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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왕하 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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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한평생 살아온 날들을 두고, 또 현재하고 있는 일들을 두고 다 잘했다 생각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 직업을 택한 것도 잘했고,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한 것도 잘했고, 내게 주신 자녀도 너무 귀하고, 오늘 내가 하고 있는 일도 생각할수록 참 잘된 일이라고 느낍니다.  그래서 참 "감사하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라고 고백하며 삽니다.  이것을 깊이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아만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다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행복하게 살지 못합니다.  그는 왕으로부터 인정받는 존귀한 사람입니다.  큰 사람입니다.  용감한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But) 나병환자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큰 용사이나 (그러나) 나병환자더라"
(He was a valiant soldier, but he had leprosy). 
이 "그러나(but)" 라는 단어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나병환자더라". 
이 말은 내가 가진 이 모든 것이 다 소용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라는 단어와 "그러나" 라는 단어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그리고"라는 말은 더해가는 것입니다.  8+8=16,  16+16=32  "그리고"라는 말은 이렇게 계속해서 더해가는 것입니다. 점점 좋아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러나"라는 단어는 이전에 아무리 좋아도 나중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예를 들어 5*5=25입니다.  25*25=625가 됩니다. 그런데  625*0= 0(제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라는 단어는 이와 같습니다. 
이전에 아무리 좋아도 "그러나"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나아만은 크고 존귀하고 용감한 장군이었습니다.
" "그러나" 나병환자더라." 
내가 지금 나병환자라는 것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아무리 왕이 자기를 높여주어도 자기가 생각 할 때에 "나는 이 병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큰 용사이나 (그러나) 나병환자더라"

1. 우리가 변해야 하는 이유
여러분!
우리는 다 변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변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 모든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이 "그러나"(but)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그러나(but)"를 가지고 있으면 우리 인생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 집은 돈도 있고, 다 좋은데 그러나 문둥병이 있더라. 
우리 집은 다 괜찮은데, 그러나 자녀가 결혼하지 못하였더라.
우리 집은 행복한데, 그러나 사업이 잘 안되더라.
그러면 우리들은 내 인생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인생의 그러나(but) 는 무엇인가요?
사업이 잘 안돼요?  직장이 안정되지 못했어요?  자녀가 결혼하지 못했어요?  병들었어요? 
그런데 사실 오늘 내게 이 "그러나" 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큰 문제는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용사였습니다.  그는 명예와 돈과 힘이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부러운 것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문둥병으로 인해서 자기의 인생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내 인생에 아무리 많은 이 "그러나" 가 있다 할지라도 이"그러나" 를 "그러나" 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인생의  이"그러나"는 하나님을 만나는 도구가 될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이"그러나"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  "그러나" 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에 열등감을 가질만한 문제, "그러나" 가 있습니까?
그것을 더 이상 "그러나" 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 "그러나(but)"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내 인생의 "그러나"가 아니라 "그리고"로 생각합니다.
"그는 큰 용사이었다 "그러나" 문둥병이 있더라".  이거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우리들은 이렇게 고백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큰 용사이었다.  그리고 문둥병이 있어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더라." 

여러분의 삶에 이 "그러나" 라는 문제가 있다고 해서 절대로 여러분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내 인생에 이 "그러나"는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도구가 될 줄로 믿습니다. 
나아만장군은 "그러나" 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그러나" 라는 문제로 하나님께로 나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러나"를 가지고 있습니까? 
사람마다 다 나름대로의 이 "그러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러나"를 그냥 놔두면 우리는 망가집니다.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변화 됩니다. 

  여러분의 "그러나"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삶에 이것 때문에 문제가 되는 "그러나"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말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다 자기 나름대로의 "그러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그러나" 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 변해야 합니다. 
우리가 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입니다.

2. 우리가 변하기 위해서는?
그러면 우리가 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9절, 10절입니다.
"9)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나아만장군은 이 어린 여종의 말을 듣고 정말로 사마리아에 있는 엘리사의 집에 갔습니다.  나를 고쳐 달라고 갔습니다. 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어"(10절 상반 절). 
엘리사가 직접 나오지 않고 사자를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저 요단강물에 가서 일곱 번 씻으랍니다." 

