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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북한선교] 공의와 능력의 하나님과 북한 (욥 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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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공의와 능력의 하나님과 북한
본문 : 욥기 40:6~14
 
교회에는 여러 가지 절기와 기념주일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절기와 기념주일 이름을 아는 대로 말씀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 알고 계시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우선 종려주일, 부활주일, 성령강림주일, 대림절 같은 교회력상의 절기들이 있습니다.
웨슬리회심기념주일, 종교개혁기념주일, 추수감사주일, 이와 같이 교회의 역사와 전통 가운데 제정된 절기들도 있습니다.
신년주일, 임원임명주일, 찬양대원 임면주일 교사임명주일, 이와 같이 교회의 필요에 따라서 만들어진 주일들도 있습니다.
교회의 창립감사주일도 있습니다.

학원선교주일, 장애인선교주일, 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 환경선교주일, 교역자보건주일, 기독교교교육진흥주일, 세계성찬주일, 청년주일, 문서선교주일, 성서주일, 군선교주일, 학원선교주일, 여선교회 주일….

이와 같이 선교의 필요에 따라서 제정된 주일들도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이런 주일들을 꼭 지켜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주일 잘 지키는 것이 목회 잘 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 주일의 설교도 절기나 기념일에 맞춰서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그렇게 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 주일이 3․1절 기념주일이면 3․1절에 대한 것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설교가 점점 강연처럼 되더군요.
지금은 꼭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주간이 어떤 주간인지 주보의 예배순서나 교회소식 란에 빠짐없이 적어 성도들이 알게 하고 찬송이나 교독문을 선정할 때 그 주간에 맞는 것을 찾기 위해 힘쓰는 정도입니다.
설교의 흐름에 따라 그런 것을 살짝 언급하기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북한선교주일은 조금 강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북한선교는 지금 매우 중요한 일, 교회가 꼭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북한선교주일은 감리교 전체가 지키는 주일입니다.

8․15가 들어 있는 주일을 교단이나 교회에 따라서 광복감사주일, 통일기원주일, 평화통일주일, 남북연합주일, 여러 가지 이름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감리교에서는 북한선교주일로 지키기로 결의가 되어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북한선교를 비전의 하나로 정하고 이 일에 힘쓰고 있다는 것도 북한선교주일을 조금 강하게 지키는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요즘은 북한의 어려운 현실에 대해  들을 때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큰 죄를 짓는 것 같은 마음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중요한 이유입니다.

지금 ‘북한의 어려운 현실’이라는 말을 했는데 북한의 어려운 현실들 가운데 제일 큰 어려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식량난, 어려움입니다. 정말 큰 어려움입니다. 이거 제발 좀 빨리 해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생활필수품들이 크게 부족한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자유가 없는 것, 어려움입니다.
여러 가지 모순된 사회구조, 비인간화된 삶,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거기에 여러분, 북한주민들이 복음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빼 놓아서는 안 됩니다.
영적인 기갈, 영적인 진공상태, 그 가운데서 허덕이고 있는 동포들의 현실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은 죄 가운데에서도 죄입니다!

‘어떤 설교가 좋은 설교인가?’ 하는 것을 판단할 때 그 기준은 여러 가지입니다. 
‘설교자가 얼마나 말을 잘 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요즘은 ‘얼마나 재미있게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잘 아시는 대로 오늘 저녁부터 열리는 용인서지방 연합집회 강사님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탁월한 분일 것입니다.
매우 분주한 분인데 지방 선교부에서 많이 힘써서 귀한 분을 모셨습니다.
제일 중요한 판단 기준은 ‘그 설교자가 설교의 내용대로 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얼마나 보이는가?’ 하는 것이 되어야합니다.
그런 고민, 그런 노력 없이, 설교집, 주석집, 예화집 여기저기에서 오려서 합성한 설교는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사실은 살아있는 설교가 아닙니다.

저는 최근 북한선교와 관련된 몇 가지 일을 집중적으로 했고 또 할 예정입니다.
그래서 이번 주일은 좀 떳떳한 마음으로 설교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북한에 다시 한 번 다녀온 일입니다.

지난 목요일 저녁에는 새터민 영성수련회에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이 집회는 새터민 수백 명이 기도원에 모여서 갖는 규모가 큰 수련회입니다.
시간, 시간 예배를 드리면서 노동부 취업보호 담당관도 나오고, 통일부 사회문화교류국에서도 나오고, 북한이탈주민후원회에서도 나오고 가정문제전문기관에서도 나오고 일종의 탈북민 종합대회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 남선교회 회원 여러분이 함께 가서 기도순서도 담당하고, 간증도 하고, ‘나는 여러분을 이렇게 돕고 싶습니다.’ 발표하면서 격려도 하였습니다.
재정적으로 그 수련회를 도운 남선교회 회원도 있습니다.

