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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자의 법칙(눅 14:2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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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례없는 부흥을 하였습니다.
100여년의 짧은 기독교 역사에 비해 엄청난 성장을 한 것입니다. 세계 어디를 가도 교회당이 많은 나라가 없고 블신자대비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나라가 없습니다. 이런 결과는 특별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선교2세기를 맞이한 한국교회를 향하여 한결같이 목회자나 신학자나 모든 교계의 지도자들이 위기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지적하는 문제는 그동안 급성장한 한국교회는 급성장에 따른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존경받는 옥한흠 목사님은 그 중심의 문제를 3허라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허수에 매였다고 합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수입이 100만원 이면 200만원이라고 속이고 30평 아파트에 살면서 40평이라고 속이고 교회는 200명이 모이면 300명이 모인다고 허수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량주의에 젖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허세가 문제라고 합니다. 숫자를 앞세우고 크기를 앞세우고 건물을 앞세우고 높은 직위를 앞세우지만 실상은 실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큰소리만 치고 허풍과 겉치레가 만연한 실상으로 인해서 결국은 세상에 매력을 주지 못한다는 지적입니다.

그리고 허상입니다. 외형적으로는 번듯한 사람이고 교회당도 번듯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내용이 없고 실속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입술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실사의 삶은 ‘너나 나나 마찬가지’라는 세상에 별로 신비감을 주지 못한다는 지적입니다.그러면서 교회 부흥이 왜 안되는가? “교회 때문에 안된다”라는 지적입니다. 여러분들이 듣기에는 거북하실질 모르지만 사실 많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교회가 되고 왜 이런 크리스챤이 되었는가? 누구의 책임인가? 물론 우리 각자 각자의 책임일 수 있지만 가장 큰 책임은 바로 교회의 지도자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주체인 성도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가르치고 훈련하지 않았다는 지적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인 주님의 제자를 만들기보다 외적인 성장주의에 포로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데만 집중했다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 교회들마나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문제점들을 발견하고 평신도들을 주님의제자로 세우는 사역들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지역은 이런 부분에 있어서 좀 느린 편입니다. 그러나 비록 느리고 저항이 있어도 교회는 평신도를 주님의 제자로 세워가는 일에 무엇보다도 집중해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교회의 머리이신 우리 주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가장 집중하신 사역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땅에 오셨던 우리 주님이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법칙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우리 주님이 사역하실때에 많은 무리들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본문도“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라고 상황을 설명합니다. 예수님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님을 따랐습니까?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의 수는 엄청난 숫자엿습니다. 벳새다 광야에서 기적을 행할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중에 남자 장정만 5천명이었습니다.당시에 예루살렘 인구가 2만 5천명정도였으니까 엄청난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무리들이 주님을 따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하나님이 아들로 믿고 에수님을 위해 삶을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대부분 자기들의 이익과 필요를 채우기 위한 세상적인 동기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은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모으는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를 만드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그래서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시고 양육하시고 훈련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그렇습니다. “가르침의 깊이가 없이 계속되는 교세의 확장은 훗날 교회를 허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예수님 당시처험 예수님을 쫓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순히 주님을 좇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제자가 되기를 소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가 되는 길이 간당하고 쉬운 길이 아님을 지적합니다.
단순히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고 고백하고 예배하는 가운데서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을 넘어서서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가 되는 길이 간단하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님의 제자의 길을 따라나서는데 어려움이 있음을 전제하고
16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3절 “내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번씩이나 부정적인 측면에서 엄격한 말씀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외적으로는 오히려 자신의 제자가 되는 조건을 외적으로 “누구든지 ”될수 있도록 그 문턱을 낮추었습니다.시대를 초월하여 “누구든지” 내적인 준비의 댓가를 치르도록 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학력을 따지지 않습니다.신분을 따지지 않습니다.외모를 따지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가 되는 사람들에게 결단되어야 할 조건들을 제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제자의 조건대로 실천하시어 주님 칭찬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예수님의 제자는 주님을 사랑하기 위한 미움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14:26 “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여기 미워해야 한다고 하면서 자기와 관련된 부모 처자 형제 자매를 미워해야 하고 자기 목숨을 미워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역으로 말하면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자가 주님의 제자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가장 사랑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본능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가족들을 사랑합니다. 우리의 부모님은 누구보다도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의 아내 남편 얼마나 사랑스럽습니까? 형제와 자매 정말 사랑해야 할 귀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의목숨을 우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을 알기전에는 그렇게 했습니다. 피아 인정과 혈연관계로 우리의 가족들을 제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가 제일 사랑해야 할 분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의 구주와 주님이 되신 우리 주님을 제일 사랑하기를 소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의 법칙으로 “가족”에 대한 부분을 왜 문제삼으신 것일까요?
