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께 속한 자의 기쁨 (신 10:14~15, 요삼 11~12)

  • 잡초 잡초
  • 411
  • 0

첨부 1


미국의 남북전쟁이 한참일 때에 북군 참모들이 링컨 대통령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시면 우리는 이길 것입니다”. 링컨이 그 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시기를 바라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편에 있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영원까지 우리 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스스로 우리 편이 되어주시기를 기대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항상 하나님 편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고 성경은 여러 번 확인합니다. 시편 118:6-7에는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많은 성경의 말씀들이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살면서 줄서기는 피곤하지만 잘만 서면 엄청난 덕을 입습니다. 세상의 아무개가 권력을 잡게 되면 서로 눈치 보면서 줄서기를 합니다. 줄을 잘 서면 덕을 보고, 줄을 잘못 서면 해를 입습니다. 하나님께 줄을 서고, 속하여 수지맞은 사람도 많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입니다.

  요즘 말도 많은 ‘편가르기’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 편과 마귀 편, 이것만은 갈라야 합니다. 그러나 화합, 통합, 일치, 세계화 시대에 모두가 한 편이며 세계인이 적이 없이 동지이며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삼연(三緣)을 말합니다. 사회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혈연, 지연, 학연을 말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개인주의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집합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소속감과 연대감이 사회생활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정치뿐만 아니라 일반사회생활에서도 삼연은 굉장히 중요한 요인입니다. 그래서 반대 경향을 가진 사람을 쉽게 비난합니다. 반대편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벌떼같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사회생활하면서 소속된 모임이 얼마나 될까요? 알게 모르게 20개 내지 30개는 다 소속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마 그 이상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가입된 모임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소속감입니다. “나는 소속되어 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정체성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느냐에 따라 결정 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소속감은 중요한 정체성입니다.

  철수라는 5 살배기 아이가 엄마와 지하철을 탔습니다. 지하철 안에서 너무 떠들어 엄마가 “철수야, 엄마가 어떤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고 했지?”라고 했습니다. 그 때 철수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아빠!”라고 하더랍니다. 요즘 유머에 보면 아빠가 엄마 편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죠? 우리 모든 가정에서 아빠가 엄마 편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좋은 가정입니다. 우리는 내 편이기만 해도 괜히 좋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합니다. 내가 응원하는 편이 이기기만 해도 신나는데 하나님이 내 편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께 속한 자는 선을 행합니다.

  11절에는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 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 속한 자가 선을 행합니까? 왜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뵙지 못합니까? 그 것은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악이 아니시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사람은 선인 하나님을 뵙지 못합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시편 100:5에는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본성이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자는 선합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내게 행하시옵소서. 당신께서 행하시는 것이라면 어느 하나라도 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절대로 악을 행하실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선함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가 선하지 않다는 것은 이율배반적 말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악인이 없으며, 마귀에게 속한 선인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2:35에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3:11에는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고 하고, 3:12에는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고 합니다. 선하신 하나님께 속한 자는 절대로 악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예수 믿는 사람도 별 수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교회 나오면서도 못된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마저도 예수님을 안 믿어 보세요. 형편없을 사람입니다. 기독교가 아무리 타락하고, 우리가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미래학자들은 미래의 사회, 정치, 경제 이 모든 것을 기독교가 이끌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건강이 무엇이라고 정의하는가 하면 조화로운 것이라고 합니다. 몸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정신과 육체가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건강한 것입니다. 세계보건기구에서는 건강을 말할 때 정신 건강, 육체 건강, 사회 건강, 이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한 가지 더 첨가하여 영의 건강까지를 건강의 내용으로 말합니다. 영이 건강해야 선합니다. 영이 건강한 사람이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비행기를 탈 일이 있었습니다. 아동부전국연합회가 경주에서 열렸는데 제가 강의를 한 시간 맡아서 비행기를 타고 가게 되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에 옆의 같은 줄에 앉은 외국인이 저보고 먼저 내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아닙니다, 당신이 먼저 내리세요”라고 했습니다. 그 분이 다시 저에게 먼저 내리라고 해서 제가 웃으면서 당신의 자리는 30C이고 내 자리는 30D니까 당신이 먼저 내려야 한다고 했더니 그제야 웃으면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제 앞서 나갔습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작은 선을 행하고 나오니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리고 비행기에서 내려 계단을 내려오는데 어떤 부인이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부인에게 계단 밑에 까지 가방을 들어주겠다고 하면서 가방을 들고 계단 아래까지 내려갔습니다. 작은 선은 또 다른 선을 불러일으킵니다. 선을 행하면 그 자체가 재미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그게 그렇게 재미있다고 하네요. 자신의 속에 악이 있는 자는 악을 행하는 것이 재미있을 것입니다. 우리 속에 선이 있는 자는 선을 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재미있을 것입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히 한 사람이 아닌 선한 사람으로 꾸미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계속 선한 존재로 다듬어주시고, 꾸며주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에 잡히면 선하게 꾸며지게 되고, 선을 행하게 되고, 선한 사람으로 세상을 살게 됩니다.