이번 주간에는 정기적으로 하는 것이지만 평화교회에서 가서 예배를 인도 하게 됩니다.
매월 둘째 주간에 가는데 이번은 그 교회 창립8주년 기념주일에 맞춰서 가느라고 셋째 주간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미리 밝힐 수 없지만 그 교회에서 특별한 일 한 가지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자만 설교한 대로 살려고 힘써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를 듣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포된 말씀대로 살려고 얼마나 힘쓰느냐?’ 하는 것이 ‘그가 얼마나 좋은 성도이냐? 판가름 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번 주간에는 북한선교를 위해 무엇인가 한 가지 이상씩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번 주간 좋은 성도로 사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하시렵니까?
제가 몇 가지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우선 북한선교를 위해 평소보다 더 열심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거 못하실 분은 없지요?

북한선교를 생각하면서 한 끼 금식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광복절 61주년 기념일인 15일, 화요일 아침에 금식하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민족에게 이 날 해방을 선물로 주셨는데 우리는 아직도 하나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사건건 마찰, 갈등, 불협화음을 내고 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는 마음으로 금식하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 다니엘의 회개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 다니엘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회개의 기도를 했습니다(단 9:3).

다음 주일에 수재민들을 위한 사랑 나눔 헌금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많은 부분은 아니지만 그 가운데 일부는 북한동포들을 위해서 사용할 예정입니다.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 헌금에 정성껏 동참하는 것도 북한선교를 위한 일이 됩니다.
그 헌금은 아주 빠른 시간에, 아주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북한에 전달될 것입니다.

지금 ‘요덕 스토리’라는 뮤지컬이 올림픽공원 안의 올림픽 홀에서 공연되고 있습니다.
‘요덕 스토리’는 요덕 정치범수용소의 비참한 실상을 폭로하는 작품입니다.
정성산이라는 탈북 연출가가 원작을 쓰고 연출을 했습니다.
그것을 관람하시는 것도 북한선교를 위한 일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주변에 아는 탈북민이 있으면 일부러 만나 식사를 대접하고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교회를 거쳐 다른 곳으로 간 탈북 성도 가정들도 있는데 그 분들에게 안부 전화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밖에도 ‘나는 이것도 북한선교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겨지는 일들을 찾아 한 가지 이상씩 꼭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북한선교를 교회의 비전으로 하고 있는 목양교회 성도로서 마땅한 의무입니다.

이상으로 북한선교주일 설교 제1부를 끝내고, 이제 본문을 봅니다.
욥기의 결론 부분에 속하는 본문을 통해 북한선교에 대한 세 가지 교훈을 얻으려고 합니다.
‘아니, 이제 본문을 본다고 하면 설교가 지금 시작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언제 끝난단 말인가?’ 염려하지 마세요.
끝나는 시간은 언제나 같습니다.

첫째, 우리는 베헤못과 리워야단도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은 북한도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고, 우리는 북한 문제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본문을 조금 벗어납니다만 욥기 40장과 41장에는 두 낯선 이름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베헤못입니다.

15절 앞부분을 보세요. “이제 소 같이 풀을 먹는 베헤못을 볼지어다”
이 베헤못은 하마일 것이라고 합니다. 예전 성경에는 아예 하마라고 되어 있지요.
코끼리라고 하기도 합니다. 정확하게는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신구약성서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이름입니다.
베헤못은 대단히 괴상한 존재입니다.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꼬리를 치면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리워야단입니다.
41장 1절에 나오지요.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리워야단은 악어일 것이라고 합니다. 예전 성경에는 아예 악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악어처럼 생긴 바다 괴물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밖에도 뱀이다, 고래다, 여러 가지로 해석합니다. 정확한 것은 모릅니다.
이 리워야단도 대단히 괴상하고 강하고 두려운 존재입니다.

욥기 41장은 이 리워야단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베헤못과 리워야단은 괴물입니다.

요즘 ‘괴물’이라는 영화가 화제가 되고 있는데 미처 보지 못해서 거기에 어떤 괴물이 나오는지 알지 못하는데 베헤못과 리워야단은 괴물 가운데 괴물입니다.
제가 왜 베헤못과 리워야단 이야기를 하는지 짐작하셨을 것입니다.

북한은 이 둘과 닮은 데가 많습니다.
19절을 보세요. 베헤못은 무서운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23절을 보세요.
베헤못은 강물이 소용돌이쳐도 놀라지 않고, 강물이 그 입으로 들어가도 태연합니다.
북한은 세계가 떠들어도 꿈쩍을 하지 않습니다.

