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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삶(1) :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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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뱀같은 지혜로움과 비둘기 같은 순결함이 필요합니다.
오늘 성경을 살펴보게 되면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세상의 복음을 전파하러 보내시면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처음 사용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당시 유대인 사이의 격언으로 사용되는 문구입니다. 즉 유대인들에게 전승되는 미드랏이란 것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내게 대해서는 비둘기 같이 순결하지만 이교도에 대해서는 뱀같이 지혜로우라 말씀하십니다. 즉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격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인용하셔서 너희가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는 과정 속에 지혜롭게 대처하고 그러나 순결함을 잃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복음 전파의 승리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둘기 같이 거짓이 없고 순수와 순결함을 지키되 이 세상 속에 산다는 것은 우리의 부패나 방탕함과 교활함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는 지혜로우나 교활하지 말고 순박함으로 말미암아 그 지혜가 아름답게 살아 역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좀 더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오늘 성경을 읽으면서 먼저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뱀같은 지혜로움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뱀이라는 내용은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어감이 매우 부정적입니다. 느낌도 좋지 않고 창세기 3장 1절을 보면 뱀은 교활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뱀은 교활할 뿐 아니라 또한 지혜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애굽 사람들은 뱀을 그들의 상용 문자에서 지혜의 상징으로 나타내었습니다. 주님께서 뱀의 지혜를 말씀하신 것은 무엇보다 뱀은 자기에게 닥쳐오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조심성 있게 대처하여서 그 어려움을 모면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동물 중에서도 자기에게 닥쳐오는 어려움을 가장 잘 파악하고 신속하게 기술적으로 회피하는 동물이 뱀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옛말에도 집을 지키던 뱀이 집을 떠나면 그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뱀은 다른 동물들에 대해서 자연의 재해나 재앙에 대해 비교적 동물적 감각이 더욱더 발달되었기 때문에 빨리 체득하고 둥지에서 속히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반복되다보니 뱀이 그 집에서 나가게 될 때 그 집안에서 어떤 재앙이 닥치게 되는 것을 보고 뱀이 그 집을 떠나면 그 집안이 망한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어려움을 빨리 예견하여 회피하는 능력을 뱀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 제자들의 목숨을 노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방해하는 자들의 이와 같은 위협과 그리고 협박에 대하여서 지혜와 분별력과 경계심이 필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누가 해코지를 하거나 해를 끼칠 것을 미리 알아차려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 그리고 교회를 해하려는 무리로 말미암아 결코 해를 당하지 않는 지혜로움의 힘을 가져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 스스로 문제를 발생시켜서는 안 되고 복음을 전하는데 가장 효과적일 수 있도록 자신을 절제함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집중해서 가장 귀한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자의 중요한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전투의 장면을 여러 가지로 확장해서 전선을 넓혀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선을 좁혀서 돌파해야 전선을 최소한 좁혀서 헤쳐 나가는 것입니다. 집중해서 좁혀진 전선을 돌파해 감으로 말미암아 앞을 향하여 진군해 나가는 지혜로운 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뱀이 지혜롭다는 것은 신중한 분별력을 말씀합니다. 뱀의 지혜로움은 모든 사리를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리를 잘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이것이 옳다 이것이 틀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확한 논리나 근거에 의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지는 유익과 관련하여서 유익할 때 좋다 유익하지 못하면 나쁘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와는 다릅니다. 진리는 내게 유익하고 유익하지 않고에 따라서 결정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올바른 판단력으로 사리를 분별하려면 이와 같은 사욕과 사심에서 벗어나 바른 판단의 기준을 설정해야 합니다. 올바른 사리를 분별하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판단의 근거와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 부족을 인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바른 길을 갈 수 있는 가능성의 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그릇밖에 품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내 그릇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 있을 때 내 그릇의 한계를 벗어난다고 해서 그것이 틀렸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내가 내 그릇을 깨뜨릴 수 있을 때 나는 내 한계를 넓힐 수 있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더 넓은 판단기준의 근거를 확보하여 더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파옹구우라는 말을 합니다. 중국에는 한발의 피해가 심해서 비가 올 때 큰 독에다 물을 받아놓고 그 독에 있는 물을 사용하곤 합니다. 