  ‘선을 행하는 자’ 혹은 ‘악을 행하는 자’는 베드로전서에 많이 말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베드로전서 3:17에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받는 고난을 두려워 말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갈라디아서 6:9에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합니다. 선인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그 자체가 악입니다.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아세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창세기 4:7에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순결은 단지 악을 피하는데 있지 않고 선을 추구하는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기 때문입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컴퓨터 용어 가운데 ‘GIGO’란 말이 있습니다. ‘Garbage In, Garbage Out’란 말입니다. ‘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가 나온다’란 말입니다. 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밖에 나올 게 더 있습니까? ‘GIGO’란 이 말을 다른 말로 적용해 보면 이렇습니다. ‘Good In, Good Out’입니다. ‘좋은 것이 들어가면 좋은 것이 나옵니다’. 우리 속에 좋은 것들이 들어가면 우리를 통하여 좋은 것들이 나옵니다. 좋으신 예수님이 우리 속에 계시면 좋은 것이 나옵니다. 선이 나옵니다. 선을 행합니다.

둘째, 하나님께 속한 자는 뭇사람과 진리에게 증거를 받습니다.

  12절에는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니”라고 합니다. 데메드리오가 누구입니까? 에베소 교인으로 본서를 가지고 간 사람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디오드레베와 한 교회의 교인으로 구제에 힘쓰다가 추방된 사람이란 추측도 있습니다. 어쨌든 디오드레베와 대조적인 선한 인물입니다. 그의 이름의 약칭 혹은 애칭이 데마라고도 합니다. 그의 선한 일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선행은 인정받고 증거를 받습니다.

  “속한 자”란 말의 속함이란 ‘에크’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이 말은 어디에서부터 나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자란 뜻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는데 하나님 편 아니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배에서 나온 자녀입니다. 낳았다고 하지만, “내 배에서나 나왔지만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라고 하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아들 맞아”라는 말도 합니다. 부모에게 속한 자는 속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선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3:7에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라고 합니다. 교회의 감독은 교회 밖에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선한 증거를 얻어야 합니다. 선한 사람을 선한 증거를 얻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31에서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모든 사람으로부터 우리는 증거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대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인데 누가 우리에 싸움을 걸 수가 있습니까?

  여자 연예인이 밖에서 들키지 않고 다니는 방법을 아세요? 화장을 지우면 된답니다. 화장기 없는 ‘쌩얼’이 유행이라니 어디 두고 보면 알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감추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속의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증거가 되고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자기가 억지로 자기를 증거하려니 얼마나 어렵습니까? 내가 아닌 내 자신을 보이려니 얼마나 고달픕니까? 내면에 풍성함을 가진 사람들은 짙은 화장을 하지 않아도 자신감이 넘칩니다. 내면이 풍성한데 외모가 그리 소중한 것은 아닙니다.