리워야단은 더욱 그렇습니다.
41장 33절을 보면 리워야단은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지음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북한은 지금 세계의 여론도, 온갖 비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강한 힘을 가지고 주변을 괴롭히는 나라들을 리워야단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시편 74편 14절에서는 애굽을 리워야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27장 1절에서는 앗수르를  리워야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7,8년 전에 우리가 IMF에 시달릴 때 어느 목사님이 ‘아, 리워야단과 같은 IMF가 지금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해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 일이 있습니다.
북한 정권이야말로 이 시대의 리워야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무섭고 제멋대로인 베헤못도, 리워야단도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15절 뒷부분을 보세요.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것은 그것들이 무엇인가 뜻이 있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지배 밑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베헤못, 리워야단, 이 괴물을 어쩔 수 없습니다.

24절을 보세요. “그것이 눈을 뜨고 있을 때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것의 코를 꿸 수 있겠느냐” 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41장 1절을 보세요.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지으신 하나님은 능히, 아니 어렵지 않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욥, 네가, 그런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왜 이러쿵저러쿵 불평을 하고, 항의를 하고 야단이냐?’

욥기 40장과 41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욥기의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사탄도 하나님의 지배 밑에 있다는 것입니다.
욥기는 그것을 전제로 하고 출발합니다.
욥기를 열면 1장에 먼저 욥이 경건한 사람이고 부자라는 사실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사탄이 하나님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보고합니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을 칭찬합니다.

사탄이 하나님께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소유물이 많기 때문이라고 하고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욥1: 11)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을 허락하시면서 욥의 생명은 해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사탄은 욥의 생명에는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사탄이 이렇게 하나님의 지배 밑에 있는 것 같이, 이 이해할 수 없는 베헤못, 리워야단, 두 괴물도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배 밑에 있습니다.
사람은 이들을 능히 어쩌지 못해서 하나님은 아주 쉽게 이들을 다룰 수 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인 북한도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무엇인가 필요가 있어서 지으셨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이와 같이 비참해진다.’ 본보기로 삼기 위해서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배 밑에 있습니다.

사람은 어쩌지 못해도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때가 되면 북한문제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해결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이 북을 영적으로 강성하게 하실 때까지 간구하고 힘써야 합니다.
욥기는 모두 마흔 두 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대부분은 욥의 발언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직접 질문도 하고, 호소도 하고, 항변도 합니다.
또 간접으로도 그렇게 합니다.
자기에게 ‘너는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모양이 되었다.’ 비난 비슷한 말을 쏟아 붓는 세 치구,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계속해서 같은 일을 합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입을 다물지 않았습니다.

친구 셋이 돌아가면서 끈질기게 공격합니다.
‘욥, 너는 이런 잘못이 있어! 이것 때문이야!’합니다.
욥은 지쳐서 ‘그래, 그래, 자네들이 옳다. 이제 그만 하자!’ 할 만도 한데 그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역공을 취합니다.

욥기 32장을 보면 오히려 세 친구가 할 말을 잃고 말을 그쳤습니다.
그러니까 네 번째 상대인 엘리후라는 젊은이가 새로운 상대로 원기 왕성한 모습을 하고 등장합니다.
욥기 32장에서 37장까지 엘리후가 자기의 주장을 한바탕 길게 폅니다.
욥은 거기에 대해서도 대응을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폭풍우 가운데서 나타나셔서 오늘의 결론을 내립니다.
욥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답을 주실 때까지, 역사하실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선교에 대해 우리는 ‘그것이 될까?’ 하는 생각을 갖기 쉽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간접적인 북한선교 방법들이 과연 효과가 있는 것일까?’
‘북한에 직접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날이 과연 올까?’
‘그런 날이 온다고 하더라도 이미 유물론, 주제사상에 젖을 대로 젖은 북한 주민들이 과연 복음을 받아들일까? 아예 포기하고 지금 가능한 일에 힘을 쏟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갖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포기하기 말고 욥처럼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은 끝까지 다 해야 합니다.

우리가 북한에 대해서, 통일에 대해서 포기하는 마음을 가지면, ‘아, 통일이 되면 우리가 경제적으로 손해가 많을 것이고 이념적으로도 갈등이 많을 텐데, 독일보다 더 심할 텐데…’ 이런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하나님은 북한을 중국에 맡기실 지도 모릅니다.

요즘 동북공정(東北工程)이니 무엇이니 해서 그런 조짐이 조금 보이지 않습니까?
욥기 42장 10절을 보면 하나님이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북한의 곤경을 돌이키실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북한의 곤경을 돌이킨다는 것은 물질적인 곤경에서 회복되는 것도 말하지만 그와 함께 영적인 곤경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북한이 영적으로 이전보다 더 강성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원래 북한은 교회가 많고 신앙운동이 활발했던 지역이었습니다.
그 때보다 영적으로 갑절이나 더 부자가 되게 해 주실 때까지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여러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은 공의와 능력으로 역사하실 것을 믿어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나는 공의의 하나님이다’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8절을 보세요.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이것은 ‘나는 공의의 하나님이다! 나는 악하지 않다!’ 하는 선언입니다.

