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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유한 자의 복 (마 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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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성  경 : 마5 : 5 - 6절     
제  목 : 온유한 자의 복

삼성의 이건희 회장의 글에 보면
자기가 아버지 이 병철씨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 가운데
    가장 귀한 유산이 목계의 교훈이라고 합니다.
`木鷄란 나무로 만든 닭으로써
중국의 장자(莊子)의 달생(達生)편에 나오는 싸움닭 이야기입니다.
자신은 이 목계의 교훈을 자신의 경영철학에 담고 있다고 합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 기성자(紀省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는 일이 싸움닭 조련사로서 당대의 名人이었습니다.
당시 임금이 닭싸움을 좋아하여 그에게 닭 한 마리를 주며
    최고의 싸움닭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맡긴지 열흘이 지나자 신하를 보내어
“ 어떻게 되어갑니까? ”하고 묻자
“ 아직 멀었습니다. 너무 우쭐대기만 합니다 ” 라고 합니다.
또 열흘이 지났을 때 그 시종이 와서
“ 이제 좀 좋아졌겠지? ” 라고 물은 즉
“ 아직도 한참 멀었습니다. 다른 싸움닭을 보면 허둥대거든요 ”
또다시 열흘이 지나서 시종이
“ 이젠 어떤가? ” 하고 물었더니
“ 아직도 눈이 성을 내고 있어요 ” 라고 대답합니다.
그로부터 또 열흘이 지나 시종이 나타나자
“ 이제는 쓸 만해진 것 같습니다.
  다른 싸움닭이 싸움을 걸어도 허둥대지도 않고 가만히 보고 있으며
  꼭 나무로 깎아 만든 닭 같이 되었지요.
  그렇지만 이 닭은 다른 투계에게 보여주면
    아무리 센 닭도 금세 도망쳐 버리지요  ” 라며
그 닭을 넘겨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도 마음에 새기며 곧 잘 후배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목계의 교훈은 `칼은 들고 있되, 휘두르지 않고도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최선의 상책`이라는
손자병법의 `上之上(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의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보훈 
어찌 장자의 목계나 손자병법의 상지상으로 비유가 되겠습니까만
바로 싸우지도 않고 이기는 하나님의 방법을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산상수훈 서론의 8복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세상의 도덕과 반대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자는 이용만 당하고, 사람들에게 바보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 이 사회의 도덕을 지배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며 남에게 짓밟히지 않기 위해서는
    남을 짓밟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된 삶을 누리며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뒤집어 놓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팔복의 세 번째로 5절에
          [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 라고 합니다.
나는 온유한 자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 나는 온유한 자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5절)
우리는 `온유`를 떠올릴 때 얼핏 `연약함`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아도 `온유`란
  `따듯하고 부드러움`, 혹은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온유`란 어떤 강인한 이미지보다는
      연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갖게 합니다.
그러나 온유란?  `나약함`이나 `무기력`
    혹은 `우유부단함`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온유란 강하면서도 부드러움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고 하는 것이 더 바른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렉산더 맥클라렌>이란 학자는
`온유함이란 폭풍 앞의 갈대처럼 어떤 반대 앞에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고         
순응하는 마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온유란  `부드러운 거인`(gentle giant),
                `스펀지 마음`등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세상적으로 `온유`에 대해 가장 많은 글을 쓴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너무 넘치거나 너무 모자라지 않는 중용을 `온유`라고 정의했습니다.
온유란?  두 극단 사이의 중용의 덕이란 것입니다.
이런 정의들은 어디까지이나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온유입니다.
오늘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을 바로 이해하려면
    두 가지 측면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온유이고 둘째는 사람을 향한 온유입니다.
사람을 향한 온유의 경우는 중용의 덕이라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온유는 다른 뜻의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8복에서 말하는 온유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의 온유를 다 내포하지만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의 온유가 되어져야만
      사람과의 관계의 온유가 이뤄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 앞에 온유한 자가 먼저 되라고 합니다.
