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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제자 됨 (요 13: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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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교회 다니는 사람을 몇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등급을 매기는 건 아닙니다.
교인 : 그냥 교회에 등록하고 예배나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을 말합니다.(member)
성도 : 교회 다니면서 구ㅜ언의 확신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제자 :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서 그 확신에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줄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차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교인인지, 성도인지, 제자인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신학을 얼마나 아느냐가 아닙니다.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도 아닙니다. 남이 뭐라고 평가하기 전에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행복하며 기뻐하는가?’ ‘내가 무엇을 정말로 사랑하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 때문에 행복하며 기뻐한다면 그는 성도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하기에 예수께 내 삶 전부를 내어놓았다면 그는 제자인 겁니다.
그래요.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은 돈을 꼽습니다. 그런데 돈이 많으면 행복해 집니까? 물론 사는데 평안함은 있겠지요. 그러나 지금 더욱 필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채워지지 않으니까 먹는 것, 입는 것, 치장하는 것 등으로 대신 채우려고 하는 겁니다.

예수께서 가룟 유다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시자 가룟 유다는 곧 밖으로 나갔습니다. 가룟 유다가 나가자 예수님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었을 때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뜻이 언제 이루어졌습니까?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겁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당신이 이제 세상을 떠나실 때가 되었음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이제 세상을 떠나야 할 때가 임박했음을 알고 계신 겁니다.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할 시간이 없음을 아신 겁니다.
이때 예수님의 생각은 이러셨을 겁니다. “내가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말이 무엇인가?” “무엇이 이들에게 가장 소중한 말일까?”

그래서 하신 말씀이 33-35절, “사랑하는 사람들아, 내가 아직 잠시 동안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유대사람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나는 너희에게도 말하여 둔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 지고 죽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곧 부활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영광 받으시게 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자들입니다. “이 땅에 남아있는 제자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목자 잃은 양 같은 제자들은 무엇을 해야 할 지조차도 모르고 당황할 텐데…….” 더욱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려고 나갔고, 제자들은 아직도 누가 더 높아질 건가로 신경전을 벌리고…….
그 마지막 순간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서로 사랑하라.”는 겁니다.
놀랍게도 요한복음에 “사랑하라”가 56번이 나오는데 그중 예수님의 고별설교가 할 수 있는 13장에서 21장 사이에 44번 나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시고 직접 보여 주신 겁니다.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을 요한복음 20:31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을 수 있는가? 다른 것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또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34절에 뭐라 하셨어요? 새 계명이라고 하셨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다니신지 벌써 3년. 그동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한 많은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또 제자들이 나아가서 실제로 해 보게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새 계명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사랑하라”는 말씀을 처음 하신건가? 그것도 아닙니다. 말씀드렸듯이 요한복음에 사랑하라가 56번입니다. 그렇다면 새 계명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새 계명을 준다고 하셨을까? 전에는 (작은 목소리로) “서로 사랑해라” 그러셨는데 지금은 (큰 목소리로) “서로 사랑해라” 그러셔서 새 계명인가? 아니지요.

지금의 새 계명은, 지금까지 가르친 것 그것 다 둘러 엎어버리든, 아니면 뚤뚤 뭉쳐 하나로 만들든,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이 하나의 말씀에 다 포함되었기에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새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사랑 말고는 다른 것이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 병자 고침, 가르침, 이제 곧 십자가 고통과 죽으심 등 이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랑이 곧 새 계명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제자들. 절망적인 상황이 될 겁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랐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그래서 꿈도 깨지고, 믿음도 깨지고……. 그동안 무얼 했나 싶은 충격 가운데 있게 될 상황입니다.
그때, 그 절망의 위기를 이겨내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이럴 때 돈이 있으면 되겠어요? 이럴 때 명예가 있으면 되겠어요? 이럴 때 권력이 있으면 되겠어요? 아니지요. 예수님은 바로 그럴 때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보신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자들을 살아남게 하고, 그래서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사랑 밖에 없다고 보신 겁니다.
그래요.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랑해 보세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정작 사랑이 필요할 때 더욱 감정으로 대립합니다.

