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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의 갈림길에서(4) : 여호와께서 치실 때 (룻 1: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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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본문의 배경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 중 나오미라는 한 여인과 며느리인 모압 여인 룻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룻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었던 다윗의 증조모가 되는 사람이었으니(룻 4: 21-22), 이 기사는 사사시대 말기에 일어난 일이라 여겨집니다. 그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는 엘리멜렉과 그의 아내 나오미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 큰 흉년이 들자, 엘리멜렉은 아내와 두 아들 말론, 기룐을 이끌고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 이방 나라 모압으로 갔습니다.
약속의 땅에도 기근이 들었습니다. 굶주림을 피하여 이주해 온 모압에서의 십여 년의 세월 동안 그들의 가정은 커다란 환란을 당하게 되었으니, 배고픔보다 고통스러운 시련의 세월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가 바로 믿음으로써 이방여인임에도 구속사의 계보에 오르게 된 여인, 룻입니다. 우리처럼 인생의 갈림길에 서있던 이 여인의 믿음의 행동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나님의 성품과 교훈을 발견해 봅시다.

II. 여호와께서 치실 때

본문이 속한 룻기 1장에는 다음과 같은 나오미의 고백들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룻 1:13),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룻 1:20-21). 기근을 피하여 이주해 간 모압지방에서 당한 환란의 끝자락에서 그녀는 자기의 가정이 당한 모든 고통을 ‘여호와께서 자신을 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무슨 죄악으로 인해 그녀는 하나님께 이처럼 모진 징계를 당하였으며, 이렇게 슬프도록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고 있는 것일까요?

A. 예루살렘을 떠남

여호와께서 그 가정을 치시기 전에 그들은 약속의 땅을 베들레헴을 떠났습니다. 이스라엘에 큰 흉년이 들어 기근이 오자 그들은 양식을 얻기 위해 베들레헴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깃든 땅에 어찌 기근이 찾아왔을까요?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약속이 깃든 땅에 기근을 내리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그 환란을 통하여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회개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그들을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목적과 계획을 따라 살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창 12:10).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나아간 땅인데, 거기에서 큰 기근을 만나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도 기근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기근을 만난 사람들로서 양식이 있는 땅으로 이주한 것이 문제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기근 속에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며 그 땅을 고쳐 달라고 간구하기보다는 육신의 필요를 따라 약속의 땅을 등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약속의 땅을 떠났던 아브라함과 같이 나오미의 가족도 너무나 불행한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겨 이 땅을 고치며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굶주림을 면하기 위하여 내려간 모압은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땅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도 이러한 기근의 날은 올 수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곤고하여도 물질을 얻지 못하는 때가 있고, 영적으로 곤고하여도 은혜로부터 소외된 것 같은 시련의 시기들을 지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또 성실한 교회 생활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나오미처럼 영혼의 고향, 언약의 땅, 사명의 자리를 등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솔로몬 성전이 완공될 때 그의 기도를 들으사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 7:13-14).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때때로 극한 기근과 환란을 만난다 할지라도 언약 백성들은 그 땅을 떠나기보다는 오히려 그 땅을 지켜야 합니다. 환란을 당한 거기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며 자신이 당하는 곤고함과 환란이 이유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서 만난 그 환란과 시련이 하나님이 잘못된 나를 고치시기 위하여 내리신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하며 돌이켜야 합니다. 은혜 언약 안에는 두 가지가 약속되어 있는데, 용서를 비는 자에게는 무한한 용서와 순종하며 살려는 자에게는 무한한 은혜를 공급하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엘리멜렉 시대에는 솔로몬이 지은 것과 같은 성전은 없었으나 동일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막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을 향해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이 계신 약속의 땅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불신앙이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입니다.

B. 모압에서 당한 환란

기근으로 고통 받던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이주하였으나 그들에게는 커다란 환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늘처럼 믿었던 집안의 가장 엘리멜렉의 죽음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엘리멜렉의 이름은 ‘하나님, 나의 왕’ 혹은 ‘使者, 나의 하나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름과는 걸맞지 않는 불신앙으로 한 줌의 양식을 위해 약속의 땅을 져버렸습니다.