어느 사회이든 제일 마음에 우상으로 삼기 쉬운 대상이 바로 가족입니다.
유대사회는 가정이 모든 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가정이 회당보다 더 중요한 곳입니다.유대사회에서 종교 생활은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가정에 아버지는 제사장으로서 마지 성전에서 제사장이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듯 자신의 집에서 율법을 가르쳤습니다.그래서 어떤 랍비는 “모든 회당이 다 문을 닫는 일이 생기게 된다 하여도 유대교는 존속할 것이다‘라고 하엿습니다.

그런데 그 유대 사회 가정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바로 “평화”입니다.“평화로운 가정”이 목표입니다.다툼이 없는 샬롬의 가정을 잘 이루는 것이 훌륭한 가정이요 가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 가정의 평화의 공동체를 깨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마태복음 마10:34-37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이라 내가 온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믿고 제자가 되는 곳에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은 “화평”이 아닙니다.전쟁이 찾아옵니다.싸움이 찾아옵니다.한가족 중에 누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싸움이 일어나야 정상입니다.물론 그렇다고 싸우라는 것이 아닙니다.그만큼 인정의 결단이 있어야 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그렇지 않고는 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을 얻었을때에 어떤 기분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상상하여 보십시오. 영화 더 바이블에서 보면 아브라함이 밥을 먹을때에도 이삭과 먹습니다. 잠을 잘때에도 이삭과 잠을 잡니다. 사냥을 갈때에도 이삭과 갑니다. 어디에서나 이삭과 함께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내 사라가 경수가 끊어져 더 이상 낳을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얻은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이삭같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 가서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사흘길을 걸어가서 모리아산에서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제물로 바치려고 했습니다. 그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시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향하여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인정하시고 아브라함에게 복을 더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까요? 아브라함에게서 점점 아들 이삭이 우상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우상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어쩌면 욥과 같이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제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은 가족을 선물로 주셨지만 가족이 하나님보다 더 우상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가족이 우상이 되지 않는 삶의 법칙을 준수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사역하시는 곳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식구들이 찾아왔습니다.
누군가 예수님에게 말씀하였습니다.“선생님 밖에 어머니와 동생들이 오시어서 당신에게 말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반갑게 나와서 어머니와 동생들을 환영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그런데 그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인가?” 그때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합니다.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생각하는 가족 주님이 생각하는 형제 자매는 누구입니까?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모두 가족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땅에서 살지만 이미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가족의 혈연이 아니라 주님이 기준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인정하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있는 삶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가족의 삶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의 가족을 넘어서 더 큰 가족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한평생 자기 자식과 자기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으로 마치 바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인생을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가족을 잘 섬기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내가족처럼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섬기고 영향력을 줄 수 잇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맹목적인 자식에 대한 편애와 그리고 가족에 대한 편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내가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고 우리 자녀들을 주님의 제자로 길러내어야 합니다.
믿음 생활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족을 잘 돌보고 자녀들을 잘 양육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부여된 책임입니다. 그러나 가족이 우상이 되어서 주님과의 관계에 제한을 받아서는 안됩니다.자녀들이 있을수록 더욱 먼저 부모가 주님의 제자로서 길을 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먼저 부모들이 주님의 제자로 변화되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가정 속에 진정한 주님의 제자로서 영향을 미치시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의 제자는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입니다.