한 때, IMF 기간에 명예퇴직 당한 남자들이 있었어요. 처음에는 아내들이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좀 쉬세요.” 그러다가 그 쉬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남편이 무능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조금씩 금이 기고, 나중엔 별 거 아닌 것 가지고 싸우고 결국……. 사실 이럴 때 더 사랑이 필요한 거 아닌가요? 그런데 이럴 때 사랑보다 더 원칙을 따집니다. “남편이라면 이렇게 해야 하는 게 원칙이 아니냐?” “아내라면 이렇게 해야 하는 게 원칙이 아니냐?”

사랑해 보세요. 어떻게 되나? 어떤 어려움도, 고통도, 슬픔도, 절망도, 사랑하면 해결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앞으로 예수께서 맡기신 일들을 제대로 하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감옥에도 가고, 매도 맞고, 결국 순교 당하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어요? 돈? 명예? 권력?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죄 아래서 죽어가는 사람을 사랑하는 겁니다. 심지어 자신에게 박해를 가하는 사람조차도 사랑하는 겁니다. 그 사랑 밖에 없는 겁니다.

물론 우리도 서로 사랑을 안 하는 것 아닙니다. 사랑하지요. 부부지간에도, 부모와 자식 아이에도 사랑한다고 하지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렇게 말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왜 우리의 사랑은 어려움과 고통과 슬픔과 절망을 해결할 수 없나요? 왜 우리는 서로 사랑하면서 더 아파하고, 더 아픔을 주나요?
그것은 내 생각, 내 기준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무조건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주신 희생의 사랑입니다. 한 번 사랑하다가 끝내버리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끝까지 하는 사랑입니다.
그렇지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모를 리 없지요. 다 압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사랑을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도 고귀하기에 우리가 도저히 따라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마라톤 선수인 이봉조 하고 마라톤 경주를 한다고 합시다. 우리 모두 다 출발점에 섰습니다. 이럴 때는 달릴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는 따라갈 것 같지요.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처음에는 한 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달리지만, 불과 몇 분이 못 되어서 포기하고 말 겁니다. 왜냐하면 뛰면 뛸수록 격차가 너무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으니까. 도저히 2시간 이상 달릴 능력이 없으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 예수 처음 믿을 때는 그래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 말만 예수님의 사랑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신앙의 연륜이 오랠수록 예수님의 사랑보다는 원칙을 고집합니다. 판단하고, 정죄하고, 자기가 세운 원칙에 들어오면 사랑하고 그럽니다.

그것도 아니면, 편안한 방법을 택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 이건 정말 못 하겠는 겁니다. 그래서 “미워하지 말라.”로 바꿉니다. 이건 그래도 좀 쉽습니다. 안 하면 되니까요. 그래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인 줄 모르고, 누구를 미워하지만 않으면 자기는 죄 없는 그래서 괜찮은 신앙인이라고 착각하는 겁니다.
카렐이라는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해할 줄 아는 사람보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게 그의 참 모습을 드러내신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연구해서, 또 설교를 들음으로 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는 것이지 경험 된 것이 아닙니다.
아이스크림. 시원하고, 달고, 입 안에서 살살 녹는다는 등은 아는 것입니다. 경험은 먹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아는 거시 분명해집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알기는 아는데, 경험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것을 알기는 하는데,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 한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경험할 수 있습니까?
요한일서 4:12,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16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알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 할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이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낙심한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뒤에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고 말씀하신 겁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데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주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사랑은 서로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영생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사랑하라. 그러면 내가 영생을 주겠다.”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 안 하셔도 우리가 영생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고,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도 너희를 사랑하겠다.”가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그러니 너희도 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겁니다.