2. 왜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실까요?(5절)
5절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
온유하다란 말 <프라오스>는
[ 하나의 힘이 잘 조화되어 그것이 인격에 나타나는 덕성 ] 을 말합니다.
칼빈(Calvin)은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 하며 절제할 수 있는것`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생래적인 기질로서는 이러한 절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하나님의 힘이 잘 조화되어야만
      즉 성령의 은혜로 가능한 자기 절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 받아야 온유한 자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를 통해 뜻을 나타내십니다.
예를 들어 모세에 대해서
민12:3절 [ 이 시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니라. ]
왜 모세를 가리켜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합니까?
구약에 하나님께서
    선지자(先知者)들에게 말씀하실 때는 꿈이나 이상으로 말씀하셨지만     
모세와는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 앞에 가장 충성된 일군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온유란 결코 연약한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약해진 것입니다.
가장 온유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왜냐하면 사53:2절에
[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
  라고 합니다.
연한 순,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얼마나 연약하게 보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서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시며
빌2:11절에 [ 모든 무릎이 그 이름 앞에 꿇는다 ]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는 연약한 모습 같지만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온유의 실제 증상을 살펴보면                     
1) 고열 환자가 의사의 처방에 의해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옴을 말합니다.
  그러니 마음의 열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열 받지 아니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2) 뜨거운 태양 볕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는데
      어디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시원함을 느끼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 자기가 안정된 상태를 말합니다.
3) 짐승의 잘 길들려진 상태, 훈련된 기질을 말합니다.
  목적을 위하여 잘 사용되도록 훈련된 인격의 상태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어떤 경우에도 열 받지 아니하고 안정되어
          하나님 말씀에 잘 길들려진 사람을 말합니다.
가장 온유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마11:29절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와서 배우라 ] 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온유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을 닮은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온유하게 하는 두가지 방법이 있읍니다.
1) 우리를 난처한 환경 속에 몰아넣고 훈련시키십니다.
모세가 지상에서 최고로 온유한 사람이었지만
모세의 이런 온유함은 처음부터 지녔던 성품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좌절과 시련과 성숙을 거쳐 도달한 성품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성품이 온유하지 못함을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온갖 시련과 역경 속에서
      모세의 경우와 같이 시련을 극복하여
          온유함으로 나아가지 못함을 탓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그런 시련을 거쳐 온유함을 체득하게 하여
      그에 대한 보상으로 땅의 주인이 되게 하십니다.
        역사를 이끌어 가는 주체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참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2)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가 온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통해 성령의 은혜로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는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제어하려면 우리보다 강한 어떤 힘과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우리보다 강한 힘과 능력이 무엇이냐?
그것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심령 가운데 역사하사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새롭게 해주셔야 자신을 조종하고 컨트롤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를 통하여 뜻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를 들어 쓰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잘 훈련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성령의 충만한 사람 - 가장 온유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칼 바르트는 성령충만이란?
      하나님 앞에 어떤 경우에도 예, 만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럼 온유한 자가 누리는 복이 무엇입니까?               
3. 온유한 자가 누리는 복이 무엇입니까?(5절)
5절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
온유한 자가 자족하는 마음으로 평화를 누리고,
        영적인 복을 받는다면 몰라도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고 물질적인 복을 누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동의하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은 경우가 있는지 성경에서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창세기 13장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이
    땅 문제로 다투고 헤어진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자기 아들처럼 기르고 돌봤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장성한 후에도 가축을 치면서 한집에서 같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롯의 가축의 숫자가 늘어나고,
    목축의 규모가 커지자, 방목하던 땅이 좁고 협소해졌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 목자와 롯의 목자가 날마다 다투고 싸웠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헤어지기로 마음먹고 롯을 불러 말했습니다.
[ 우리는 한 골육이다,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 네가 마음에 드는 땅을 차지하라,
  네가 우(右)하면 나는 좌(左)하고,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리라 ]
아브라함은 당시 족장사회에서 족장으로서
  모든 일을 결정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먼저 땅을 선택하도록 양보했습니다.
