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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기도문(5) : 나라이 임하옵시며 (마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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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이 임하옵시며”
마태복음 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먼저 그 나라를 구하라

오늘 말씀은 주기도문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간구중 두 번째인 “나라이 임하옵시며”입니다. 정확한 번역은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입니다. 당신의 나라는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을 ‘나라에 임하옵시며’라고 착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 나라에 하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아닙니다. 주어가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신의 복보다는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사실 우리 기도라는 것이 너무 자기 개인적인 복에만 매여 있습니다. 내 사업, 내 건강, 내 가족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언제 한 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일제 시대 독립투사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자기와 가정을 돌아보지 않고 뛰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우리가 독립군처럼 하나님 나라에 매진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부름 받은 그리스도의 군사들입니다. 군사들이 자기 사생활에 얽매인다면 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가정은 누가 책임지나? 사실 세상의 애국자는 자기가 애국했다고 해서 돌아오는 대가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나라 현실을 보면 그렇습니다. 친일파들은 잘 살고, 애국지사들은 암살당하거나 3대에 걸쳐 가난하게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 모든 것이란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을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살면 주님께서는 우리와 우리 가정을 살려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 나라

예수님께서는 공생애의 첫 일성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가까이 임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실상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주된 목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를 통한 구원이라는 것도 실상은 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곧 하늘 시민권을 얻기 위한 절차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는 흔히 어떤 장소적인 개념을 생각하는데 이보다는 ‘하나님의 통치’ 더 정확한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천국이라고 할 때 흔히 영원히 사는 나라, 죽음이 없는 나라, 열두 진주 대문과 생명수의 강이 흐르는 안식의 나라라 생각하는 데 이것은 천국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현상들일 뿐입니다. 천국이 천국인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으면 천국이 지옥이 되고, 하나님 계신 곳이면 지옥이 천국이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 하나님의 다스리심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다스리심으로 생각한다면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는 현재적으로 임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쫓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 사람의 영혼을 이 세상의 가치관이나 귀신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이 떠나고 하나님께서 우리 왕으로 임하실 때 천국은 이미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서 실현되고 있으므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는 순간 그 심령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세상의 불의가 물러가고 하나님의 말씀과 법칙이 통하는 사회가 되면 그것도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기쁨과 평강을 누리고 있다면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충분히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맛보지 못하는 천국이라면 우리는 저 세상에서의 천국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증거하는 것과 같은 천국 곧, 우주의 대 파멸과 함께 임하는 나라, 더 이상 죽음도 없고 눈물도 없이,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실현되는 그 나라는 아직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아직’이라는 표현이 좋습니다. 아직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로 끊임없이 기도하게 만듭니다. 이 목표를 향하여 우리는 달려 나가는 것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그러나 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 나라 때문에 그것을 향하여 쉬지 않고 달려 나갑니다.

위기 가운데 있는 세상 나라

비록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이 시민권에 매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고백을 통해 그 시민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세상 나라에 대해서는 나그네입니다. 우리가 구할 것은 ‘세상’ 나라가 아닙니다. 주님은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으시면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18:36)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비록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세상 나라 건설에 희망을 갖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집을 짓고 살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관심은 하늘나라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일에 방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라 하셨으니 우리는 세상의 각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도록 열심히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태양빛을 본 자가 촛불에 만족할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의와 희락과 평강과 사랑의 나라를 비전으로 본 자는 세상 것에 궁극적인 소망을 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영원한 비판자요, 개혁자요, 혁명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 나라의 빛 앞에 세상 나라와 문화와 이데올로기는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실상 교회가 이처럼 나그네처럼 살아야 세상이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야 세상이 긴장합니다. 자본주의의 무한 경쟁의 논리가 판을 치는 곳에서 교회는 작은 소자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물신 숭배의 논리가 주류가 된 곳에서 교회는 사람을 이야기하고 사랑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실천합니다. 분열되고 자기들끼리만 모이는 세상에서 교회는 도무지 화해 불가능한 사람들이 예수 때문에 화해하고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이런 교회의 삶의 양식이 세상에 충격을 주고 세상을 바꿉니다.