욥이 심한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 나는 의로운 사람인데 왜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부르짖습니다.
욥에게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으로 알고 있는데 의로운 내가 이런 일을 겪는 것을 보니까 아닌가 보군요.’ 이렇게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욥을 이와 같이 강하게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북한 문제에 대해 같은 질문을 갖기 쉽습니다.
북한동포들의 어려운 모습을 알려주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 언제까지 이런 일이 계속되게 하시렵니까?’ 묻고 싶은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백성의 굶주림을 외면하는 북한통치계층의 행태를 보면서 분노 가운데서 같은 질문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우리를 분단 상태에 두시렵니까?’
‘이산가족들의 고통을 언제까지 방치하시렵니까?’
‘북한의 저 영적 진공상태를 언제까지 그대로 두시렵니까?’
‘우리 교회가 필리핀, 러시아,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몽골, 여러 나라에 단기선교 팀을 보내면서 왜 북한에는 전도 팀을 보낼 수 없는 것입니까?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나는 공의의 하나님이다!’
이 말은 ‘나는 공의의 원칙에 따라 이 문제를 진행하고 처리할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또 ‘나는 능력의 하나님이다!’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9절 앞부분을 보세요.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욥기 38장부터 42장까지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인데 그 핵심은 ‘나는 창조의 능력을 가진 하나님이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베헤못, 리워야단, 그것을 제어할 능력이 내게는 있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배에의 부름 순서 중에 읽어드린 말씀, 요한계시록 3장 7절을 보면 하나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자신을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올해 감리교 북한선교주일의 주제 ‘닫힌 문을 여시는 그리스도’가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북한복음화의 문, 열리지 않을 것 같고 열 사람이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공의의 열쇠를 가지고 그것을 여시는 능력을 가진 분입니다.

북한 권력층이 그것을 닫으려고 해도 요한계시록은 닫을 사람이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북한선교의 정문은 아직 닫혀 있습니다.
북한에 가서 직접적인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아직 전혀 가능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뒷문, 쪽문, 옆문은 열려 있습니다.
여러 가지 형태로 선교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북한을 방문했을 때도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를  선교적인 효과를 염두에 두었습니다.
이번에 다녀온 것은 한 NGO 단체에서 새로운 농사법을 지원하는 것을 확인하고 격려하기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농사법이 실시되고 있는 현장에서 북한농업성의 정책국장을 비롯해서 대남기구의 간부들, 현지의 농민들에게 ‘농사는 사람도 애써야 하지만 하늘이 지어주는 것인데, 하늘이 이 농사를 잘 지어주도록 열심히 기원하겠습니다.’ 여러 번 말했습니다.
그 분들, 다 머리를 끄덕입니다. 식량 문제가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하늘’은 ‘하나님’이고 ‘기원’은 ‘기도’이지요. 

단체로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는 감사기도를 여러 번 했습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한 일은 무조건 옳은 일이고 좋은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1981년 6월에 김성락이라는 재미동포 목사님이 북한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김일성이 이 분을 점심에 초대했는데 그 자리에서 김일성이 김성락 목사님에게 ‘선생은 목사이신데 식사하기 전에 기도를 하시지요.’ 해서 화제가 된 일이 있습니다.
이 일은 북한에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일을 내세우면서 식사 전에 될 수 있으면 감사기도를 하려고 했습니다.

같이 간 일행 가운데  서울신학대학에서 선교학을 강의하고 있는 박영환 교수님이 계셨는데 이 분이 급성 식중독에 걸렸습니다.
새벽에 구급차가 오고 야단이 났습니다.  덕분에 북한 병원 구경을 잘 할 수 있었습니다.
안내를 담당하고 있는 북측 요원들이 매우 당황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아픈 분의 두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끝내니까 박 교수님이 ‘기도할 때 이상하게 시원한 기운이 머리로부터 내려오면서 많이 진정되었습니다. 살 것 같습니다. 금방 낳을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 뒤에도 여러 번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 분도 북한선교에 많은 열심을 가지고 있는 분인데 주위의 북한사람들이 들으라고 일부러 강조해서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일, 저런 일을 통해서 선교가 조금씩 이뤄지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목사가 자신이 목사라는 것을 밝히면서 북한을 출입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선교행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북한은 이해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러나 북한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복한이 복음화 될 때까지 호소, 간구,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은 북한복음화 문제를 공의의 원칙에서 그의 무한하신 능력으로 이끌어나가실 것입니다.

공의와 능력의 하나님이 북한복음화를 위해 어떻게 역사하시나 기대하면서, 아니 지금 역사하시고 있는 것을 찾으면서 나도 무엇인가 한 가지 이상의 일을 해서 그 역사에 동참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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