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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야에서의 신앙표현(출 33: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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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출 33: 7-11
제목: 광야에서의 신앙 표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표현하는 데는 시대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선악과만 따먹지 않으면 출산의 고통이나 사업, 직장 걱정없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고 이후에는 제사 드리는 것으로 신앙을 표현했습니다. 이때 믿음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은 가인은 신앙의 사람에서 제외되었고 아벨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제사를 드려서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족장 시대에는 족장, 혹은 가장의 말과 권위를 순종하는 것이 그 사람의 신앙 표현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노아는 족장 시대의 사람이었는데, 노아를 멸시했던 아들 함은 믿음의 사람에서 제외되었고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했던 셈과 야! 벳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도 족장 시대의 사람인데, 큰 아들 르우벤이 야곱의 침상을 더렵혔을 때 르우벤은 장자의 축복에서 제외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광야의 시대입니다. 광야에서는 무엇으로 신앙을 표현했습니까? 본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보이지 않는 통제와 인도를 받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가견적(可見的) 형상물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출 32장)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보이는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금송아지는 인간 스스로 만든 가견적 형상물을 신으로 삼은 불신앙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금송아지를 불태우고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섬겼던 백성들 3000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내가 직접 어떤 상징물을 준비할 것이니 보이지 않는 하나님 자신을 섬기려면 이렇게 하라고 제도를 제정해 주셨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1.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회막으로 나아오라(7)
회막은 성막이 지어지기 전 단계의 모형물로서 후에 성전의 기원이 되는 곳입니다. 이 회막은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장막을 따로 하나 구별하여 이름지은 것입니다. 장막이 있는 곳에서 골짜기 하나의 거리- 약 0.5~1km 떨어진 곳에 회막을 세웠습니다. 회막은 ①만남의 장소 ②대면의 장소 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이며 내 신앙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영적 상징물입니다.
그런데 천막으로 만든 회막보다는 번쩍번쩍 빛나는 금송아지가 훨씬 화려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기에 더 실감날 것 같은데 왜 회막을 찾으면 신앙이 되고 금송아지를 찾으면 불신앙이 됩니까? 왜냐하면 금송아지는 사람들이 스스로 만든 조각물이지만 회막은 보기에는 초라해도 하나님이 직접 지정하신 곳이요 하나님이 친히 임재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10) “모든 백성이 회막문에 구름 기둥이 있음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경배하며” 여러분, 절 안의 화려하고 번쩍번쩍한 부처 앞에 서면 금방이라도 신이 나타날 것 같습니까? 교회 안을 들여다보면 무슨 회의실 같은 딱딱한 느낌입니까? 그러나 부처 앞에 서면 불신앙이요 교회 앞으로 나아오면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이 피로 값주고 사신 곳이며, 예수님의 피와 성령의 감동과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 求? 이곳에 구원이 있고 이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이곳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나의 신앙은 어떻게 표현해야 합니까? 지금도 광야 시대처럼 멀리 떨어진 회막(교회)을 찾아가면 됩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우리는 본문 가운데 (7)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라는 말씀을 유의해 보아야 합니다. 앙모한다는 말은 ①바라본다 ②사모한다 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신의 신앙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문 앞에 있는 교회를 가든 강북에서 강남으로 멀리 떨어진 교회를 가든 여호와를 앙모하는 마음이 어떠하냐 하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이 여호와를 바라보고 있는가? 삶의 내용이 여호와를 사모하며 사느냐? 는 것이 우리의 신앙 기준이요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동편에 계시는데 우리는 북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좀더 의롭고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기를 요구하시는데 우리는 여전히 세속적 가치와 인간의 목적을 기준삼아 살고 !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모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말세를 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벧후 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벧전 2:2)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시 34:5)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기 아니하리로다” 믿음의 사람들은 주의 날이 임하기를 사모하고 신령한 젖-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 자체를 사모하는 사람인줄 믿습니다. 돈을 사랑하고 세상 사랑, 쾌락을 사모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요 씨앗이 되어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모하는 영혼에게는 하나님이 각양 좋은 은사와 선물을 만족하게 채워주십니다.
내 신앙의 기준 혹은 신앙의 표현은 얼마나 멀리 떨어진 교회를 찾느냐가 아닙니다. 교회를 얼마나 자주 나오느냐 교회 행사에 얼마나 많이 참여하느냐도 아닙니다. 그 안에 여호와를 앙모하는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남의 가방을 훔치기 위해 교회를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연인을 만나기 위해 먼 교회를 다니기도 합니다. 인기를 얻고 인간적 목적을 얻기 위해 교회행사에 열심히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깊은 신앙을 위한 기초단계는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신앙은 아닙니다. 여호와를 앙모해야 합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회막에서 하나님을 바랬지만 지금의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여호와를 앙모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십시오. 하나님의 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이때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하게 하! 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게 될 것입니다.


2. 모세의 회막 길에 경의를 표하라(8)
족장 시대 믿음의 표현이 족장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하는 것이었다면, 광야 율법시대, 제사장 시대가 열렸을 때는 제사장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하는 것이 그 사람의 신앙 수준입니다. 그 예로 고라 자손과 250여명의 무리들이 모세를 대적했을 때 하나님은 땅의 입을 열어 그들을 삼켜버리셨습니다. 믿음의 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가 구스 여인 취한 것을 비난하며 일어났을 때 하나님은 미리암에서 문둥병으로 치셨습니다. 또 어떤 무리들이 물이 없다고, 만나와 메추라기만 준다고, 광야 길이 힘들고 지루하다고 모세를 향해 원망과 불평으로 대항했을 때 하나님은 불뱀과 전쟁,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야 하는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8) “모세가 회막으로 나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 까지 바라보며” 장막에서부터 회막까지 짧게는 500m, 길게는 1000m의 거리를 모세가 걷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어서서 경건한 자세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모세를 대적하고 대항하고 원망하는 사람들과 모세의 회막길에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는 사람 중 누가 믿음의 사람 같습니까? 흰머리 앞에서 일어나는 사람을 보면 어른에 대한 공경심을 알 수 있듯이, 모세의 회막길에 일어서는 것을 보면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9-10) 단순히 모세 개인에 대한 경의가 아니라 모세와 말씀하시는 회막의 하나님을 경배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회막을 찾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함이요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함이요 하나님과의 영적 만남을 위함입니다. 그러므! 로 이런 모세의 회막길에 경의를 표하는 것은 당시 개인 신앙의 표현입니다. (느8)에 보면 에스라가 수문 앞 광장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들을만한 무리들을 모아놓고 강단 앞에 서서 말씀을 펼 때에 모든 백성들이 일어섰다고 합니다. 말씀을 펼 때에 일어나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말씀을 모른다면 일어서지도 않고 말씀을 들을 때 조는 사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어떻습니까? 오늘날은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을 격려해주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안수 집사 투표에 떨어졌다고 술먹고 따지고 드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술먹고 담배 피다가 목사를 만났을 때 부끄러워 도망가는 사람은 그래도 어느 정도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목사를 대적하며 덤비고 따지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아내나 남편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한다면 응원해주고 기도해 주세요. 방해하거나 시비하지 말고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회 일에 충성하려는 장로님, 집사님, 구역장, 각 기관의 임원들을 격려해 주십시오. 특별히 교역자들을 격려해주고 그 앞에서 겸손해 지십시오. 대항하거나 원망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믿음의 행위가 아닙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 회막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 모세가 가는 길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앙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군들을 존귀히 여기며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의 행위로 이 땅위에서는 기름진 복을 받고 하늘나라에서는 신령한 상급을 받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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