그나마 양식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찾아 온 모압에서는 형편이 좀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거기서 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가정에 다가올 더 큰 불행의 예고편이었습니다. 모압에서 장가들었던 두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이것도 철저한 불신앙의 사건이었습니다. 언약 백성들은 마땅히 자기 백성들 가운데 아내를 맞이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베들레헴을 떠난 불신앙도 부족하여 자신의 아들들을 이방여인과 혼인을 시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십여 년의 세월 동안에 두 아들 말론과 기룐마저 젊은 나이에 죽게 됩니다.

결국 나오미는 홀로 남습니다. 남편도 자식도 다 잃고 세 명의 과부들만 남게 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이 기근을 면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왔고, 양식을 찾아 고향을 떠나왔던 것처럼 또 다시 양식을 좇아 나오미는 귀향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깊은 신앙심이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니라 타향살이가 힘들어서, 다시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 것입니다.

C. 쓸쓸한 귀향

그러나 그의 말미는 참으로 쓸쓸한 귀향길이었습니다. 그 고난의 여정 가운데 나오미는 비로소 이 끔찍한 환란과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베들레헴을 떠난 일, 남편의 죽음, 이방여인과 언약의 자식들을 혼인시킨 일, 두 아들의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지금까지 겪은 모든 환란은 하나님이 자신을 징계하기 위해 행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룻 1:13).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기에, 그분이 우리를 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으로 우리를 때리시는 것은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말할 수 없이 크신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은 우리를 향한 뜨거운 사랑의 기대를 표현하는 또 다른 이면인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 조셉 벨라미는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성심스러운 화목(hearty reconciliation)에로의 부르심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오미를 치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다른 것이 아닌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육신의 양식을 위해 영혼의 본향을 버렸으며, 자신의 아들들을 이방 여인과 혼인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과거의 잘못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깨닫게 하여 다시금 당신과의 사랑의 관계로 부르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지금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순종하여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심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난도 이기고 슬픔도 이길 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다고 하는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늘 부족하지만, 스스로 책망할 것이 없고, 구김이 없는 삶으로 어린아이 같은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런 놀라운 확신을 갖게 됩니다.

III. 환란의 갈림길에서

이 모든 환란을 당한 후에도, 나오미는 아직 참된 신앙으로 돌아온 것 같지 않습니다. 자기의 며느리 중 하나를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게 한 것이 이를 입증합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두 며느리의 선택입니다. 그들은 동일한 환란의 갈림길에서 각기 다른 선택을 합니다.

A. 두 사람의 선택

오르바와 룻은 처음에는 일치하여 어머니의 귀향길을 따랐습니다. 아마도 남편도 잃어버리고, 자식 둘도 모두 떠나보낸 후에 쓸쓸히 귀향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애처롭게 느껴졌던 모양입니다.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룻 1:8-9)며 두 며느리를 저들의 고향으로 보내려던 나오미에게 두 사람은 모두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룻 1: 10)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사려 깊게 그들을 말리며, 돌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룻 1:11-12). 당시에는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가 있어,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여 형의 가문을 잇게 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에게는 그들의 가문을 잇게 해줄 아들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의 권고에 오르바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곧 자신의 신들에게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와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이방신들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말합니다.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룻 1:15). 이것이 바로 오르바의 선택이었고, 이후 그녀는 성경 속에서 영원히 잊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룻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자기 백성, 자기 신들에게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여호와 하나님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이 시킨 일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따르고자 하는 어머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풍비박산이 된 집안의 과부였습니다. 그가 택한 이스라엘 땅은 낯선 곳이었으며, 그 백성들은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녀를 따른들 룻에게 무슨 좋은 일이 기대되었겠습니까?

B. 믿음으로 택한 길

시련의 길에 있던 여인 룻이 믿음으로 선택한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끝까지 따르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기업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성경은 룻의 결단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어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6-17).