얼마 전에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에도 거기도 날씨가 가물 때가 많아서 물을 받아두는 큰 독이 집집마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도 그나마 부유한 가정이 그런 것이고 그것도 마련하지 못한 가난한 가정에서는 물을 웅덩이에 모아두고 사용하는 참 안타까운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지나가다가 일이 있어서 들린 적이 있는데 거기에 있는 분이 큰 독에서 물을 퍼서 옷을 입은 채로 물을 몸에 물을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저것이 무엇을 하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목욕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특별한 목욕시설도 없고 하니까 그 큰 독에다 빗물을 받아놓고 그물을 가지고 옷을 입은 채로 물을 끼얹고 그것을 목욕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좀 나은 집은 큰 독이 있어서 거기에다 물을 받아서 사용을 하곤 했는데 중국에도 한발의 피해가 크니까 이와 같이 물을 받아놓고 노는데 어린아이들이 놀다가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큰 독에 빠졌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가 죽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허우적거리자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친구들이 난리를 치고 소리를 지르고 그렇지만 조금 있으면 아이는 죽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마천이라는 소년이 돌멩이를 던져서 독을 깨뜨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지요? 독이 쨍그랑 깨지면서 물일 쏟아져 내리니까 그 친구가 살아난 것입니다. 다른 친구들은 그 독을 깨뜨릴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리고 친구가 죽는다고 난리를 치고 아우성만 쳤지만 독을 깨뜨릴 생각을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마천이라는 아이는 지혜가 있어서 돌멩이를 가지고 그 독을 깨뜨렸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독은 깨졌지만 사람이 산 것입니다. 그래서 파옹구우 독을 깨뜨려서 친구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이와 같이 내 자신의 한계를 깨뜨리지 못하면 우리는 그 가운데 안타깝게 발버둥쳐도 영원히 우리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더 큰 지혜 더 큰 은혜 더 큰 축복을 위해서 우리 자신이라는 한계의 재앙을 깨뜨려야만 합니다. 내 삶의 체계 내 삶의 경험의 유혹 내 삶의 모든 것을 깨뜨리는 이와 같은 일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더 넓은 세계를 포용하고 깨달을 수 있고 은혜가운데 주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그릇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 때 바른 판단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뱀의 지혜를 생각할 때 중요한 것은 예견 통찰력입니다. 주어진 모든 상황을 분석하고 그것을 통하여서 앞을 바라보는 예견력과 통찰력입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지혜는 통찰력입니다. 앞으로 될 일을 바라보고 될 일을 예견하며 그것을 준비하는 예견 통찰력입니다.

성경에는 기드온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미디안의 대군이 바닷가의 모래처럼 무수히 그들에게 쳐들어 왔지만 기드온은 3만2천명의 사람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다 보내고 3백 명만 남겼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횃불과 항아리와 나팔을 가지고 전쟁터에 나갔던 것입니다. 여기서 기드온이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이 전쟁의 본질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달려드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 승리의 관건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떤 한 가지 사실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풀리는 것을 우리는 본질이라고 합니다. 오늘 기드온은 깨달은 본질이 무엇이냐 하면 전쟁의 승리의 본질은 숫자가 많음에 있거나 병기의 강함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승리의 뜻에 있음을 깨닫고 그는 하나님의 승리의 뜻을 본질로 삼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을 이루는 것이 승리의 본질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의 열두 정탐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과 우리를 비교하면 우리는 메뚜기 같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메뚜기 같다는 생각이 본질이 아니라 그들은 장대하고 우리는 메뚜기 같지만 그것의 본질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로 들이시리라는 것이 본질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이라는 사실이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호수아와 갈렙 특별히 하나님의 본질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가나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가나안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본질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통찰력이라는 것은 현재 상황 속에서 무엇이 어떻게 될까를 파악하여 바르게 예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파악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이세상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를 파악하면 세상이 움직이는 본질을 파악할 수 있고 그 본질을 따라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고 그것을 순종할 수 있는 뜨거운 심정과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의 열정이 포함되어져 있어야 합니다. 현재는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에 의하여 주도되어 집니다. 앞을 바라보는 사람은 현재를 주도할 수 있습니다. 현재를 주도하되 앞을 바라보는 사람은 지속적으로 그에게 주어지는 삶을 주도할 수 있습니다. 뱀의 지혜라는 것을 바로 이런 것입니다. 현재를 파악하여 앞을 내다보고 통찰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하여서 어려움을 회피하고 그것을 통하여서 바른 분별을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뱀같이 지혜로우라는 것은 냉철함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뜨거운 열정과 냉철함이라는 그 두가지 사실이 동시에 주어져야 합니다.

