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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들 (시 50: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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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돌이 나타나면 약자는 그것을 걸림돌이라고 하고 강자는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말합니다. 토마스 카알라일의 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수많은 삶의 돌을 만납니다. 그때마다 그 돌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집니다. 그 돌은 어떤 사람은 걸림돌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디딤돌이라고 말합니다. 삶에서 오는 모든 장애를 불평과 원망의 눈으로 보는 것과 또 그것을 발판으로 재기와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 것과는 분명 큰 차이가 있을 겁니다. 오늘도 장애의 요소와 같은 돌을 곳곳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런 돌들은 생활에 무수히 널려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깔려있는 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자세입니다.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전기를 쓴 작가가 아프리카를 여행하며 그가 사역했던 곳들에서 사람들을 만나 그가 거기서 무슨 설교를 했는지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가가 가장 많이 들었던 대답은 하나였습니다. "우리는 그가 무슨 설교를 했는지,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는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 우리 교회의 모습이 될 수 없을까요? 요리문답 1조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인데, 대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네가 나를 높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욕하거나 경멸하면 부모와 자녀 모두가 불행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거나 불평 불만하게 된다면 참으로 추한 모습입니다. 성도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높이고 존경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쁨으로 영화롭게 할 때 하나님과 인간이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모두가 놀랄만한 엄청난 규모나 숫자는 아니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성도들로 가득찬 아름답고 행복한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감사하는 사람
  본문 14절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감사가 없는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이런 제사는 제물이 아무리 많고 사람들이 오랜 시간 제사를 드린다 하여도 아무것도 아닌 무용지물입니다. 아무 소용없는 헛수고입니다. 감사가 없는 제사는 하나님을 아프고 슬프게 합니다. 결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감사 없는 음식을 취하시는 분이 아니라 음식에 포함된 감사를 취하시는 분이십니다. 지극히 작은 돈과 떡이라 하더라도 감사가 들어 있으면 가장 크고 많은 것으로 받으시고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땅이나 건물이나 돈 몇 푼이 부족해서 헐떡거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한국의 재벌에게 물질이나 돈 몇 푼 준다고 그들이 감지덕지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감사가 가득한 제사입니다.

  다윗은 전쟁 전이나 후에도 결코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남이 쉽게 이루지 못한 일을 이룬 사람은 그 일을 이룬 후에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 쉽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골리앗을 물리치고 난 다음, 사울과 이스라엘의 장군들 앞에서 보란 듯이 이런 비난의 소리를 퍼붓지 않았을까요?
  "당신들, 장군 맞아? 멍군 아니야? 당신이 왕이 맞아?"
  "돌멩이로 골리앗을 물리쳤는데, 당신들은 칼 들고 뭐하는 거요? 갑옷이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일을 이루고 난 다음에도 이런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승리 이후에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충성스러운 종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10)

  자기부인(自己否認) 없는 승리는 후에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승리한 사람일수록 말을 아껴야 합니다. 사명이 있으면 그냥 감당합시다. 그리고 말을 아낍시다. 말이라고 다해서는 안 됩니다. 함부로 말하는 것은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잘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싸우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군끼리 싸우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싸움은 마귀를 멸하는 싸움이 되어야지 우군끼리 충돌하는 싸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연약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꾸 같은 편끼리 싸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유혹은 싸움 전에도 있고, 싸움 후에도 있습니다.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기 전에 다윗의 장형(長兄) 엘리압은 다윗을 비난했습니다.

  "장형 엘리압이 다윗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삼상17:28)