1. 어머니와 함께 있기를

첫째로, 룻은 어머니를 선택하였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룻의 마음 안에 있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향한 깊은 사랑, 그리고 사랑으로 맺어진 가족의 연합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룻이 나오미를 따라가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녀는 자신의 고백과 같이 슬픔 여자가 아닙니까? 그는 하나님께 징계를 받은 여자였고, 남편과 자식 둘을 모두 잃어버린 슬픈 여자였습니다. 그런데도 룻은 어머니 나오미를 선택하였습니다. 성경은 침묵하고 있으나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룻은 그의 집안에 시집을 간 후 부분적으로나마 하나님의 계시를 접할 수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신앙이 생겨난 것입니다. 시어머니를 향한 뜨거운 가족 사랑도 바로 그러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께 매 맞은 여인인 슬픈 시어머니와 룻은 사랑의 연합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룻의 마음속에 있었던 이 사랑은 단순히 자연적인 선의(善意)로서의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자비 곧 헤세드(ד󰘑󰖒)를 아는 지식에서 비롯된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이었습니다. 나오미의 집안에 시집 와서 십여 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녀는 어렴풋이나마 하나님의 존재를 알았고, 여호와만이 자신의 유일한 기업이라는 신앙이 생겨난 것입니다. 때문에 말할 수 없이 곤고한 가운데에서도 룻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믿음과 사랑으로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전심으로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환란을 만나고 은혜에서 멀어지게 되면,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우리가 거할 때에는 상처는 작고 사명은 크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은혜에서 멀어지게 될 때 상처는 크고 사명은 작아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가 식게 되면, 모든 사고가 자기중심으로 응축되고, 그렇게 응축된 사고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대신에 자기가 받을지도 모르는 피해에 대한 생각으로 타인을 경계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상처에 대한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상처를 받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 아닐지 모르지만, 상처를 끌어안고 사는 것은 스스로 받은 은혜를 소멸시키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사람, 룻은 그 상처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실 가슴 아프기로 따지자면 나오미 못지않게 슬픈 여자가 룻이 아닙니까? 그녀는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어버리고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그가 받은 가난과 이방인에게 시집간 수모 같은 것들을 상처로 생각하고 끌어안고 살았다면 이처럼 어머니를 사랑할 여유가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은 우리의 자연적 환경이 허락할 때에만 행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족들이 환란 가운데 있을 때에 사랑의 결합이 더더욱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는 은혜로 가족들을 불쌍히 여기고 서로 섬기는 희생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겨울처럼 추운 날에 사랑하는 가족들이 사슴처럼 서로 기대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 은혜로 감화를 받은 우리가 사랑으로 가족들을 끌어안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용서하고 사랑하고 돌보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 있습니까? 고난과 시련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심령이 매우 곤고합니까?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러한 징계의 아픔 속에서 고난의 의미를 깨달으십시오. 그대들의 의무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를 선택하고 행하십시오. 이 환란과 고통 속에서도 우리가 깨닫고 돌아가기를 원하시는 그 마땅한 의무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여러분들을 치심으로 잃어버린 것들이 있습니까? 그것들을 잃어버린 슬픔 때문에 더욱 곤고한 영혼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들을 미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육신의 가족인 식구들과 영의 가족인 지체들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징계 아래서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행동함으로 영혼이 더욱 더 곤고해 지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살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시련을 만날수록 의무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환란을 당할수록 원래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세워 주셨던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물론 여러분들이 은혜에서 멀어지고, 더욱이 자신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징계를 받고 있는 동안에는 그렇게 할 힘이 없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순종하고자 하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무한한 은혜의 힘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할 수 없다고 핑계하지 말고 선한 의지를 가지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를 힘쓰십시오.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만이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인생의 가장 곤고한 시기에서 룻은 바로 이러한 신앙으로 어머니와 함께 있기를 선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난 속에서 상처를 받았고 시련과 고난을 속에서 슬픈 여자였지만, 시어머니를 사랑하고 공경하여야 할 가족으로서의 의무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2.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둘째로, 룻은 하나님을 선택하였습니다. 사실 룻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치신 여자인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하기를 선택한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룻의 이러한 고백은 신앙에 뿌리 막은 결심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남편도 잃어버리고 가정도 깨뜨려져 홀로 된 세 여자 밖에 남지 않았지만, 이러한 깊은 환란과 고난 속에서도 그녀는 오히려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선택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은 비록 소외된 이방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고 살아가야 함을 믿음으로 굳게 붙든 사람이었습니다.

