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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첫 번째 이적의 비밀 (요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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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요즈음 우리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를 슬프게 하고, 우리의 얼굴에서 웃음을 빼앗아 가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정치인들의 오만과 독선 그리고 무능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성장에는 관심이 없고, 분배만 부르짖다 결국 성장도 분배도 무엇 하나 제대로 되지 않은 경제가 우리의 얼굴에서 웃음을 빼앗아 갑니다. 귀족 노조들의 계속되는 파업이 우리의 마음에 그늘이 드리우게 합니다. 전국의 35개 학교에서 2700여명이 넘는 우리의 아이들이 복통과 설사로 고통당하는 이런 기막힌 세상이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합니다. 북한의 김정일 정권의 미사일과 핵을 통한 공갈과 협박이 우리의 얼굴에 인상을 찌푸리게 합니다. 그런데 더욱 우리의 얼굴에서 미소를 잃게 만드는 것은 양극화문제, 저출산 문제, 이태백 문제, 노령화 문제, 무엇보다도 북한의 핵문제 등 너무나 많은 일들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개혁다운 개혁은 하나도 이루지 못한 채 매일같이 “네 탓이요” “조상탓”만 외치고 있는 무능한 386년 정권의 후안무치입니다.  그리고 지방선거를 통해서 국민들의 의사가 너무나도 뚜렷하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국민의 뜻과는 역주행하고 있는 이 정권의 행태는 정말 우리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이런 유머가 지금 인터넷상에 한참 떠돌고 있겠습니까? 그 내용은 역대 대통령의 운전습관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시중에 떠돌고 있는 이 유머는 역대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을 운전습관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먼저 이승만대통령은 국제면허 운전이랍니다. 뭔지 근사해보이기는 한데 ‘영양가’는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모범택시 운전이랍니다. 개발독재라는 비용을 톡톡히 치루어야 했지만, 절대빈곤에서 나라를 건져낸 점만은 ‘모범’으로 인정받을 만 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최규하 대통령은 대리운전이랍니다. 남(박대통령)의 음주(유고)로 대통령 자리(운전석)에 앉았고, 운전 중 목격한 바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한 모습이 영락없이 대리운전 기사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전두환은 난폭운전이랍니다. 그는 도로 위를 혼자만의 세상인 것처럼 광란의 질주를 했고, 대형사고도 여러 번 쳤기 때문입니다. 노태우는 초보운전이랍니다. ‘보통’ 운전자임을 주장하며 운전실력을 ‘믿어주세요’고 외쳤지만, 도로의 운전자들을 그를 초보(물통령)라고 비웃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김영삼 대통령은 무면허 운전이었답니다. 사상 ‘최연소 운전자’(40대 기수론), ‘운전(정치) 9단’ 등 소문이 무성했는데, 정작 운전대를 잡고 보니 직진밖에 모르는 무면허였다는 것입니다. 나중엔 자기도 무면허 운전을 하겠다고 나선 아들한테 정신을 팔다 외환위기를 맞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에 김대중 대통령은 음주운전이랍니다. IMF를 조기졸업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시장경제를 내세우면서도 시장원리보다는 정부 개입과 권위주의 속에서 오락가락한 탓입니다. 갈수록 음주량이 많아져 임기 후반에는 각종 게이트로 정신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면 노무현 대통령의 운전습관은 어떤 것일까요? 유머는 ‘역주행’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대연정과 사학법, 과거사법, 그리고 장관 지명 등 사사건건 국민들의 일반정서와는 반대 방향으로 역주행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우스갯 유머를 보면서 제 마음 한구석에 쓰라림을 느낍니다. 겉으로는 웃는데, 제 속마음은 울게 됩니다. 제가 보기에 오늘 우리 국민들은 모두 허탈웃음을 웃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웃는데 사실은 기쁨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오늘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라 전체가 기쁨을 잃어버린 사회, 웃음을 잃어버린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2. 몸말