27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져야 제자가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십자가는 너무나도 유대인들에게 설명이 필요없는 고난과 죽음의 상징의 표시였습니다.심히 고통스러워하다가 죽는 사형틀이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고통과 죽음의 그 십자가를 날마다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라”합니다.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주어진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나의 바로 뒤를 따라오다”는 뜻입니다.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바로 뒤에서 따라가는자가 바로 제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 때문에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함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주님 때문에 많은 손해를 보고 많은 배척을 당하는 때로는 죽기까지 당하는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과 함께 고난받기보다는 먼저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자기 야망이 얼마나 많습니까? 3년정도의 시간이 흘러가고 주님과 주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생각하기를 “이제 주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주님의 나라가 이땅에 임한다”는 기대를 하였습니다. 그때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나와서 구합니다. “선생님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그래 너희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합니다. “주여 영광중에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안타까와 하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라고 하십니다. 영광을 구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먼저 나의 마시는 잔 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잇느냐 하십니다. 여기 주님이 마시는 잔 주님이 받는 세례가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에서 받는 고난의 잔이요 고난의 세례인 것입니다. 주님은 영광을 구하는 제자들에게 먼저 고난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주님이 이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신 것은 고난입니다. 우리 주님은 고난받으시되 섬김의 고난을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희생하시는 고난을 우리에게 먼저 본보이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이 고난을 받으실 때 하나님이 예수님을 높이셔서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빌2:10-11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땅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길을 가시기 위해서 먼저 고난을 배우시고 담당하시는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고난받으라고 하면 잘 됩니까?
잘 되지 않습니다. 바로 내가 내 안에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서 먼저 영광받기를 원하는 나의 야망 나의 욕심 나의 자존심이 얼마나 나를 힘들고 괴롭게 합니까? 어쩌면 주님의 제자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오늘 내가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입니까?가장 나를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는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어떤 경우에는 그 적은 외부에 있지않고 내부에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있어서 괴롭히는 옛사람의 나가 나를 가장 괴롭히는 자기와 전쟁을 벌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깨져야 합니다.내 의지가 죽어야 하고 내 야망이 죽어야 하고 내 기질이 죽어야 합니다.교만이 깨져야 하고 욕심이 깨져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셔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내가 부서지지 않고는 우리는 제자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비워 하나님의 종이 되어 죽기까지 십자가를 지셧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비워자신에 대하여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우리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가정도 보십시오. 내가 살아서 나 중심으로 가면 그 가정은 깨어지고 맙니다. 직장다지면서 내가 살아서 내가 하고 싶은 말 다하고 하고 싶은 행동을 하면서 마음대로 해보십시오. 금방 잘리고 맙니다. 물론 본인이 오너로 있는 자영업은 덜합니다. 그러나 자영업 하시는 분들도 거래하는 사람들과 관계에서 얼마나 자기를 죽여야 하는지 모릅니다. 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의 교칙을 어기고 내 마음대로 옷입고 시간도 지키지 않고 행동하여 보십시오. 결국 학교 생활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교회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나와 주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주님과의 관계가 풍성할 수 없습니다. 교회 속에서도 내가 죽지 않으면 교회 생활의 풍성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교회 속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죽고 주님의 고난의 자리에 동참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그것은 그냥 되어지지는 않습니다.
나를 내려놓고 고난받는 제자로서 나를 훈련하는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물론 훈련받는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훈련받을때 훈련받지 않는 자보다 고난받는 주님의 제자로 변화될 가능성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 속에서 제자훈련을 10여년 하면서 제가 경험한 것은 변화되는 사람들도 있고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장 변화가 어려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내가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내가살아있는 사람은 내주장 내 이론 내고집 내감정 내경험이 앞섭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함께 훈련을 하면서 저는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섬김을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섬김을 베푸는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영광의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먼저 희생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기 야망에 사는 사람이 주님의 뜻을 위해서 희생하고 섬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저 자신입니다. 저는 종종 제자훈련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해서 사람이 변하느냐고 그것해서 사람이 새로워지느냐고 다 무익하다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말합니다. “저는 저 자신을 보면서 분명히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변화가 어떻게 가능합니까? 바로 주님을 위해서 작은 고난을 받으면서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훈련은 고난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받지 못합니다. 주와 함께 자신의 의지를 꺽고 복종하고 자신을 드리는 고난의 결단이 있는 사람만이 제자훈련할 수 있습니다.종종 게으르거나 안일한 삶을 살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은 훈련받지 못합니다. 나를 내려놓고 주와 함께 그 길을 가기를 원하는 사람만이 그 길을 향해 자기를 내려놓고 헌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제자훈련같은 것받지 않아도 여지껏 신앙 생활 잘 해왔는데 이제 와서 뭐 그런 것을 하고 받는가? 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제자훈련하지 않아도 신앙 생활 해온 것을 인정하고 또 주님이 역사하신 것 인정합니다. 그러나 서두에 말씀드렸지만 이제 그 정도의 수준에서 주님을 따르는 것에서 우리가 한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자기 십자가를 기쁘게 지기 위해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주님의 고난의 사명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시대 속에서 우리에게 원하는 작은 고난을 기쁘게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이시간 저와 여러분들에게 우리 주님은 원하십니다. ‘먼저 고난받으라’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고난받으시면서 그 길을 가시듯이 우리도 한걸음씩 그 길을 가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의 제자는 소유를 포기할줄 아는 자입니다.