조카 롯은 너무도 탐욕적이고 세속적인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욕심대로 물이 넉넉한 `요단` 들녘을 바라보며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하여 떠나갔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그대로 머물렀습니다. 아브라함이 손해를 본 것입니다.
두 사람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탐욕스런 인간 롯은 멸망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로 땅을 넓혀 갔습니다.
그러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롯도 함께 멸망했습니다.
반면에 롯에게 양보하고 가나안에 머문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차지했던 것입니다.
결국 땅을 차지한 사람은 온유한 사람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온유한 자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십니다.       
간디가 `비폭력 저항 운동`을 전개할 당시 어려웠던 점은
      자기 목숨을 기꺼이 포기하면서까지
      폭력적으로 투쟁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었습니다.
간디는 불의에 대해 온유함으로 투쟁하는 것이
    오히려 더욱 큰 `용기`를 요구한다고 말합니다.

간디의 전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종차별이 심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어느 도시에서
  간디와 그를 도우러 온 장로교 선교사 찰리가 함께 길을 걷습니다.
갑자기 불량배들이 두 사람의 길을 가로막습니다.
찰리 목사는 도망갈 궁리를 합니다.
이 때, 간디는 `신약성경에 원수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라고
          하지 않았던가요?`라고 묻습니다.
찰리가 그건 비유적인 표현일 뿐이라고 말하자,
간디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이 용기를 보여야 한다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때리는 사람을 향해 기꺼이 한 대, 아니 여러 번이라도 얻어맞을 용기 말입니다.
그렇게 행동한다면 인간 본연의 성품에서 미움이 줄어들고
            대신 존경심을 키우는 무언가를 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걸 찾아냈던 것 같아요.
            나도 그 무언가가 살아 움직이는 걸 보았습니다.`
결국 영국은 간디의 `온유함` 앞에 두 손을 들었습니다.
물론 간디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가르침,
    특히 산상수훈을 도덕적 차원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삶 속에 실천한 인물이었습니다.
훗날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을
미국 땅에 그대로 적용한 인물이 바로 <마틴 루터 킹> 목사입니다.
이 `온유한 투쟁`을 통해 간디는 인도의 땅을 돌려받았습니다.
또한 킹 목사와 흑인들은 미국 땅을 차지했습니다.
저는 개척교회를 하면서 교회당 지을 땅에 대해 관심을 갖다보니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말이 내 가슴에 새겨진 구절입니다.
<시37편>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 온유한 자, 복을 받은 자, 의인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건 유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 강원도만한 좁은 팔레스틴 지방에서 땅이라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나 한국 사람이나 성격이 급합니다.
왜? 좁은 땅에 살다보니 늦게 일어나면 다른 사람들이 다 차지해 버리고
  내가 설 땅에 없습니다. 그러니 새치기라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공평하게 여호수아를 통해서
    땅을 줄로 재어서 기업으로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눈을 뜨고 보니 보이는 땅보다 더 값진 땅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라고 할 때 한반도를 말하지만
    그러나 대한민국 통치권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다스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딤후2:12절 너희가 참으면 또한 주님과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

지질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이 지구에 존재하기 전에
  파충류에 속하는 맘모스와 공룡 같은 큰 짐승들이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짐승들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멸종되어 뼈만 여기저기에서 발견될 뿐입니다.
그래서 뉴욕 박물관에 가 보면 옛날의 큰 공룡의 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약하게 보이던 짐승들이
    지금까지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말이
    얼른 듣기에는 마음 가운데 들어오지 않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 원리를 여러 방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히틀러, 뭇솔리니, 스탈린도 폭력으로는 세계를 끝까지 점령하지는 못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세계를 점령한 것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온유한 자가 다스리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팔복의 네 번 째는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합니까?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6절)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주림과 목마름은 인간의 가장 절실하고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대상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림과 목마름의 대상을 양식과 물이 아니라
    의에 대한 목마름과 주림으로 바꾸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먹고 마시는 문제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 바로 의 임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뭔가에 주려 있습니다.