  엘리압의 말은 비합리적이고 무고한 비난이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누구나 당연히 화가 치밀어 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엘리압에게 분노하지 않고 골리앗에게 집중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할 때면 항상 이런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유 없이 비난하고, 이유 없이 음해하는 사람, 그래서 한 번 싸워보고 싶을 만큼 분노를 유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큰형 엘리압과 싸워서 이겼다고 칩시다. 거기에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막내 동생이 큰형을 때려눕혔다고 하면 누가 잘했다고 하겠습니까? 싸움에 져도 낭패는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압과의 싸움은 이기든 지든 의미가 없는 싸움입니다. 이런 의미 없는 싸움은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다윗은 엘리압과 싸우지 않고 골리앗에게 집중하여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엘리압'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라는 매우 좋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압이라는 이름은 다윗 이후 성경에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사건이 너무나 유명한 사건이 되어 이후 사람들이 다윗을 비난한 엘리압을 수치스러운 이름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리압은 그렇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싸우기 전에 기분 나쁜 상대가 나타나면 항상 스스로에게 물읍시다.
  '이 사람이 엘리압인가? 골리앗인가?'
  엘리압이라면 절대 싸워서는 안 됩니다. 반면에 골리앗이라면 하나님의 능력을 붙들고,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엘리압과 같은 음해, 분노, 불평, 원망을 다 버립시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다윗처럼 골리앗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목숨을 내놓고 충성하는 감사의 삶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서원을 갚는 사람
  본문 14절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14절 하반절에 "네 서원을 갚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가장 높으신 분께 네가 서약한 것을 갚아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엄숙한 약속을 이행하는 것은 제사의 핵심입니다. 아무리 거창한 제물과 많은 말을 하였어도 제사를 드린 후에 아무것도 이행치 아니한다면 헛된 제사가 되고 결코 그 제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도 서약을 지킵니다. 정치인들도 공약을 지키려고 노력을 합니다. 인격적인 사람들은 약속을 지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잘 지켜야 합니다. '서원'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사기 11장에 입다라는 사사입니다. 암몬족속과 싸우러 나갈 때 "입다는 여호와께 한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제가 암몬 사람들을 물리치도록 해 주시면 저는 여호와께 태워드리는 제물인 번제물을 바치겠습니다. 제가 승리를 거두고 돌아올 때, 제 집에서 저를 맞으러 나오는 첫 번째 사람을 여호와께 바치겠습니다. 번제로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습니다"(삿11:30-31). 그런데 입다의 무남독녀가 소고를 치고 춤을 추며 입다를 맞이하였으므로 두 달 후에 번제로 드렸던 것입니다. 서원은 신중하게 해야 하며 서원한 것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켜야 합니다. 구약적은 공포심을 버리시고 신약시대와 은혜의 시대에 사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최대의 저주는 이제 더 이상 가치 없는 인생, 쓸모 없는 인생이 되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어느 가정에 부부가 심한 부부싸움을 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기 직전까지 간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결정적인 동기가 부부싸움을 하다가 남편이 무심코 던진 한 마디가 '너 필요 없어, 나가!'라는 말이었습니다.
  "내가 필요 없다고? 너 유학 와서 공부하는 동안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애 낳고 기르고, 이제 학위 마치고 겨우 직장 구하여 자리 잡을 때까지 뒷바라지했는데 이제 살 만하게 되니까, 그래 내가 필요 없다고?"
  "필요 없어"라는 말 한마디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의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린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더 이상 인생을 지속할 열정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망가져도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자아성찰의 능력만 있으면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 최후의 비극은 자신을 돌아볼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하면 자신과 남과 하나님을 모릅니다. 서원도 약속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헌신짝 버리듯 함부로 버립니다. 약속과 서원을 파괴하는 사람은 어디서든지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과 교회 앞에서 신중하게 서원을 하고 서원한 것을 갚는 성도는 하나님의 축복을 반드시 받게 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가 됩니다.

3. 기도하는 사람
  본문 15절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새번역에는 "어려울 때에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너를 건지겠고 그러면 네가 나를 높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감사와 서원제를 드리라고 명령한 직후 하나님께서는 환난 날에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마음을 동반한 진정한 희생 제사와 서원제를 드린 자가 갖는 증표는 환난 날에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성도의 의무와 특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성도는 환난의 때에 그 환난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자가 하나님 한 분뿐인 것을 확신하고 하나님께만 의지합니다. 하나님 아니면 말고나 또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까의 다원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께만 기도하는 성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하나님께만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존경하고 찬양하는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하나님께만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받게 됩니다. 기도의 사람을 사탄은 두려워하고 도망가게 됩니다. 기도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기도 없이 되는 모든 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쉽게 무너지고 사탄의 도구로 전락됩니다. 그것 때문에 무너지고 실패합니다.

  기도는 모든 것을 'Change', 바꿀 수 있는 능력입니다. 슬픔이 다 떠나가고, 저주가 다 떠나가고, 병마가 떠나가기 때문에 삶이 바뀌게 됩니다. 얼굴과 마음이 바뀌는 것입니다. 사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잘못된 길에서 바뀌는 것입니다. 좋은 것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당신의 영혼에, 당신의 삶에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시는 새로운 삶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여리고 성도 새벽에 무너졌습니다. 기도하면 무너집니다. 내 모든 대적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어두움의 세력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새벽은 생명의 시간입니다. 새벽은 어두움이 물러가는 시간입니다. 빛이 동녘에서부터 떠오르는 것입니다. 나를 향하여 비추는 하나님의 빛이 나를 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새벽기도하면 하루가 환해집니다. 새벽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빛이 그를 비추어 줍니다.

  새벽기도를 잘 못 드리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이유가 있습니다. 직장을 다닌다거나, 체질상 잠이 많다거나, 저녁형 인간이거나 등등 물론 타고난 체질을 임의대로 억지로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새벽에 활동하기 어려운 타고난 체질이라고 하면 저녁에라도 기도하면 됩니다. 어차피 기도한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어느 시간이고 당신은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벽기도야말로 하루 중 기도하는 데 있어 골든타임이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의지적으로 일찍 자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은 일찍 자야 일찍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장이든, 부하 직원이든, 권세 있는 자든, 권력 없는 자든 모든 사람은 일찍 자야 일찍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주님을 만나겠다는 마음을 품고 잠자리에 들어보십시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말입니다. 새벽기도를 실제로 참석하려면 이렇게 다짐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일은 나가지 말자. 오늘만 나가자! 내일은 살아봐야 아는 것이다. 자고 나봐야 아는 것이다. 내일이 있는 걸 어떻게 아는가. 그러니까 딱 오늘만 나가자. 오늘만!" '오늘은 관두고, 내일 나가봐야겠다. 하루 미뤄도 되겠지'하는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내일은 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릅니다. 내일은 하나님의 시간일 뿐, 우리들의 시간은 아닙니다. 오늘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새벽기도에 대해 스스로가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새벽시간은 너무 기쁘고, 너무 즐겁고, 너무 자유로운 시간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마음일 때 새벽기도가 살아날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기도하는 성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어느덧 더위와 휴가도 거의 지나갔습니다. 지금부터는 감사하고 서원을 갚고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 이 시대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존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김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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