룻은 이방인으로서 이 믿음의 집안에 시집을 와서 비로소 하나님의 계시를 접하였을 것입니다. 시부모들은 그녀에게 신앙의 모본을 보여주지는 못하였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만이 자신의 영원한 기업이심을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그 믿음이 있었기에 남편을 잃은 슬픔과 정든 고향을 떠나는 설움도 모두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 힘은 바로 환란 중에도 여호와 하나님을 택하는 신앙, 곧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기업으로 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행복과 불행, 형통함과 시련을 넘어 불변하시고 완전하시며 무한하신 하나님을 바라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른 아침, 눈뜨는 그 순간에 홀로 깨어 무슨 생각을 먼저 하십니까? 언젠가 달려갈 모든 길을 다 간 후에 하늘나라에서 이렇게 눈뜨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어쩌면 그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른 날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하나님 외에 우리에게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 말고 무슨 또 다른 표양(表樣)들이 더 있겠습니까? 그래서 시인은 말합니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4-26).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거듭남과 함께 시작되는데, 거듭남은 영원을 향한 눈뜸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영원을 향하여 눈뜬다는 것은 곧 영원의 아름다움(永遠美, pulchrum aternae)에 대하여 눈뜨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원은 불변하고 완전하며 무한한 실재입니다. 영원한 사물들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이해되는 것이니, 그 영원은 곧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 자신 이외에 모든 영원한 것들은 그분께 덕(德)을 입고 있는 한에서 영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의 아름다움을 본다는 것은 곧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는 영원의 아름다움에 대해 눈뜰 줄 몰랐으나, 거듭남과 함께 살아난 영혼은 자신의 고향인 영원과 그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자의 모든 위로와 복락은 거기에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힘입어 살아가면서 고난도 슬픔도 이깁니다. 그리고 시련과 환란 가운데서도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우리가 마땅히 사랑하여야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합니다. 그 모든 위로가 영원으로부터 오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사물들의 표상(表象)에 매여 육욕의 노예로 살지 아니하고 오히려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 모든 믿음의 결국은 구원 받은 자에게 물려주시는 하늘나라입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7-9).

그렇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영혼의 완전한 구원을 위하여 썩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게 되는 것입니다. 변전(變轉)하는 세상 가운데서, 잠세적(暫世的)인 세상 가운데서 영원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녀는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인생길을 지나며 앞서 간 엘리멜렉, 말론과 기룐, 그리고 오르바와 나오미까지도 선택하지 못한 바를 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보이는 것을 의존하지 아니하고 약속을 따라 바라는 것을 믿는 믿음의 선택이었습니다. 그것은 환란 속에서 하나님 없는 삶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갈림길에서 택한 아름다운 선택이었습니다.

구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손이 그대들을 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고난과 시련의 갈림길에 두시고 두려워 떨며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환란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기업되시고,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언약 백성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 아닙니까? 하나님만이 우리의 전부이십니다. 그러나 형통할 때에 이 사실을 잊고 살았기에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시려고 이런 시련의 계곡을 통과하게 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고난의 길목에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기에 우리가 마음을 낮추고 겸비하게 하셔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우리를 여전히 시련 가운데 두시는 것은 아닐까요?

가장 가련했던 여인이 하나님을 기업으로 택하는 장면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러한 단순한 신앙의 이치를 너무나 자주 잊고 삽니다. 주님 없는 나의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처음의 신앙 고백을 망각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추루(醜陋)한 영혼으로 갈 길을 몰라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를 차마 보실 수 없어서 때로는 징계 중에서라도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부르십니다.

IV. 결론과 적용

영혼을 가진 인간 존재의 탁월함은 영혼 자체에 있지 아니하고 그 영혼이 진리를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신자의 가장 큰 특권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 속에서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은 바를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와 허물을 뉘우치고, 그의 사죄의 은혜로써 그 영혼이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깨닫는 것이야 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행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누려야 할 바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르바처럼 세상을 택하여 잊혀진 사람들이 되지 말고, 룻처럼 하나님을 선택하고 자신의 의무로 돌아감으로써 오히려 환란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훗날 하나님께서는 이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 룻으로 하여금 보아스의 아내가 되게 하심으로써 그녀의 계보를 통해 이새의 아들 다윗을 태어나게 하셨으며, 그리스도의 계보에까지 올라 구원의 역사를 잇는 신앙의 인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치셨을 지라도 아주 싫어버리지 아니하시니, 시련 중에서도 그분을 찾는 자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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