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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 (삼상 16: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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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말 인도네시아의 지진 때 족자카르타를 중심으로 반뚤과 끌라뗀 지역에서 약 20여일을 사역하면서 참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지진에도 가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흔히들 지진이 나면 지진이 진원지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퍼져 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진 지역을 다니면서 보니까 지진에도 마치 번개가 치는 길이나 물이 흐르는 길 같이 어떤 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한쪽은 멀쩡하고 다른 한쪽은 엄청난 피해를 당한 것을 보았습니다.

지진이 가는 길 밖에 있는 집들은 아무리 허름해도 멀쩡합니다. 지진이 가는 길 안에 있는 집들은 아무리 기초를 든든하게 지어도 무너지거나 대파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 길 안에 있는 회교사원이던 그 길 안에 있는 예배당이건 예외가 없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교회는 좀 멀쩡하고 회교사원만 무너지면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보호 하셨습니다.” 하고 이야기하기가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바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무너져 버린 예배당의 모습은 함께 그 광경을 보는 우리들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일들이 무슨 의미일까 ?” 하고 저는 참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와 함께 목회자 훈련 프로그램을 주관하는 현지인 동역자 한 분이 꼭 같이 가 보았으면 하는 피해 교회가 있어 같이 갔다가 그 곳에서 저는 그 해답을 발견했습니다. 그 곳에 가보니 목사관은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예배당은 아직 없었고 교인의 집에서 예배를 보고 있었는데 이 예배 처소마저도 여기 저기 금이 가고 집안에 있는 내벽들은 다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초라한 예배 처소에는 25 Kg짜리 쌀부대가 어림잡아도 200개 정도가 쌓여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큰길가에서 30여분을 들어가야 하는 외진 곳이기도 했고, 몇 주 동안 단 한 번도 그렇게 많은 쌀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본적이 없어서 물어 보았더니 교인들이 대답을 합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한 기독교인이 그 곳에 쌀을 트럭으로 가져다주면서 하는 말이 마을 사람들에게도 쌀을 나누어 주되 반드시 예배당에서 쌀을 나누어 주라고 당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모님이 하는 말이 아이들까지 교인이 한 90명 되는 정말 어렵고 힘들고 핍박도 많이 당한 교회인데, 이제는 수백 명이 넘는 온 마을 사람들이 교회의 덕을 보며 산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온 마을 사람들이 이 허름한 예배당에 쌀을 얻으러 오는데 교인들이 이 광경을 보며 그 곳에 축복의 원천“sumber berkat"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모님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진이 났지만 저는 오히려 기뻐하고 오히려 흥분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어떻게 우리를 사용하시는지를 보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듣는 제 마음이 어땠을까요? 그 감동을 말로만 전해 듣는 여러분들은 잘 못 느끼실 것입니다.

오늘 저는 그 감동으로 본문의 말씀을 붙들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울과 다윗이라는 두 인물을 통해 하나님의 영이 떠나간 자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의 삶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호와의 신이 떠나간 사울의 모습에 대해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신이 떠나간 뒤 사울에게 다가온 첫 번째 모습은 악한 신들이 그를 지배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 성령이 떠나가는 자리는 그냥 공백으로 남겨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는 악한 영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생각과 행동과 모든 이루는 일들의 결과가 악한 영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됩니다. 더욱이 두려운 것은 악한 영의 지배가 하나님의 선택과 섭리 아래 이루어지는 회복될 수 없는 하나님의 내어버려 두심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4절에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시고”, 26절에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시고”, 28절에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셨다”고 말씀합니다. 그 내어버려 두심의 결과는 온갖 악한 결과들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참 많은 두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넘어짐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다가 올 수 있는 그 어떤 두려움보다도 성령이 내게서 떠나가는 것을 두려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신이 떠나간 뒤 사울에게 다가온 두 번째 모습은 번뇌였습니다.
견디기 힘든 정신적인 압박과 두려움이 다가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옵니다. 작고 큰일을 만날 때 마다 놀라고 크게 두려워합니다. 번민과 혼란이 가중되고 이유 없는 질투와 미움이 분노로 폭발합니다. 여러분! 때로는 우리에게도 사울과 같은 이 번뇌가 있습니다. 작고 큰일을 만날 때마다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한 밤에, 새벽에 울려오는 전화 벨 소리 하나에도 무슨 일일까 불안해합니다. 억눌린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한꺼번에 표출하다가 주변을 깜짝 깜짝 놀라게 합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고 생각은 하지만 점점 불안해 지고 우울해 집니다. 사소한 일에도 사소한 부딪힘에도 온갖 잘못된 원인이 그것에 있었던 것처럼 미워하다가 그 미움이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폭발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모든 번뇌의 뿌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무엘 상 15장 23절에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언제 여호와의 신이 떠나가고 번뇌가 오느냐 하면 바로 우리가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을 때”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에 우리의 삶에 회복 불능의 번뇌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의 말씀에 완고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하세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용납하고 받아들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신이 떠나간 뒤 사울에게 다가온 세 번째 모습은 점점 자기 자신이 문제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외부의 사건이 문제가 될 때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문제가 될 때 진짜 문제입니다. 사울의 진짜 문제는 사방의 대적들이 아니었습니다. 모압의 자손들도 암몬의 자손들도, 에돔과 소바의 왕들도 사울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아말렉 사람들도 사울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외부의 사건들이 문제가 될 때, 외부의 세력들이 문제가 될 때 사울은 향하는 곳마다, 가는 곳마다, 이루는 일들 마다 다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 앞에 완고함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함으로 그 자신이 문제가 될 때 사울에게는 더 이상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 때 사방의 대적을 두려워하지 않던 사울이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 하나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수많은 문제들이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다가 올 때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오늘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합니다.