리더십이라는 것을 우리는 자주 이야기 합니다. 리더십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영향력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던 악한 영향력을 끼치던 우리는 영향력을 끼치고 사는데 우리가 바른 리더십을 발휘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지도력의 두 가지 특징을 열정과 냉쳘함입니다. 우리는 열정은 있으되 냉철함속에서 절제함을 가지고 주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의 가장 중요한 본질가운데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바로 절제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가 성령충만했습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가 너무 가슴이 뜨거워서 두 시간 설교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지요? 난리가 나는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4부예배 올 사람들이 다 자동차 타고 오는데 여기 자동차가 하나도 비지 않고 다 그대로 있으면 어디에 주차를 합니까? 그래서 이 주변에서 서성거리다 보면 이 주변이 굉장히 길이 막히게 되고 사람들이 신고해서 경찰서에서 오게 되고 얼마나 복잡해지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성령 충만해도 절제가 없다면 그것은 성령 충만이 아닌 것입니다. 성령 충만의 가장 중요한 본질중의 하나는 바로 절제함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주의 역사를 이룬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절제함이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충만해서 100일 동안 금식해서 기도했다고 합시다. 어떻게 되지요? 여러분 죽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혜와 은혜를 가지되 그것을 규모 있고 절제 있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혜가 있고 순박하게 그것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뱀과 같은 지혜라는 것은 분별의 능력, 절제하는 능력, 그리고 예견하는 통찰하는 능력, 현재를 분석하여 파악하여 그것을 가지고 예지하는 모든 능력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아가면서 뱀과 같은 지혜를 발휘하는데 제가 이 절제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늘 부끄러울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전에 음악잡지를 봤는데 10년을 구독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음악을 연주할 줄은 몰라도 말로 하는 음악은 상당히 할 수 있습니다. 이름이나 곡이나 아니면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지식은 있습니다. 그래서 전에 어떤 음악을 하는 분과 이야기를 한참하다 보니까 주도권을 제가 가지고 모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음악사나 연주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요. 그래서 그 분이 저에게 목사님 음악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알고 계시네요.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 순간 제가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저를 향한 욕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전공을 한 분이고 저는 전공을 하지 않았는데 저는 제가 아는 이야기 100%를 한 것이고 그분은 아는 것의 10%로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아는 척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창피했겠습니까? 여러분 대부분 한참 떠드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은 알고 있는 것이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별거 아닙니다. 그런데 대부분을 보면 그것을 듣고 있는 것은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주로 무지한 사람이고 듣고 있는 사람이 주로 많이 알고 있는 경우를 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원래 모든 면에 있어서 좀 자신이 어렵다고 생각하면 나타나는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첫째 말이 많아집니다. 둘째는 말이 세집니다. 셋째는 목소리가 커집니다. 우리는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리가 사람을 만들까요? 사람이 자리를 만들까요?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자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실력이 없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으면 그 자리는 망가집니다. 아무리 자리가 허술해도 능력이 있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으면 그 자리가 가장 빛나는 자리가 됩니다. 제가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화려한 함이 보석함이 아니라 보석이 들어있는 상자가 보석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냉철한 이지를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은혜의 뜻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뜨거운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 열정이 냉철한 이지에 의해서 지혜롭게 조절될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16장 19절을 보면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한번 따라합시다.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라” 고린도전서 14장 20절을 보면 “지혜에는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일은 어린아이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악한 일에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뱀과 같은 지혜라는 것은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닥칠 것을 생각하여 화를 자처하지 않고 지혜를 발휘하여 갈 곳까지 가고 행할 것을 행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상교회는 전투적인 교회입니다. 사무엘상 17장 35절을 보면 다윗이 “내가 따라가서 사자와 곰을 치고 그 위험에서 내 양을 구해냈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사단의 세력과 싸워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단의 술책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25절을 보면 “사람들이 잘 때에 원수가 와서 곡식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세상에 사는 성도들의 삶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어느 날 원수가 와서 사단이 와서 가라지를 뿌리고 갑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에 쓸데없는 의심이 생기고 쓸데없는 고통이 생기고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쓸데없는 고통이 생기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분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사단이 하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전투적인 교회, 전투적인 성도가 되어 우리 자신의 마음에 일어나는 이와 같은 사단이 뿌린 가라지를 뽑아내는 이와 같은 역사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에게서 전투성이 상실되면 우리는 사단에게 종노릇하는 끌려 다니는 사람이 될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가 과연 알곡일까? 가라지일까? 양일까? 염소일까? 하는 것들을 우리는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를 쓰는 믿음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알곡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양과 염소가 같이 존속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뱀에게 있어서 가장 지혜로운 것은 분별하는 능력, 절제하는 능력, 예견 통찰하는 능력, 냉철하게 결정하는 능력, 이런 것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사역을 감당해야합니다.

