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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만남은? (딤후 4: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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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부모를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스승을 만나고 이웃을 만납니다. 특별히 우리 성도들은 교회를 만나고, 목사를 만나고, 성도들을 만나면서 소중한 인연을 맺습니다.
그런데 이 만남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만남입니다.(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 전에 찬양했던 것처럼 “우리의 만남은 주님의 은혜라오. 우리의 만남은 주님의 축복이라오.”라고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수십억의 사람들 가운데 이 시대에 이 서울에서 그것도 수많은 교회들 가운데서 이 아름다운 교회에서 만남을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만남은 유연이 아닙니다. 우리의 만남은 필연입니다. 이것은 함께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고자하시는 분명한 목적과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믿습니까?
그래야 서로가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서로를 바라보면서 사랑할 마음이 생기고, 서로 아끼고 헤어지기 싫어서 한 번 더 바라볼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의 만남이 별 볼일 없는 만남이라고 생각한다면 만남 자체가 짜증입니다. 만나면 언제 헤어지나 헤어질 시간만 기다리면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만남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 이루어졌음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서로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만남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라고 서로 고백하십시다.

바울사도에게도 많은 만남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만남은 유연이 아니었고 필연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의 만남 가운데 어떤 만남은 유익한 만남이 되었고 또 어떤 만남은 무익한 만남, 서로에게 아픔을 주는 만남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만남은 필연인데 어떤 만남은 서로에게 즐거움과 유익한 만남이 될 수도 있고 또 어떤 만남은 잘못되면 무익한 만남, 고통스러운 만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만남이 분명히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섭리와 계획하심 가운데 이루어진 우리의 만남이 무익한 만남이 될 수도 있고, 유익한 만남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이 만남을 결정합니까? 모임의 당사자들인 우리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익한 만남을 만들 수도 있고, 우리가 무익하고 해로운 모임을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아름다운교회의 모임이 유익한 모임이 될 수 있게 하는 것도 여러분이고 무익하고 무료하게 만드는 것도 여러분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중요합니다. 모임의 당사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임이 어떤 모임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만남이 어떤 만남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말하면 잔소리죠?
우리의 모임이 유익하고 좋은 모임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조건이 서로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유익한 만남, 보람된 만남, 유쾌한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첫 번째 조건이 희생입니다. 내가 희생할 때 좋은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도 희생하려하지 않으면 절대 좋은 만남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희생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좋은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우리와의 만남이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전적으로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완전히 희생시키셨습니다. 우리와의 만남을 갖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포기하기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의 만남을 갖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인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서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과의 만남이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만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과 좋은 만남을 이루었던 사람들을 살펴보십시오.
그들은 한결같이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입니다.
이들 부부는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으로서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부부입니다. 이들은 장막업을 하면서 돈을 벌어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도와준 사람들입니다. 물질로만 아니라 바울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이라도 내어놓을 신실한 동역자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6장 3절에서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롬16:3-4)
여러분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사도를 위하여 물질뿐만 아니라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저를 위하여 목이라도 내 놓을 분이 계십니까?

갈라디아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의 육체의 연약함을 비방하거나 비웃지 않고 마치 천사와 같이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과 같이 했습니다. 얼마나 바울을 극진히 섬기며 사랑했든지 눈이라도 빼어 줄만큼 사랑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3-1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갈4:13-15)