마태복음 20장에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라는 재미있는 비유가 있습니다. 집주인이 포도 수확기가 되어 품꾼들을 구하러 나갔습니다. 주인은 품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오전 9시에 나가니까 그때도 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도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합니다. 12시에 나가고, 오후 3시에 나가도 품꾼들이 일을 기다리며 있습니다. 이들에게도 일자리를 마련해줍니다. 심지어 오후 5시 해질 무렵에 가도 그때까지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계속 놀고 서 있는 품꾼들이 보였습니다. 그 사람도 일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포도원 주인은 대단한 사랑의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이 끝나고 품삯을 줄 때 생겼습니다. 주인이 품삯을 주는데 가장 나중에 오후 5시부터 일한 사람에게 먼저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줍니다. 그러자 먼저 일을 시작했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며 자기들에게는 더 많은 삯을 주어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주인을 그들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만 주었습니다. 이에 대해 일찍부터 일했던 사람들이 항의합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마20;12) 사실 자본주의 논리대로 따지면 이 사람들의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세상 나라의 논리를 좇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인을 이렇게 말합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마20:14) 그는 하나님 나라의 사랑의 원리를 좇는 사람입니다. 일거리가 없는데도 오후 5시까지 인력 시장에 서 있을 정도의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생계가 어려운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먹여야 할 가족도 있을 것입니다. 또 일은 하지 않았지만 이 사람이 빈둥거리면 그 시간까지 놀았을 때 그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이런 모든 점을 고려하여 주인은 그에게 일을 시켰고 또 제일 먼저 품삯을 주었습니다. 먼저 일한 일꾼들과도 한 데나리온의 계약을 맺었기에 불의한 처우를 한 것도 아닙니다.

집주인은 물론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지 좋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본주의적인 경쟁의 원리에 기초한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한 사람을 중요시 여기는 나라입니다. 한 사람의 속사정까지도 이해하며 품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만약 믿는 신앙인들이 오늘 한국 사회와 같이 비정규직이 많고, 자본주의의 비정함만이 판을 치는 사회에서 이렇게 살아간다면 세상에 주는 충격은 대단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하나님 나라가 아닌 이 세상 나라를 구하고 그 원리에 따라 사는 데 익숙해 져버렸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영원한 비판자로 산다고 해서 세상 나라를 향하여서 데모하고 정치 운동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방식은 다른 사람이나 제도를 탓하며 ‘이렇게 고치십시오’라고 청원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교회는 단지 스스로 자기 안에서 하나님 나라에 맞는 합당한 삶을 살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신약성경에 쓰이던 시대는 고대 노예제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노예제도를 바꾸라는 요구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이미 노예제도는 폐지되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고 사도 바울이 선포할 때 이미 노예제도는 힘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주 안에서 형제요 자매라고 부르는 순간, 종도 주인도 없고, 남자와 여자의 차별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노예주인 빌레몬에게 그의 도망 노예인 오네시모를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몬1:15-16) 라고 할 때 이미 그 곳에는 하나님 나라의 평등공동체의 이상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정치 과잉입니다. 세상 나라에 대해서 습관적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시국기도회를 엽니다. 강단에서 시국 강연을 방불케 하는 연설을 합니다. 정치적 찬반양론이 분분한 문제에 대해서 지나치게 개입하려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런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소망을 갖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청원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우리 안에서 묵묵히 하나님 나라를 실천할 뿐입니다. ‘세상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의 논리로 운영되지만 하나님 나라는 자기희생과 원수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운영되는 나라를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 현장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군사들입니다. 주기도문의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는 매일같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확인시켜 줍니다. 세상은 전쟁터입니다. 어둠의 세력과 빛의 자녀들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우리가 속해 있는 삶의 영역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곳을 가든지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이 회사에, 하나님 이 가정에, 하나님 제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다스리심이 임하시길 기도합니다.”

저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 세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일과 인격이라는 영역에서입니다.

첫째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보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임합니다. 그래서 회개를 ‘정권교체’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그 사람을 통하여 세상이 바뀝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실한 교두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한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입니다. 먼저 그 나라를 구하려는 자는 다른 무엇보다 전도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교육하고 훈련시켜야 합니다.

둘째는 일입니다.
자기가 현재 하고 있는 일에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도록 하여야 합니다. 사업자는 그 사업이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룰을 따라서 경영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운영되도록 해야 합니다. 근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상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십니다. 그 분의 뜻과 지침에 따라서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직장이나 사업장이 하나님의 법칙대로 가지 않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세상의 나라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못하는 분야가 바로 이 자신의 일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에 실패하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신앙인들의 숫자가 20%에 달하고 아니 30-40%에 달하다 할지라도 현재와 같은 삶의 태도로는 결코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통치 영역은 단지 교회라는 좁은 영역에만 갇히고 말 뿐입니다.

셋째는 인격입니다.
우리들의 마음도 지금 빛의 통치를 받는 부분과 여전히 어둠의 통치를 받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이 빛과 어두움이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성화(聖化)’라고 할 것입니다. 내 자신 안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맺혀져 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50, 60년대 유명한 부흥사이셨던 이성봉 목사님에게 누가 천국이 어디 있냐고 비아냥 댔습니다. 그러자 이 목사님은 “천국 본점이야 내 소관이 아니니까 보여드릴 수 없고 지점은 보여드릴 수 있는데 내 마음이 천국입니다.”라 말하였다고 합니다. 천국은 내 안에 있습니다. 부지런히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아직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 속의 어두운 부분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때 하나님 나라는 날로 확장됩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는 우리가 지향해야 될 목표가 어디인지 가리켜 줍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게 해줍니다. 또한 어떤 원리를 따라 살아가야할 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부지런히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축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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