여러분 요즘 일본의 한 기업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받은 세 가지 은혜가 있다. 이 사람은 예수 믿은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받은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나는 집이 가난해서 어렸을 때부터 어려운 일을 많이 했고 세상의 경험을 많이 해서 이와 같이 훌륭한 일을 많이 했다. 두 번째는 나는 몸이 약해서 늘 운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몸이 약해서 운동을 해서 건강해졌다. 세 번째는 나는 초등학교까지밖에 나오지 못해서 나는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내 선생님으로 여기고 늘 배우는데 힘썼다. 이 세 가지가 나에게 있어서 큰 은혜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읽었습니다. 여러분들 정말 어찌 생각해보면 이 세 가지 조건이 가장 불행한 최악의 조건입니다. 정말 집이 가난해서 어렸을 때부터 남의 집에 고용살이로 일을 해야 했고, 몸이 약해서 늘 아픈 몸을 가지고 버티며 살아야 했고 또 뿐만 아니라 배운 것이 없어서 늘 어려움을 겪는데 그것을 오히려 자기에게 있어서 강점으로 삼는 것입니다. 가난해서 나는 늘 여러 가지 경험을 쌓고 일을 해서 많은 것을 습득했고 몸이 약해서 나는 늘 운동을 해서 몸을 강하게 만들었고 나는 늘 배운 것이 없어서 다른 사람을 볼 때마다 많이 배웠으니까 저 사람은 내 선생이라고 생각하고 배우기를 힘썼더니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여건 속에서 과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지혜롭게 생각해야할까? 어떤 지혜를 발휘해야할까를 생각해야합니다. 과연 지혜라는 것은 무엇일까? 내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무엇이고 내게 주어진 모든 여건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절제 속에 앞을 바라보며 그 일을 이루는 것이 우리 믿음의 백성의 지혜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께서는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에 지혜로움이 순박함을 상실한다면 교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반대로 순박함에 지혜로움이 없으면 어리석음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복음 전도자 또는 성도의 삶은 뱀같이 지혜로우면서 비둘기 같이 순결함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5절을 보면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한번 따라합니다. “그들 가운데 빛으로 나타나라”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서 순결하고 순박한 깨끗한 백성으로 이 시대 가운데 빛으로 나타내라고 말씀합니다. 지혜롭고 순박함이 없으면 사람은 교활합니다. 의외로 우리 주변에는 교활한 사람이 많습니다. 사람이 교활해지면 지혜는 가졌지만 그 교활함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자신도 오히려 어려움을 받게 됩니다. 순박함이 없는 지혜보다는 차라리 지혜 없는 순박함이 낫습니다. 지혜 없는 순박함은 자기 하나를 망치지만 순박함 없는 지혜는 오히려 자기 자신뿐 아니라 남까지 망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언제든지 순결하고 순박하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합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마음에 아주 각오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자, 한번 따라해 봅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오염되지 말고 삽니다.” 그냥 살다 살다 너무 어려우면 죽어버리세요. 오염되지는 마세요.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는 것이 낫지 그것 오염되어서 살면 결과적으로 나도 망치고 다른 사람도 망치고 끝없이 오염시켜 세상을 다 망가뜨리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이 오염되지 않기 위해서 갖은 애와 힘을 쓰지 않으면 우리는 저절로 오염이 되고 맙니다. 나는 나 하나 보존하는데 내가 오염되지 않을 수 있어? 아니지요. 늘 말씀드리지요. 나는 가만히 있어도 배경이 달라지면 나라는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배경이 달라지면 나라는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 수많은 오수들이 우리들에게 흘러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오염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씻어내고 끊임없이 맑은 물을 공급해서 희석시켜 깨끗하게 만들어 가는 것처럼 우리 자신에 하나님의 은혜로 늘 깨끗이 씻어져야만 우리는 오염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인간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지라도 가증스럽고 그럴듯한 웃는 모습에 감추어진 혐오스러운 모습을 보면 토해내고 싶은 심정이 하나님의 백성의 심정일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정말 우리는 지나치게 인가관계 중심으로 살다보면 우리의 삶 속에서 결국 하나님의 은혜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때로는 전투적인 삶을 살며 때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 자신이 오염되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쓰는 이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는 성경을 보면 아주 흥미로운 인간이 하나있는데 모세입니다. 모세는 아주 대단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할 때 무엇이라고 합니까? “더러는 모세,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라라고 하더이다.” 가장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아주 다양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이중적인 사람이 아니라 다양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성격을 보면 이중적이라고 말하지 않고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대단히 강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바로 앞에 내 백성을 보내라고 이야기하고 수없는 광야의 어려움 속에서도 가나안 목전까지 이끌고 간 대단한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내면세계를 보면 너무나 유약한 사람입니다. 모세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유약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차라리 나를 죽여주십시오. 