여호와의 신이 떠나간 뒤 사울에게 다가온 네 번째 모습은 그 무엇으로도 회복될 수 없는 실패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다윗의 수금을 통해 사울은 일시적인 회복을 얻습니다. 그러나 악한 영이 힘 있게 내릴 때 사울은 자신을 위하여 수금을 타고 있는 다윗에게 두 번이나 창을 던집니다.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그리고는 창을 던졌으나 다윗은 두 번이나 피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윗의 수금이 주던 회복의 능력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광야에 들린 놋 뱀을 바라보기를 끝내 거부하고 죽어간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 가운데 필요한 참된 회복의 능력은 지위에서도, 힘에서도, 모략에서도, 경험에서도 나오지 않습니다. 회복의 능력은 오직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 안에는 통회하는 자들을 향한 주님의 용서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 안에는 간절히 소망하는 자들을 향한 주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 십자가 안에는 넘어짐 속에서도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들을 향한 주님의 참된 회복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그 십자가를 붙드심으로 주님의 용서와 약속과 회복을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윗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복들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복은 하나님의 개입과 간섭을 경험하는 복입니다. 내가 그 동안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섬세한 인도하심을 새롭게 경험하는 복입니다. 그 복은 가진 것 없어도 내세울 것 없어도 세상을 위로하고 이웃에게 평안을 전하는 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분명히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통치 밖의 세계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다스리지 않는 세계는 없습니다. 비록 어려움 가운데 있어도, 문제 속에 있어도, 사방에 대적들이 가득하여도 하나님의 섭리의 순간들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저는 지난 17년 동안의 선교지에서의 삶을 돌아보면 참 많은 실패와 좌절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17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고민과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즘 와서 저는 선교가 무엇일까? 헌신이 무엇일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참 많이 합니다.

요즘 저는 그것은 마치 자전거 타기와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제가 처음 자전거를 타 본 때는 초등학교 6학년 때이었습니다. 토요일 오후 찬양대 연습을 위해 교회에 나와 교회 밖 공터에서 놀고 있었는데 그때 한 친구가 자전거를 가지고 왔습니다.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놀던 때가 아니니까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 구경도 하고, 몇몇 친구들은 자전거를 타보기도 했습니다. 그때 자전거 주인인 여자 아이가 저보고 자전거를 타 보라는 거예요. 저는 그때 까지 자전거를 타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친구들이 붙잡아 주고 밀어 줘서 드디어 처음 타본 자전거로 제법 빠르게 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브레이크를 사용할 줄 몰랐습니다. 어! 어! 하는 사이에 교회의 대문 기둥에 세게 부딪혀 땅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선교지에서 어려울 때 마다 저는 그 생각을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까지 자전거를 타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전거 주인이 내게 허락했어요. 내 자전거를 타 보라고! 그리고는 친구들과 함께 붙잡아 줬어요. 친구들과 함께 달려 줬어요. 친구들과 함께 밀어 줬어요. 그래서 저는 난생 처음으로 혼자서 자전거를 탈 수 있었습니다.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세상을 달릴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우리에게 내 자전거를 타 보라고 허락해 줍니까? 누가 우리를 붙잡아 줍니까? 누가 우리와 함께 달려 줍니까? 누가 우리를 뒤에서 밀어 줍니까? 어린 친구들이 나를 붙잡아 주고 밀어 주었을 때에도 저는 얼마 동안은 세상을 달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자전거를 타 보라고 말씀하시고,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우리와 함께 달려 주시고, 우리를 밀어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세요.

제가 교회의 대문 기둥에 부딪혀 넘어 졌을 때 친구들은 넘어져 있는 제게 오지는 않고, 자전거가 고장 났을까봐 염려하며, 쓰러진 자전거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것이 어린 저에게는 못내 서운했어요. 그것이 부모를 떨어져 외롭게 살랐던 저에게는 큰 상처가 됐어요. “너희들 친구로서 그럴 수 있니!” 그런데 지내고 보니까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더라고요.

능력 없으면 주목 받지 못하고, 무언가 우월한 것이 없으면 점점 변두리로 밀려나고, 넘어질 때 진심으로 손을 내밀어 주는 친구를 만나기 어려운 상처와 아픔으로 가득한 인생! 그러나 우리의 삶에 원동력이 되시는 주님! 그 분은 우리가 넘어졌을 때에도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일으키시는 주님인 것을 믿습니다.

신앙은 그 주님께 붙들린바 된 것을 인정하는 것이에요. 소명이란 그 주님이 나에게 사명을 주시고, 나를 붙잡아 주시고, 나와 함께 달려 주시고, 나를 밀어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에요. 보잘것없는 나를 불러 주신 하나님! 능력 없는 나에게 일을 주신 하나님! 하루하루 의미 없는 것 같은 일들 속에 헤매고 있는 나의 삶에 뜻을 두시고, 의미를 주시는 하나님! 나를 인정해 주시고 나의 삶에 귀한 결론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주님! 주님이 나를 붙드셨습니다.

주님! 주님이 허락하시고 가라 하시니 갑니다. 주님! 이제부터 나의 삶은 주님의 힘으로 갑니다. 이 단순한 고백이 우리의 일생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어려움 속에 있어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바 되었기에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붙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모두가 두려워하던 골리앗을 앞에 놓고 담대히 외쳤던 다윗처럼 담대히 외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문제는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이 문제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지진도, 염려도, 걱정도, 오늘의 불황도, 앞날에 대한 두려움도, 아픔도, 질병도, 서러움도 우리를 결단코 얽매어 놓을 수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붙드세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약속으로 붙드세요. 보증으로 붙드세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하나님의 섬세한 인도하심을 반드시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김창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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