바울의 동역자였던 에바브로디도도 그리고 빌립보교회도 좋은 만남을 위하여 희생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들을 자랑으로 생각하며 좋은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크게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좋은 만남이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희생정신입니다.
부부간에 좋은 만남이 계속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희생입니다.
성도 간에도 만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먼저 희생하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희생해 주기만을 기다립니다. 내가 먼저 희생하는 것이 어리석고 손해 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절대 좋은 만남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먼저 손 내밀며 희생하려고 한다면 돈이 없고 내일에 먹을 것이 없다할지라도 그곳이 천국이 될 수 있을 것인데 서로 양보하지 않습니다. 서로 희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희생하기만을 강요합니다.
부부간에도 서로 희생하기만을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희생하셨습니다.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먼저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주님의 마음이 충만한 사람이 먼저 희생하십시오. 먼저 찾아가십시오. 먼저 손을 내미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만남을 더욱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좋은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끝까지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의 안타까운 심정이 담겨져 있는 성경구절이 디모데후서 4장 10절입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딤후4:10)
힘들다고 떠났습니다. 어렵다고 떠났습니다. 또 재미없어서 떠났습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습니다. 이 사람도 떠나고 저 사람도 떠나고 많은 사람들이 바울 곁을 떠나갔습니다.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겠습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로 인하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인데 함께 했던 동역자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떠났으니 얼마나 낙심되었겠습니까?

그러나 11절을 보십시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딤후4:11)
누가는 끝까지 남았습니다. 누가는 어려울 때도 함께 했고, 감옥에 있을 때에도 함께 있었습니다. 누가는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끝까지 바울 사도를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기에게 유리하면 함께하고 불리하면 떠는 만남은 좋은 만남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도움이 되고 이익이 되면 만나고 자기에게 도움이 안 되고 이익이 안 되면 떠나는 만남은 좋은 만남이 아닙니다. 상황이 어찌되든지 서로 만남을 위하여 끝까지 지켜주며 함께하면서 만들어가는 것이 좋은 만남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만남이 바로 이러한 만남이 되기를 원합니다. 서로에게 이익이 될 때뿐 아니라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끝까지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고민하는 만남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분명 이렇게 끝까지 했던 누가가 하나님 나라에서 또한 교회 가운데서 자랑이 되고 고마움이 되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가는 분명 바울에게 큰 힘과 위로와 용기가 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바울과의 만남 가운데 정말 해가 되는 만남이 있었습니다. 누구와의 만남입니까? 구리장색 알렉산더와의 만남이었습니다.
14절과 15절을 읽겠습니다.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딤후 4:14-15)

구리장색이라는 말은 구리로 만든 제물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구리장색 알렉산더가 바울에게 특별히 많은 해를 끼친 사람입니다.
알렉산더라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알렉산더가 바울이 목회할 때 얼마나 바울을 괴롭혔는지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심히 대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양심을 버린 사람이었고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1:19∼20절에서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함이니라”(딤전1:19-20)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도 다 파선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사건건 바울을 괴롭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총신에서는 “사람이 되라.”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그리고 목사가 되라.”는 표어를 붙여 놓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사람이 되지 않았기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심히 바울을 대적하는 잘못된 만남이었습니다.

또한  후메네오와 빌레도라는 사람과의 고통스러운 만남이 있었습니다.
디모데후서 2:17∼18절에 보면,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딤후 2:17-18)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후메네오와 빌레도는 한마디로 진리에 위배되는 악한 말로 잘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실족케 하고 그들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다'고 했는데 이 말은 조개나 생선을 잘못 먹어서 피와 내장이 썩어서 죽는 병을 말합니다. 즉, 이들이 하는 말이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몇 주전에도 생각했던 것처럼 사람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이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말 한마디로 믿음을 굳건히 세워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속삭이는 말로 그만 그 믿음을 무너뜨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후메네오와 빌레도는 바울의 목회에 마귀 짓을 하면서 해를 입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알렉산더나 후메네오와 빌레도처럼 복음 사역에 무익한 자가 되고 방해자가 될 것이 이러한 만남은 불행이고 슬픔이고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방해꾼이 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과의 만남을 통하여 신앙이 세워지고 용기가 생겨지고 여러분과의 만남을 통하여 믿음이 생겨지는 그러한 축복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만남이 더욱 그리운 만남이 되고 보면 또 보고 싶은 만남이 되고 우리의 만남을 통하여 유익이 되는 만남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희생해야 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가지고 함께 하는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주님이 우리의 만남을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놀랍고 즐거운 만남이 될 줄 믿습니다.

“우리의 만남은 주님의 은혜라오.” 찬양하면서 우리의 만남이 복된 만남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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