나는 일을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모세를 보면 어떻게 이렇게 극한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을 보면 대부분 그렇습니다. 의외로 아주 소심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당연한 것입니다. 앞에서 햇빛 비취면 환하게 비취지요. 그러면 뒷면은 당연히 그늘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중적이 아니라 양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보면 이 양면석이 대단히 극한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모세가 그와 같은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이유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저는 성경을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다른 것은 다 잊어도 오늘 이것은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어떤 점이 모세의 그와 같은 유약한 내면세계에도 불구하고 그를 강인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다름이 아니라 모세는 그의 사역을 하고 있는 기간 내내 하나님의 교제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만나고 있었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지도를 받고 있었고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인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가 그의 유약한 인간의 내면세계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강인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의 성공과 승리의 여부는 내가 어떠한 내면세계와 어떤 능력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가 내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고 내가 하나님의 역사 속에 주의 뜻을 같이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고 있는가가 우리의 결정적인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순결함과 순박함에 대한 지구력입니다. 일시적으로는 순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번 잘할 수 있는 것 누구든지 잘 할 수 있지요. 한번 잘하는 것이 아니라 100번 잘하고 1000번 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지구력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한번 어쩌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이 반복되어 그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성도는 나대지 않고 10년 이상 자기 자리를 꾸준히 지켜주는 사람입니다. 정말 어떤 일이 있어도 특별히 남에게 알려지지 않는 유명인사가 아니라 별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 자리에서 누가 그 일을 하는지 몰랐는데 그냥 꾸준히 그 자리에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단 말이 많고 부패한 그 자기의 수준에서 말을 만들어 전하고 성질내고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아나 무인으로 다른 사람 불편하게 하고 앞에서 하는 소리와 뒤에서 하는 소리가 다르고 다른 사람을 홀리고 미혹하는 사람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일정한 시간과 경과 속에서 지속적인 결실의 반복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지요? 현상과 원리가 일치되어야 합니다. 현상, 현상, 현상, 현상 열 번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현상가운데서 한 가지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뽑아내서 원리라고 합니다. 반복되는 현상 속에서는 일정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원리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가르치거나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 원리가 진실이라는 것을 입증하려면 원리에 맞는 현상이 실제적으로 실증되어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을 말씀해주면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현상으로 실증화되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을 말씀해주면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이 현상으로 실증화되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결하고 순박하게 이것이 지구력 있게 우리에게 끊임없이 유지되어져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순결하고 순박한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지구력이 있어야 합니다. 조금가다 싫으면 그만두고 조금가다 힘들면 그만두고 조금가다 마음변하면 그만두고 조금가다 관심없어하고 관심 없어지면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니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그 일을 지속적으로 순결하고 순박하게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숙의 징표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지요? 인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기 싫어도 할 수 없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비둘기 같이 순전하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유익을 끼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마지막 한가지입니다. 세 번째 뱀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함의 조화로 최종적인 승리를 이룰 수 있는 것 바로 주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뱀같은 지혜로움도 있어야 하고 비둘기 같은 순결함도 있어야하고 이 두 가지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삶의 지혜는 조화와 균형입니다. 제가 나라와 민족을 위한 지도자를 위해 기도할 때 똑같은 문구를 사용합니다. “하나님 균형 잡힌 사고를 가지고 이 나라를 치리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민족을 위한 지도자를 위해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조화와 균형입니다. 균형감각을 상실하면 우리는 그것으로 멸망합니다.