1) 본문의 배경
  여기 오늘 본문에도 보면 사람들이 기쁨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가 웃음을 잃어버리게 된 모습이 보입니다. 한 혼인잔치 집에서 한참 잔치가 무르익어가고 있는데 그만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한 포도주가 떨어져 커다란 낭패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요즈음 같이 어떤 물건이 떨어지면 금방 가게로 달려가서 구입할 수 있는 때도 아니었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혼인잔치가 벌어지면 보통 일주일은 잔치가 계속됩니다. 그리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거의 2주 동안 잔치를 벌입니다. 그리고 그 잔치에서 가장 중요한 음식이 바로 포도주입니다. 왜냐하면 포도주는 기쁨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포도주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편 104편 15절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를 주신 주님을 찬미하고 있고, 사사기에는 요단 숲의 나무들에 관한 한 비유 속에서 포도나무가 숲속에서 왕노릇 할 것을 거절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서 포도나무는 다른 나무들이 그에게 왕이 될 것을 요구하자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삿 9:13)라고 거절을 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포도주를 기쁨의 상징으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유대교의 랍비들, 즉 선생들은 “포도주가 없으면 기쁨도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혼인 잔치집에서 이런 기쁨의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손님들을 잔뜩 모셔다 놓고, 기쁨의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그 주인이 큰 망신을 당할 수도 있고, 비웃음거리가 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눈치 챈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이 위기를 알렸고, 마침 그 혼인잔치에 참여하신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에서 기쁨이 사라지고 잔치가 망치는 것을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하는 첫 번째 이적을 통하여 해결해 주셨습니다.

2) 왜 하필이면 율법의 항아리인가?

  그런데 우리가 오늘 이 가나 혼인잔치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다시 읽어보면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신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치가 한 참 무르익을 즈음에 포도주가 떨어져 큰 낭패를 보게 된 것을 알아차린 마리아의 청에 의해서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는 첫 이적을 베푸셨는데, 하필이면 집 앞에 있는 결례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식사 전이나 외출하고 돌아 올 때마다 손을 씻는 예식을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위생적인 행동이면서 동시에 종교적인 예식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즉 이 예식은 문 입구에 놓여 있는 결례의 항아리에 손을 씻으므로 밖에서 지은 죄나 더러워진 마음을 씻고 안으로 들어가는 귀한 예식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잔치 집에서는 항상 이 결례의 항아리를 많이 준비하여 손님들이 들어오면서 그들의 손발을 씻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6절에도 보면 이 집의 문 입구에 6개나 되는 커다란 돌항아리가 준비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결례의 항아리에 물을 가득 담으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이 율법의 항아리였을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래 처음으로 이적을 베푸신 사건입니다. 본문 1절에 “사흘째 되던 날”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그의 공생애를 시작한  지 사흘이 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 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즉 메시야로서의 그의 신분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확실하게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런 중요한 순간에 무엇인가 성경적이고, 또 모두가 다 감탄할 수 있는 그런 방법으로 표적을 보여주실 법도 한데, 느닷없이 사람들의 더러워진 손과 발을 씻는 결례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말했을 때, 하인들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제 무슨 말씀을 하실까? 매우 궁금해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주가 떨어진 포도주 통을 가져오라고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옛날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 잔치가 다 하는 날까지 포도주 통의 포도주가 떨어지지 않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실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 옛날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 왕의 위협을 피하여 시돈 땅에 있는 가난한 사르밧 과부의 집에 피하였을 때,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왕상 17:14)고 외친 것처럼, 예수님도 그렇게 선포하시지 않을까? 아마 제자들과 하인들은 그렇게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예수님께서는 포도주 통에 포도주가 끊임없이 넘치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손과 발을 씻는 더러운 결례의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포도주가 떨어져 큰 낭패를 당하여 기쁨을 잃어버린 이 순간에, 첫 이적을 통하여 이 가정에 은혜를 베푸사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고자 하는데, 왜 그런 은혜를 율법의 항아리에 담으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은혜를 율법의 항아리에 담다니요, 이것은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사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혼인잔치에서의 예수님의 이 첫 번째 이적은 예수님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너무나도 확실하게 가르쳐 주는 가장 의미 있는 이적이었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3) 새 언약의 포도주: 영원한 구원의 포도주