33절 “이와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버리다”은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경히여기는 것”입니다. 제자란 세상에서 내가 가치있게 여기던 돈을 이제는 주님보다 경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그런데 문제는 세상에서 정말 돈을 경히 여길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듯이 이 세상의 주인은 돈입니다. 모든 것 위에 돈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돈은 하나님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돈의 제자가 얼마나 많은가를 보십시오. 요즘 우리 사회에 문제가 되는 도박의 문제는 전부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남자 여자 할 것없이 돈에 대한 욕심을 갖기 때문에 도박에 손을 데고 사기치고 거짓말을 하면서 돈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우리 주님도 이 세상에서 돈을 경히 여기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그래서 주님께서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통과하기보다 어렵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돈을 갖을수록 돈에 대한 포기가 어렵고 주님을 따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돈이냐 주님이야 어떤 것이 더 가치있는 것인지 계산하여 보고 분명히 결단하라고
주문하십니다 .그러면서 2가지 비유를 하십니다.
하나는 망대의 비유입니다.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합니다. 그 망대를 짓기 전에 먼저 계산을 할 것입니다. 이 망대를 짓는데 얼마나 비용이 드는가? 그런데 만약에 돈은 없는데 그냥 시작하다가 망대의 기초만 쌓고 그만둔다면 사람들이 놀리고 비웃을 것입니다. 세상일도 먼저 비용을 계산하고 선택해야 하는 법입니다.
다음은 전쟁의 비유입니다. 어떤 임금이 다른 나라와 싸우러 가는데 먼저 무엇을 계산합니까? 상대방의 전력이 얼마나 되는가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전력을 파악했다면 그 전력을 능가한 승리를 위한 아군의 전력을 준비하고 계산해야 합니다. 만약에 상대방보다 전력이 약하고 도저히 전쟁에 승산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신을 보내어서 화친을 청해야 합니다. 반대로 전쟁에 이길만하다 계산이 되면 전쟁을 벌일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일도 포기할 것이냐 도전할 것이야 결국 계산을 통해서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것은 얻기 위해서는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망대를 쌓아서 좋은 망대를 얻기 위해서는 많은 돈을 투자하고 포기해야 합니다. 임금이 전쟁에서 많은 인명피해를 보면서도 싸움을 하는 이유는 그 죽음보다 더 상위의 것을 얻기 위함입니다.
결국 문제는 어떤 것이 더 가치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가치있는 것을 얻기 위해서 투자하고 도전합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주님께서는 소유의 포기를 주님의제자로 강조했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의 조건으로 내건 이 물질의 포기는 그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관례였습니다.
소유에 대한 포기는 그당시 유대 사회에 다른 종교 모임의 관례였습니다.
당시에 쿰란공동체의 경우만 해도 이것을 요구했습니다.
“ 정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3년이 걸렸다.그런데 처음 1년은 사유재산 인정하지만 둘째해에는 사유재산을 공동금고에 넣어야 했습니다.3년째 정회원이 되면 사유재산을 완전히 공동체에 바쳐야 했습니다.만약 재산에 대해 속이면 엄한 형벌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대 사회의 이런 조건들은 결국 지켜지지 못했습니다.예를 들어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제사장들같은 자들이 결국 드러낸 문제가 바로 탐욕의 문제였습니다.
이 소유의 문제를 결단하는 것은 지식의 힘으로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오직 주님의 도우심 성령의 도우심으로 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예루살렘교회는 성령으로 은헤를 경험하고 나서 가장 먼저 나타난 변화가 바로 물질의 나눔과 섬김이었습니다. 행2:44-4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라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강제적으로 십일조를 하라고 하고 헌금을 하라고 해서 실천되어질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은혜가 임하고 성령이 역사하고 믿음의 힘이 아니고서는 십일조와 헌금생활이 어렵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물질을 포기하고 나누고 사랑함으로 살아갈 때 우리들의 삶은 어떻게 될까요 누가복음18:29-30'“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은 자들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신앙의 본질을 붙잡고 주님의 제자로 우리 모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ㅇ 제자는 예수님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ㅇ 제자는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다.
ㅇ 제자는 주님위해 물질을 포기하고 주님을 제일로 삼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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