여러분!
나아만은 장군입니다.  용감한 장군입니다.  크고 존귀한 장군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라고 하는 선지자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종을 시켜서 "가서 요단강물에 일곱 번 씻으라" 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화가 나요. 
  그래서 11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나아만 장군은 자기가 기대하던 것이 무너지자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12절입니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나아만은 너무 화가 나서 다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때에 나아만과 같이 왔던 신하들이 말합니다. 
13절입니다.  쉬운 성경으로 제가 읽겠습니다. 
"주인님, 만약 저 예언자가 그보다 더 큰 일을 하라고 했더라도 그대로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기껏해야 몸을 씻으라는 것뿐인데 그 정도도 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신하들이 말렸습니다. 그 때 나아만이 자기 신하들의 말을 듣고 요단 강물에 들어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것이 14절입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어떻게 되었습니까?  "깨끗하게 되었더라". 
  우리가 다 나름대로의 "그러나"가 있기 때문에 "변화 받아야 한다" 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변화하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그 변화의 조건이 무엇이냐?  겸손입니다. 
삶이 변하고, 인생이 변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아만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겸손하라" 는 것입니다. 
변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거기까지 와서도 자기의 위치와 자리가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장군이라는 것, 자기가 존경받는 큰 사람이라는 것이 너무나 중요했어요. 
하나님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문둥병보다 더 큰 질병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문둥병보다 더 큰 질병이 무엇이냐?  그것은 교만입니다. 
교만하면 변할 수 없습니다.  교만하면 바뀌지도 않습니다. 
우리에게 문둥병보다 더 큰 질병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테니스를 코치로부터 배운 적이 있습니다.  저는 테니스를 동네에서 어깨 너머로 배웠습니다. 기본기가 다져지지 않아서 실력이 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코치에게 제대로 좀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작했습니다.  카트에 가득 담긴 공을 코치가 주는 대로 받아 칩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을 다 치고 나서입니다.  바닥에 흩어진 수백개의 공을 다 주워서 바구니에 담아야 합니다.  쭈그리고 앉아서 공을 바구니에 담은 일은 힘듭니다.  허리도 아프고 고역입니다.  아니, 레슨비 냈으면 공 줍는 것은 코치가 하던가 해야죠.  자기보다 나이도 훨씬 많은 사람인데,,,,  이 나이에 내가 공을 주우면서까지 테니스를 배워야 하나?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좀 창피하기도 하구요.  그러면서 생각했어요.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테니스를 배울 수 없다.  공을 줍는 겸손을 테니스를 배우기 전에 배우자.  자존심의 옷, 자부심의 옷, 권위의 옷을 벗어버리지 않으면 영영히 테니스를 배우지 못합니다.  저의 테니스 실력은 여전히 거기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테니스를 배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자훈련을 하자고 하면 내가 평생 예수를 믿었는데, 무슨 제자훈련이냐고 말합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으면 삶이 변할 수 없습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변할 수 있습니다.  겸손해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겸손할 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우리가 겸손할 때 하나님이 고치십니다. 
하나님은 나아만을 고치실 때 말 한마디로 치료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아만의 문둥병뿐만 아니라 그의 교만함까지 고치시길 원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든 사람들이 다 이 "그러나" 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러나"를 고치려면 장군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내가 변하기를 원한다면 이 자존심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내가 바뀌기를 원한다면 이 자부심이라는 옷을 벗어야 합니다.
나아만이 장군의 옷, 자존심의 옷, 자부심의 옷을 다 벗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아만을 깨끗하게 고치셨습니다. 

겸손하시기를 바랍니다. 
힘이 있고, 돈이 있고, 명예가 있고, 학벌이 있는 사람이면 더 더욱 겸손하시길 바랍니다.  남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면 더 더욱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모태신앙일수록, 항존직 일수록 더 더욱 겸손하게 신앙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겸손할 때 하나님은 나를 바꾸십니다. 

3. 변한 사람의 삶의 모습은?
그렇다면 "그러나"의 문제를 통해 변화된 사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17절에 고침 받은 나아만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 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사람이 변화면 어떻게 되는가?
사람이 변하면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를 생각하게 됩니다. 
나아만, 이 사람이 변했습니다.  그는 선언합니다. 
"고향에 돌아가면 하나님께만 예배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만 예배드리겠다고, 하나님만 섬기며 살겠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 변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는 눈물을 가지고 여기에 왔습니다.  그는 슬픔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돌아갈 때는 기쁨과 은혜를 가지고 돌아가게 됩니다. 
인생의 "그러나(BUT)"를 다 해결하고 돌아갑니다. 
하나님을 가슴에 소유하고 돌아갑니다.  나아만의 인생이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그러나"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도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겠노라 결단하고 고백하는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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