  마리아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먼저 하셨습니다. 그것은 “여자여,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4절)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여기서 “여자여”라는 단어는 헬라어 “구이네”라는 말인데, 이는 여인에 대한 최고의 존칭어입니다. 우리 말 성경이 번역을 조금 엉성하게 해서, ‘어머니에게 어떻게 “여자여”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원래 본문의 뜻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이 단어는 그 당시에 왕후를 부를 때에 쓰는 용어로써 여인에 대한 최고의 높임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다음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그것은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때”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 의미를 알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그것은 죄와 사망 가운데 빠져 있는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실 때 천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마 1:21)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요 3:16).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천국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대신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그 때, 그 결정적인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 17장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후에 십자가에 달리실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대답의 요점은, 아직 십자가에 못 박힐 시간이 몇 년 더 남았기 때문에 공적으로 어떤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대신에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는 이 첫 표적을 통해서 당신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왜냐하면 포도주는 인간들에게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잔치를 배설키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실 당신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이 첫 표적을 통해,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이루어 주실 우리의 구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주의 첫 표적으로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신 주님께서는 포도주와 더불어 당신의 공생애를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눈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포도주 잔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태 26:27하반절-28).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우리의 죄사함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흘리실 보혈과 포도주를 동일시하셨습니다. 그리고 포도주를 주시면서 그것이 주님의 보혈,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포도주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리를 죄와 사망 가운데서 살리신 영원한 구원의 표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왜 예수님께서 그의 이 땅에서의 처음 표적을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으로 행하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애의 첫 표적을 베푸신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오신 사명, 즉 영원한 생명, 영원한 구원을 주러 오심을 위한 표적이어야 하지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는 주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포도주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신 주님의 표적은 그저 잔치 중에 기쁨의 포도주가 떨어져 당황하고 있는 주인을 돕고,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을 들어주기 위한 배려만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더 깊고 놀라운 계시가 담겨 있었는데,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신 이 표적은 우리 주님의 사명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신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4) 우리를 위한 복음