여러분 내가 오른 쪽으로 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항상 내 눈은 왼쪽의 있는 것을 보면서 가야합니다. 내가 오른쪽으로 가고 있다고 왼쪽은 전혀 보지 않고 오른쪽으로만 간다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치우쳐 결국은 모든 구도가 깨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것이든지 일방적인 사회는 없습니다. 일방적인 삶도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어떤 일을 승리하고 있어도 패배하고 있는 사람은 배려해서 어느 정도 수준까지 이끌지 못하면 결국 그 승리는 온전한 승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지혜와 순박함을 가지되 그것이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지혜와 순박함이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이룰 때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 일을 끝까지 지속적으로 이룰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균형 잡힌 삶은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우리의 내면세계를 강화하면서 봉사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 봉사를 하는 것도 교회 봉사는 하는데 교회 봉사하는 만큼 우리의 내면세계가 강화되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시험을 받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 직책을 맡으면 그 직책만큼 우리의 내면세계에 강화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직책을 잘 감당하지 못할 뿐 아니라 상대방에게 시험을 끼칩니다. 내가 어떤 중요한 직책을 맡았습니다. 그러면 그 직책을 감당할 만한 내 마음에 영적인 내면세계가 강화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봉사하다가 시험받는 사람이 대부분 봉사하는 분량보다 영적인 내면세계가 약한 것입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일하건 가정에서 일하던 사회에서 일하건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정한 시간을 내서 교회에서 봉사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이와 같은 조화와 균형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늘 말씀드리지요. 교육과 훈련만이 영적진보를 이룬다. 우리는 따라서 탁상공론을 끝나지 않고 끊임없는 교육과 끊임없는 훈련을 위해서 우리는 선언이 아닌 실천을 하는 이와 같은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우리는 때로는 침묵하고 정진하며 주의 역사를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을 보면 정말 하나님 앞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성도님들이 예배드리는 광경을 보니까 얼굴에 빛이 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옆 사람에게 물어봅시다. 내 얼굴에 빛이나요? 한번 물어보세요. 아니 빛도 안 나고 어떻게 성도가 살아요. 이렇게 대답하나요? 거짓말을 할 수 없고 나긴 나네. 이렇게 대담해야 하나요?

제가 전에 저의 꼬맹이들 두 명 데리고 불곡산에 간적이 있습니다. 길이 좀 미끄러웠습니다. 올라갈 때 괜찮았는데 내려올 때 미끄러우니까 아이들이 미끄러져 넘어지면 무릎이 까지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내가 앞에서 서는 것이 안전할까? 뒤에서 서는 것이 안전할까? 앞에서 서면 넘어져서 아빠한테 걸리니까 넘어져도 멀리 구르진 않을 것 같고 또 뒤에서 봐야 아이들 상황을 볼 수 있을 것 같고 해서 이리저리 생각하다 결국 제가 앞에 내려 보내고 뒤에서 따라오면서 봤는데요. 제가 그 순간 마음에 아주 깊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제 모든 관심은 미끄러운 길에서 아이들에게 모든 관심이 다 가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고 아이들에게 모든 관심이 다 가있더라고요. 그 순간 제 마음에 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관심을 가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려오다가 아이가 잠깐 넘어져서 무릎이 까진 적이 있었는데 아이들은 그러면서 자라는 것이지요. 제가 그 순간 깊이 느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그냥 사는 것이 아니구나. 내가 수고하고 땀 흘리고 애써서 그냥 사는 것이 아니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시고 살게 해 주시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내가 땀을 흘려 내가 애써서 사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지혜 주셨고, 하나님이 힘주셨고 하나님이 호흡 주셨고 하나님이 마음 주셨고 여러분 내 마음 무너지면 아무것도 소용없잖아요. 내 몸에 건강이 무너지면 아무것도 소용없잖아요. 내 마음에 슬픔으로 모든 마음을 가누지 못하면 무엇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자랑할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셨고 지혜 주셨고 총명 주셨고 내 마음에 건강함을 주셨고 정상적인 사고를 주셨고 내 주변의 여건을 주셨고 여러분 누구라도 내 모든 것 하나하나 다 빼앗아 가면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서 번듯하게 이렇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특별힌 축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생각을 하니까 하나님이 지금도 나에게 정말 관심을 가지고 나를 집중해서 보고 계시는구나라고 생각을 하니까 하나님께 너무 감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지요? 밥 먹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지요? 우리는 밥 먹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면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과 떡으로 사는 것이지요. 우리가 밥 먹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밥을 먹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백성입니다. 여러분이 무더운 여름에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그것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하나님의 순결한 백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영악해서 사는 것이 세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세상의 영악함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권능과 힘과 능력에 의해서 주의 역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늘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날씨가 가물었습니다. 도랑에서 물을 퍼다가 밭에 줄 수 있겠지요. 조금 지나면 도랑에서 골을 지나서 물로 밭에 들어갈 수 있겠지요.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은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성도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주의 성도들이 되어서 지혜롭고 순결한 여호와의 백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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