세상은 상대적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친절하면 그도 나에게 친절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도 나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우리 옛 어른의 말씀이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착각합니다. “사랑하라.” 그러니까, “저는 온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아니지요.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서로’란 일차적으로 제자들끼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3년 동안 동고동락 한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 누구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C. S 루이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로서의 개개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인류를 사랑한다고 하는 거창한 타이틀을 열렬히 사랑하기 쉽다. 그러나 일반적인 면에서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일 수 있다.”
함께 살아가는 가족을 사랑하지 못 하면서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겁니다. 함께 신앙 생활하는 성도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불신자를 사랑한다고, 인류를 사랑한다고 하는 역시 거짓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에리히 프롬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나는 너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너를 통하여 전 세계를 사랑하고, 너를 통하여 동시에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옆에 있는 남편을 보고 “여보, 당신을 정말 사랑합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 아내는 남편을 통해 전 세계를 사랑하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는 겁니다. 또한 내가 전 세계를 사랑한다든지, 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내 곁에 있는 남편을 사랑함으로서 가능하다는 겁니다.
먼저 여러분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모두를 사랑할 수 있고, 그러면 원수까지 사랑하게 됩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지 못 하면서 원수까지 사랑하겠다고요? 같은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성도도 사랑하지 못 하면서 어떻게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랑하라.’ 그러면 또 문제되는 것은, “나는 사랑하는데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분명히 서로 사랑하라고 했는데” 라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면 여러분의 사랑을 점검해 보세요. 어떤 이유에서든 나는 그를 사랑한다고 했는데 그가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잇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 물 컵을 여러분을 향해 휙 하고 뿌렸다면 여러분의 옷이 젖어야 합니다. 얼굴이 젖든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물이 한 방울도 묻지 않았다면? 컵 안에 물이 없을 경우입니다. 그리고 거리가 너무 멀어서 물이 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도 이것이 문제입니다.
알맹이 없는 껍데기 사랑. 목사니까 할 수 없이 교인을 사랑한다든지, 장로니까 할 수 없이 목사나 교인들을 사랑한다든지……. 그리고 가까이 그래서 손도 잡고,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나 그 사람 사랑해.” 하고 말하는 경우든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랑했을 경우입니다. 이럴 때 그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분노가 되고 저주가 쏟아집니다.
아닙니다. 사랑은 서로 경험되어져야 하는 겁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행동이고, 실천이고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동입니다. 사랑은 실천입니다. 사랑은 삶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너무 ‘사랑’에 대해 많이 들어서 이제는 ‘사랑’ 그래도 아무 느낌이 없어졌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그러면 “으이그, 또 그 이야기” 그래서 행동이 없어요. 실천이 없는 겁니다.
사랑은 위로하는 겁니다.
사랑은 용서하는 겁니다. 용서를 뒷전에 두고 서로 탓하기만 하면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줄 뿐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은 막걸리 한 잔이면 회해가 되는데 사랑을 이야기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한 번 꽁 하면 풀어질 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용서는 자기를 해방시키는 행위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자기의 내적 치유가 되지 않습니다. 용서해 보세요. 용서하면 나도 살고 가정도 삽니다. 용서하면 나도 살고 교회도 삽니다. 용서하면 나도 살고 사회도 삽니다.
또 용서는 공동체의 접착제라는 말도 있습니다. 용서가 있는 교회는 절대로 깨지지 않습니다. 용서가 있는 가정은 부부가 서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용서가 있는 가정의 자녀들은 집밖에서 방황하지 않습니다. 용서가 있는 교회는 늘 사랑과 은혜가 충만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끝까지 하는 겁니다.
배 타고 가다가 뱃멀미한다고 배에서 뛰어내리는 사람 보셨어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목적지까지 가는 겁니다. 사랑이 그런 겁니다. 힘들어도, 상대가 받아주든 안 받아주든 여전히 사랑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 “목사님, 저는 한 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마음을 줍니다. 그러다 한 번 삐딱하면 그때부터 아예 끝입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입니까? 한 번 마음을 주면 삐딱한 일이 생겨도 끝까지 마음을 주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런 마음이니까 열 가지 잘 하다가도 하나 삐딱하면 끝내고 돌아서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것도 흠뻑 젖을 때까지 사랑하십시오. 나무도 물을 흠뻑 주어야 제대로 삽니다. 조금 주면 오히려 더 갈급증이 나서 말라 죽는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서로 위로하십시오.
서로 용서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끝까지, 생명 다할 때까지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도 여러분과 저를 제자로 인정하실 것이고, 세상 사람들도 여러분과 저를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할 것입니다
(이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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