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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하지 않는 죄 (마 18: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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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장 후반부는 공동체 내에서 형제를 용서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전반부에서 다루어진 누가 크냐하는 문제와 용서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부터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큰 자란, 겸손히 자기를 낮추고 소자 한 사람을 귀히 여기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이나 소자 한 사람을 귀히 여긴다는 것은 마음의 태도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자기를 낮추는 마음의 태도를 가졌다는 것, 그리고 진정으로 소자 한 사람을 귀히 여기는 마음의 태도를 가졌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타인에 대한 ‘용서’에서 그것이 드러납니다. 스스로 높아지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나 소자 한 사람을 귀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타인을 용서하기 힘듭니다. 그런 점에서 진정으로 큰 자는 ‘용서’하는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가장 겸손하시고 소자를 가장 귀하게 여기신 분, 그래서 가장 위대하신 예수님의 생애를 보아도, 그분은 죽음의 순간까지도 용서하신 분이셨습니다.

18장 전반부는 가능한 한 사람이라도 실족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15-17절에서는 이미 실족케 된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말씀하십니다. 15-17절을 보십시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형제가 범죄 했을 때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비난하는 것이고 둘째는 무관심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비난하다가 나중에는 관심 자체를 끊어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일 것입니다. 비난이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인식합니다. 화가 나서 한참 비난하다가도 자기 이미지만 손상 되는 것 같아서 외면해버립니다. 그런데 무관심 역시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비난할 때는 일말의 애정을 가진 상태지만, 무관심은 애정조차 없는 상태기 때문에 실상은 더 나빠진 상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무관심은 자기 이미지만 관리하고자 하는 이기심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15-17절은 범죄한 형제가 다시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마음을 들여서 수고해야 할지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죄를 범한 형제는 신경이 예민해져 있어서 과민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쉽게 오해하고 쉽게 상처받습니다. 그러므로 아주 가능한 그의 허물은 최소한만 폭로하면서 조심스럽게 섬겨야 합니다. 먼저는 개인적으로 가서 그의 죄를 깨닫게 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조목조목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들을 깨우쳐 주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에서 추방해야 합니다. 이 모든 절차들의 목적은 그를 정죄하는데 있지 않고, 잃어버린 형제를 ‘다시 얻기’위한 것입니다.

잠언 3:3-4절에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인자와 진리를 NIV 영어성경에서는 ‘love and faithfulness’(사랑과 성실함)으로 번역했습니다. 실족한 형제에 대해서도 여전히 사랑을 잃지 않고, 그를 다시 얻기 위한 노력을 성실하게 계속한다면, 참으로 그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만약 죄에 사로잡혀 있는 형제를 그대로 매어두면 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성실의 자세로 그 형제를 죄에서 풀어내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입니다(18).

범죄한 형제를 죄로부터 푸는 일에 항상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교회 전체에 알리고 전체의 기도지원을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범죄한 자와 그를 권고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찾아간 두 사람이 대화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한 마음이 되었다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저희를 위하여 죄의 사슬에서 풀려나게 하실 것입니다(19). 겨우 두 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였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그들 중에 계시기 때문입니다(20). 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피흘리신 우리 주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은혜가 베풀어 질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21) 당시 랍비들은 한 형제가 동일한 죄를 반복할 때, 3번까지는 용서받을 수 있으나 4번째는 용서 받을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수치로 정해놓으면 어떤 문제에 당면했을 때, 마음의 갈등 없이 쉽게 결정을 내리고 행동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상당히 관용을 베풀어서 7번까지로 확대했습니다. 7은 완전수입니다. 아마 베드로는 인간이 베풀 수 최대한의 용서를 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22)고 하셨습니다. 원어상으로는 77(70+7)번으로도 해석할 수 있고, 490(70×7)번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78번째 혹은 491번째부터는 용서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무한히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제시한 ‘일곱 번’은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용서를 의미한다면,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일흔 번씩 일곱 번’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차원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왜 이처럼 무한히 용서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한 비유를 통해서 무한히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23-34절을 보십시오.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습니다(23).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종 한명이 잡혀 왔습니다.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며,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일만 달란트면 노동자가 365일 중 하루도 쉬지 않고, 16만 4383년 204일 9시간 36분 동안 일한 품삯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하루 일당 5만원으로 생각한다면 3조원에 해당하는 액수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만큼이나 많은 돈을 빚졌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는 왕에게 빚졌습니다.

왕은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갚게 했습니다. 몽땅 판다고 해도 빚진 액수만큼 갚아질리 없지만, 왕의 재산에 손실을 가져온 것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종은 엎드려 절하며 말했습니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26) 종은 사실 자기가 할 수도 없는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일한다 해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액수이기 때문입니다. 진실하게 자기 처지를 아뢰고 용서를 구하기보다, 임금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임기응변적인 말을 한 셈입니다. 그러나 임금은 어쨌든 용서를 구하는 그를 불쌍히 여겨 놓아 보냈을 뿐만 아니라, 그 빚을 면제해 주었습니다(27). 그가 평생을 걸려서도 갚을 수 없는 빚임을 임금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용서 받은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명을 만났습니다. 백 데나리온이면 노동자의 3달 열흘 품삯에 해당합니다. 그 정도 액수는 시간만 연장해주면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 받은 종은 동료를 만나자 마자 다짜고짜 목을 조르며 “빚을 갚으라”했습니다. 동료는 용서 받은 종이 왕께 했던 것처럼 엎드리어 간구하며 말했습니다. “나를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29). 그러나 용서 받은 종은 들으려 하지도 않고, 오히려 빚을 갚을 때까지 그 동료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30).

그의 동료들이 그 일어난 일을 보고 몹시 마음이 아파서 자신들의 주인인 왕께 보고했습니다(31). 그러자 주인이 그를 불러 말했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주인은 화가 나서 그 종이 빚진 모든 것을 갚을 때까지 그를 고문하도록 넘겨주었습니다.

이 비유가 가르치는 바는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 중심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단지 몇 번째 용서했느냐를 횟수로 따지는 자세와는 상당히 대조됩니다. 몇 번 용서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마음으로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저 랍비가 몇 번 용서해야 한다고 정해주었기 때문에, 율법적인 마음으로 용서한 것일 뿐입니다. 마음으로 용서하려면 먼저 왜 용서해야 하는지를 알아야합니다. 그 이유를 오늘 비유가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빚진 자입니다. ‘빚’이라는 단어는 어원이 ‘죄’와 같습니다. 용서 받은 종의 빚이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 갚을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의 죄 또한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간은 사망으로 갚아야 합니다. 원죄에 자범죄까지 추가되어서 영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더 나쁜 상황은 인간은 어떤 노력으로도 스스로 그 죄 값을 치를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값없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일방적으로 택하시고 영벌에 처해질 자를 영생으로 옮겨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참으로 알고 감사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자신에게 아픔과 상처를 준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흔히 용서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유 말씀을 보면, 용서치 않는 것은 분명 심각한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를 조금도 기억하지도 않고 감사치도 않는 배은망덕한 죄입니다. 또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심판을 맡기지 못하고 스스로 심판하려는 교만입니다. 참으로 하나님 백성답게, 형제를 용서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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