사람의 창찬과 인정에 목말라 하는 사람, 사랑에 목마른 사람,
    돈에 주리고 권력에 목말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4장에 다섯 남편과 살아보았지마는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은
      채워도, 채워도 채울 수 없는 목마름 가운데 방황했던 영혼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오직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만이 배부름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만족을 얻고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의가 무엇입니까?
1) 일상적인 뜻에서는 올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의는 바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는 먹고 마시는 문제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데 더 목말라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롬3: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이 가장 큰 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바로 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하여 목말라 해야 합니다.
즉 예수님 자신을 목말라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자를 목말라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의 일을 목말라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은
      주님과 주의 일에 목말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주님과 주의 일에 목마른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배부르게 해 주면 의롭게 살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복을 주시면 의롭게 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배부름을 주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이 모든 것을 더해주신다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의에 목마르고 주린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의를 찾는 방법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에 대한 목마름 기도에 대한 열망                   
    이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특징입니다.
나는 지금 얼마나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입니까?
그것은 내가 지금 얼마나 말씀을 사모하고                 
    은혜를 사모하여 기도하는가로 점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 속에서 자신을 보여주시고 기도할 때 만나주십니다.
이처럼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주님을 찾고 만나기를 목말라하는 자에게
복이 있도다!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느냐?` `Yes!`
이 한마디 때문에 순교자가 된 17세의 소녀가 있습니다.
1999년 4월 20일, 15명의 생명을 앗아간
      미국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 때 일입니다.
소위 `사탄주의`를 추종하는 살인자 앞에서
    <캐시 버널> 양이 담대하게 외친 짧은 신앙고백입니다.
그녀의 순교가 더욱 빛을 발한 이유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녀 자신이 자신을 죽인 그 살인자들과 비슷한 악의 세계에서
    방황하고 있었던 문제아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2년 전, 우연히 교회 수련회에 참석했다가 거듭나는 체험을 합니다.
이후 그녀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사고가 있던 날 아침에 캐시는 아만다라는 친구에게
    이런 내용의 쪽지를 건네주었습니다.
` 나는 오로지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어. 진심이야.
  힘들고 두렵겠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
캐시의 죽음은 미국 사회 청소년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녀의 순교를 주제로 한 책과 영상물,
              심지어 노래까지 작곡되었습니다.
또한 수많은 소위 `문제아`들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캐시가 순교한 바로 그 주일, 그녀의 담임 목사인
    다베(Dave) 목사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캐시의 4월 20일의 `yes`만을 주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가 그 마지막 대답을 하기 전
    날마다, 매번 대답했을 `yes`를 주목해야만 합니다.`
그래요 어느 날 갑자기 예스 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가
    결정적인 순간에도 예스 라고 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러면 날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누리는 복이 무엇입니까? 
5.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누리는 복이 무엇입니까?(6절)
6절에 [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합니다.
배부르다는 말은 다른 것이 필요없다는 말입니다.
즉 이 말은                                 
1. 하나님으로 충만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로 충만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다른 것은 필요없읍니다.
유명한 설교자 <로이드 존스>는
눅15장 탕자의 비유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이 조금 배고프면 돼지우리를 찾지만 정말 배고프면 아버지를 찾는다]
배부름을 얻기를 원한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

2. 우리에게 주의 형상을 닮아가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영적 배부름입니다.
다윗이 고백합니다.
시17:15절 [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
우리가 언제 영적인 배부름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까?
내 속에 하나님의 거룩으로 채워져 주님의 형상을 닮아갈 때
  성도는 거기에서 삶의 의미를 갖게 되고
        참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3) 배부르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보상에 대하여
마6:33에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모든 것`은
마6장의 흐름을 볼 때 육신에 필요한 것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영적인 것에 충실하면 육적인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책임지시겠다는 말씀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본문에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배부름의 보상을 주십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며 특히 신자는 거듭난 영을 가졌기 때문에
    영적 만족감이 없이는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적 만족감으로 채워질 때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 되는 것입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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