘껏 줄을 당겨봅니다. 줄이 뚝 하고 끊어집니다. 연은 쾌재를 부릅니다. 이제야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거센 바람에 팽그르르 돌다가 땅바닥에 곤두박질하고 말았습니다. 연의 자유는 연줄을 끊고 멀리 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 줄에 달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탕자의 이야기도 이를 증거합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에서 가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멸망의 길이었습니다. 나중에 깨닫고 돌아옵니다. 아버지에게로 돌아옴이 구원이요 참 자유입니다. 눅15:17~20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 ” 자기는 종으로도 족한데, 아버지는 그를 다시 아들로 받아주고 잔치를 베풉니다.

  이렇게 죄와 사망의 속박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그러나 거기서 그치면 문제가 생깁니다. 악한 원수 마귀는 또다시 공격해 옵니다. 다시 종으로 삼으려고 호시탐탐 노립니다. 우리 스스로는 그것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 이후에도 다시 죄의 종으로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갈5:1,13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무슨 말씀입니까? 구원 이후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께 적극적으로 종노릇을 해야 죄의 종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종이 됨으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스스로 영원한 종이 됨으로 참 자유를 누리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① 의의 종이 됨으로 : 우리는 의의 종이 됨으로 죄와 싸워 이기고 참 자유를 누립니다. 어떻게 의의 종이 되나요? 말씀에 순종하면 됩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불의와 죄악을 이깁니다. 그때 영적 자유가 있습니다. 시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말씀대로 사는 사람에게 있는 평안! 이것이 영적 자유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성령의 세력과 육신의 욕망이 공존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어도 천국 가기 전까지는 죄의 성향이 남아 있습니다. 그 틈에서 우리가 승리하려면 성령을 적극적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그게 성령 충만입니다. 갈5:16~17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어떤 분의 간증문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는 도박의 습관이 있었는데 교회 다니는데도  계속되었습니다. 늘 후회하지만 고쳐지지 않습니다. 어느 날 밤 돈을 다 잃고 야밤에 귀가합니다. 또 부부 싸움입니다. 미안한 생각이 들어 아내 앞에 무릎을 꿇고 빕니다. 다시는 안 하겠다고 ... 하지만 아내는 믿어주지 않습니다. 그러자 홧김에 주방으로 가서 식칼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손가락을 자릅니다. 결심의 증거로 ... 그러나 1주일 후 다시 도박판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죽고 싶었습니다. 이런 갈등 속에 다행히 그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를 뜨겁게 만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게 됩니다. 그러고 나니까 거짓말처럼 그 못된 습관이 저절로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종이 됨으로 다른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원리입니다.

  ② 사랑의 종이 됨으로 : 우리의 인생을 망치는 것 중의 하나가 증오와 갈등입니다. 세상에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랑이 부족해서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할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구원받은 후에도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늘 미워하며 다투며 살아갑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만이 승리임을 잘 알지만 안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이 됨으로 가능해집니다.

  네덜란드 출신 코리 텐 붐 여사(「주는 나의 피난처」저자)의 이야기입니다. 나치 치하에서 수용소 생활로 많은 고통을 받은 분입니다. 그는 2차 대전 종전 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는 전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전도 초기 시절 어느 교회에서 집회를 마친 후의 일입니다. 교인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남자 한 분이 뒤에서 기다리다 절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기억하냐고 묻습니다. 기억이 안 난다는 표정을 지었더니 그는 자기가 바로 아무 아무 수용소의 간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여사는 순간 기억이 살아났고 그가 자신의 옷을 벗기고 침을 뱉고 채찍질을 하며 성폭행을 한 사람임을 알에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증오가 끓어오릅니다. 그냥 손을 뿌리치고 욕을 하면서 얼굴에 침을 뱉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성령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예수님이 너도 용서하지 않았느냐고, 그리고 방금 전에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냐고 ... 그 음성을 들은 여사는 괴롭지만 어금니를 질끈 깨물며 그 남자의 손을 잡았습니다. 사랑할 수 없지만, 용서할 수 없지만 주님께 순종한 겁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 마음속에 한없는 감격이 일어납니다. 진실한 용서의 사랑으로 그 남자는 얼싸안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순종함으로 우리는 증오와 갈등을 이기고 참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③ 사명의 종이 됨으로 : 우리 인생은 때때로 마귀의 유혹으로 방향을 상실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이 주신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에 충성스런 종으로 살면 방황이 끝납니다. 진정한 승리의 기쁨과 자유를 얻게 됩니다.

  링컨 대통령 당시의 일입니다. 아마 노예해방이 선언되기 전의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 흑인 노예가 병들어서 일을 잘 못하자 그 주인이 학대합니다. 채찍질을 하고 괴롭힙니다. 지나가던 백인 교수는 너무 불쌍해서 주인에게 흥정해서 두 배의 돈을 치르고 풀어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흑인 노예는 갈 데도 없고 그 사랑에 감동을 받아 자기를 받아달라고 간청합니다. 아무리 가라고 해도 가질 않아 하는 수 없이 함께 삽니다. 노예라기보다는 가족처럼 친구처럼 지냅니다. 그러니까 더 충성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식물학자인 교수는 그 흑인과 함께 태평양 섬에서 탐사활동을 벌입니다. 흑인 노예가 숲을 헤치고 앞서 가는데 뒤따르던 교수가 독사에 물려 쓰러집니다. 독이 온 몸에 퍼져 살 길이 없게 되자 흑인 노예는 입으로 독을 빨아올립니다. 주인은 살렸지만 자기는 죽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죽어가면서 그는 평안한 모습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여한이 없습니다. 나를 사랑해 주는 주인을 위해 보답하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주님을 위해, 사명을 위해 충성하는 종이 되면 기쁜 겁니다. 그게 자유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사명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는 본래 자유인입니다. 로마시민권자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위해 스스로 쇠사슬에 매인 사신(엡6:20)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는 무한한 자유와 기쁨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광복절은 맞이하고 보내면서 우리 개인과 나라의 영적 광복에 관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주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나 개인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광복이 되었지만 아직 어렵습니다. 앞으로 정치 경제도 잘 하고 외교 안보도 잘 해야 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나라가 계속 번영하고 잘 되는 길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겁니다. 온 백성이 예수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직하게 살고, 세계선교의 사명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종이 됨으로 참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부디 이런 원리를 잘 실천함으로 참 자유인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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