  그리고 우리는 이 사건에서 우리를 위한 복음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듣게 됩니다. 결례의 항아리에 담긴 물이 포도주가 된 것은 하인들과 제자들만이 아는 비밀이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들도 이 계시의 사건이 담고 있는 비밀의 참된 의미를 몰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물이 최상품의 포도주로 바뀐 것을 알고 감탄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이 표적이 전해주고 있는 복음의 비밀을 분명히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특별히 결례의 항아리, 율법의 항아리에 물을 담그게 하여서 그것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결례의 항아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씻어도 씻어도 계속해서 씻어야 하는 우리의 죄를 보여주는 항아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율법의 항아리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결코 완전히 씻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그 어떤 행위로도 완전히 죄 씻음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항아리에 담긴 물을 영원한 구원의 포도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율법의 항아리는 순식간에 은혜의 항아리가 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복음의 비밀이 있습니다. 여기에 첫 번째 이적의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씻고 또 씻기 위하여 사용하던 정결예식의 물(옛 언약의 물)을, 새 언약의 포도주로 바꾸어서 우리의 죄를 영원히 씻어주실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흘리실 당신의 피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씻어주실 것을 이 표적을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포도주를 들고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태 26:27-28)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하여 동물의 피를 흘리거나, 정결례 예식을 위한 물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를 그의 보혈로 씻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실로 우리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최후의 피 한 방울, 마지막 물 한 방울까지 다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흘러내린 주님의 물과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씻어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주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아십니까? 여러분들은 주님께서 주신 이 보혈의 생수를 받아 마셨습니까? 여기 우리 주님의 이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보여주는 한 어머니의 사랑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난 1995년 성탄절이 가까운 때에 舊소련 연방의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커다란 지진이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그 엄청난 지진 때문에 무려 55,000명의 사람들이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에 한 어머니와 한 딸이 무너진 건물더미에 함께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 어머니의 이름은 수산나였고, 4살짜리 딸의 이름은 구이안(Guian)이었습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공간에 갇혀 있는 모녀의 몸은 점점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구조의 손길이 임할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어린 딸은 무서워서 자꾸 울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무서워” “엄마, 우리 여기서 못나가는 거야?”
“아니야, 걱정하자 말어. 조금만 기다리면 아저씨들이 우리를 금방 찾으로 올 거야”
무서워 떨고 있는 딸을 향하여 엄마는 계속해서 우리는 괜찮을 것이라고 위로하였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어두운 공간은 그야말로 칡흙같이 어두워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구조의 손길은 닿지 않았고, 그렇게 사흘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는 공포와 허기에 지쳐 점점 그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목이 마른 아이는 엄마에게 계속해서 먹을 것과 물을 달라고 울면서 보채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아이도 엄마도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인하여 그 생명의 불꽃이 가물가물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이 엄마의 손에 무엇인가 예리한 것이 잡혔습니다. 그것은 건물이 무너질 때 쏟아진 유리조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엄마는 그 유리조각으로 자신의 팔뚝을 그었습니다. 그리고는 아이에게 자신의 피를 마시게 했습니다. “구이안아, 여기 물이 있다. 이 물을 마셔라”라고 그 어머니는 자신의 피를 아이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가물가물 의식이 흐려져 가던 아이는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엄마의 피를 받아 마시고는 비로소 갈한 목을 축이고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마침내 구조대가 이 두 모녀가 갇혀 있는 곳을 지나다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건물 더미들을 치웠습니다. 구조대가 건물 더미들을 다 치우자 거기에는 비교적 건강한 모습을 한 여자아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옆에는 모든 물과 피를 다 흘려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는 엄마가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누워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의 모습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한없는 사랑을 조금이나마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아낌없이 다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의 값을 대신 치러주셨습니다. 내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그가 대신 달리셨습니다. 내가 찔려야 할 창을 그가 대신 찔리셨습니다. 내가 맞아야 채찍을 그가 대신 맞으셨습니다. 내가 당해야 할 멸시와 천대와 침 뱉음을 그가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흘려야 할 물과 피를 그가 대신 흘리셨습니다. 아낌없이, 최후의 한 방울까지 다 흘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바로 저와 여러분을 그렇게도 사랑하시고 계십니다.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그 분의 옆구리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피는 우리의 죄를 사하는 생명의 피였습니다. 군병들이 창으로 그 분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거기서는 물도 함께 쏟아져 나왔습니다(요 19:34). 그 물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는 거룩한 생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생수의 강이었습니다. 

3. 나가는 말: 초청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물과 다 흘리신 주님께서 이 시간 우리들도 혼인잔치에 초청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영원한 기쁨의 잔치를 배설하시고 기쁨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들을 그 천국의 구원잔치에 초청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초청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 보십시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은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 55:1-2)
“예수께서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8)

사랑하는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흐르는 영원한 보혈의 샘, 이 보혈의 생수가 우리를 영원한 죄와 사망 가운데서 살리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값없이 주시는 우리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생수를 받아 마시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마셔도 마셔도 목을 축일 수 없는 세상의 기쁨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세상의 포도주는 반드시 고갈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과 쾌락은 반드시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수는 결코 고갈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바라기는 우리 모두 우리의 굶주림과 갈증을 온전히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의 주님으로, 우리 가정의 가장으로, 우리 교회의 주인으로, 그리고 이 민족의 통치자로 모셔 들여, 세상이 주지 못하는 진정한 기쁨과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넘치도록 주시는 그 기쁨의 포도주를, 은혜의 포도주를 우리 주변의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는 이웃들과, 그리고 참된 기쁨을 잃어가고 있는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도 나누어 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승중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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