  근래에 웬 ‘된장녀’가 갑자기 유행합니까? ‘된장녀’는 미니스커트는 기본이랍니다. 명품 핸드백에 외제 커피를 마시고, 전공 서적을 옆에 끼고 다니는 여성을 말합니다. ‘된장녀’는 겉치레에만 치중하는 몰지각한 여성을 뜻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면의 품격이 고상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명품을 걸치고 들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명품이 되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아무리 ‘루이 뷔똥’ 가방을 들고, ‘빈센트앤코’ 시계를 차도 된장 냄새밖에 더 나겠습니까? ‘된장녀’ 얘기가 나오니까 요즘은 ‘고추장남’ 이야기도 있습디다. ‘된장녀’의 짝꿍인가 봐요. 지난 번 가짜 명품 시계 소동이 났을 때 보니 하나에 1억씩 하는 가짜 명품 시계를 산 연예인들 가운데는 드라마 출연료가 회당 2천만 원이 넘는 연예인도 있었지만 수재의연금은 한 푼도 내지 않았답니다. 겉에 아무리 명품을 걸치고 다닌다고 해도 속에 선한 증거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하면 명품이 필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최고의 명품인데 무슨 다른 명품이 필요하겠습니까?

  인간의 가장 깊은 욕구 중의 하나가 어디엔가 속하고 싶은 욕구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디에 소속되어 있으면 소속감 그 자체가 안정되게 하고 자랑스럽게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알고 보면 소속 자체가 아니라 어디에 소속되어 인정받으려고 하는 욕구입니다. 그리스도에 속한 것이 우리의 욕구가 되고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것이 우리는 이미 가장 중요한 욕구를 다 채운 것입니다.

  이 세상은 5만 명에 의하여 바뀝니다. 다윗은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고 능히 진영에 나아가서 싸움을 잘 하는 자 오만 명을 택하였습니다(대상12:33). 이 세상에는 5만 명까지 필요 없습니다. 7천명만 있어도 바뀝니다.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을 남겨 놓으셨습니다(왕상19:18). 이 세상은 7천명이 아니라도 300명에 의해 바뀔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를 가지고 세상을 바꾸었습니다(삿7:7). 700명이 아니라 120명에 의해 세상은 완전히 바뀔 수 있습니다.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이 이 세상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행2:1). 세상은 50명에 의해 바뀔 수도 있습니다. 1917년 로버트 스피어는 회중 가운데 거룩한 기도의 장소를 가지고 하나님께 체험적인 기도의 열정에 사로잡힌 자 50명만 있으면 교회의 역사는 바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은 10명만 있어도 바뀝니다. 드와이트 무디는 만일 10명의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전폭적으로 헌신한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은 2명에 의하여 바뀝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구하면 들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8:19-20). 하나님께 속한 한 사람은 세상을 바꾸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는 역사를 이루어가기를 바랍니다.

결론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하르모디오스라는 가문이 있었습니다. 이 가문은 오랜 동안 존경을 받는 집안이었습니다. 한 번은 하르모디오스 가문의 후손이 정적이었던 이피크라테스에게 천한 구두쟁이 아들 주제에 뭐하느냐고 모욕을 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피크라테스는 그 모욕에 대하여 “당신과 나의 차이는 출신 성분이 아니라 내 가문은 나로부터 시작되지만 당신의 가문은 당신에게서 끝난다는 것이다”가고 대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가문을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나 때문에 우리 가문이 잘 되게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베푼 선이 뭇 사람에게서 증거가 되고 인정받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이 인정받으시고, 하나님의 선이 인정받고, 하나님이 높임을 받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교회에서 선한 사람을 쫓아내는 디오드레베가 아닌 선한 삶이 인정을 받는 데메드리오가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